함경도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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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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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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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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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Curtain Call 2

DUMMY

잠시 후, 그들이 애써 보고 싶지 않았던 장소가 지나간다. 열차역... 저기서 이하사가 전사하면서 셋에서 하나가 줄었고, 거기서 만난 지본 소속 정하사가 다시 셋으로 채웠다. 이중섭 하사와 정하사는 특부후 동기.


횃불을 보고 내려와 단독으로 싸우다 셋을 만났고, 다시 열차역을 공격하는데 이하사가 쓰러졌다. 이하사는 가다 쓰러져 돌연 숨을 거뒀다. 살펴보니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언제였는지 총알을 옆구리에 맞은 상태였다.


횃불로 모인 도시 공격 이후, 다시 그 일대로 돌아가 이하사를 찾았지만 북한군이 시신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 셋은 지금이라도 뛰어내려 북한군 한 명이라도 잡아 수소문하고 싶은 마음 급했다. 기회가 되면 대검 들고 인근 포로수용소를 찾아가 탐문하고 싶다. 정하사는 열차역을 보지 않으려 일부러 앞으로 간 것이다. 뒤쪽 둘. 담뱃재가 길게 늘어지는데도 털지 않고 바라만 본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

다만 운이 좋아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러나 오늘 꿈속에서 나는 들었네

친구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길가에 여러 제대들이 보인다. 그들도 피곤하고 상기된 눈을 하고 있다. 비정규전은 정규전보다는 자유롭고, 어떤 경우 죽음을 자기 손으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다만, 유별나게 힘든 점이 있었다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격리감, 고독이었다. 신병 보충은 불가능했고, 여기로 신병하사 점프시켜 될 일도 아니다.


적어도 1년 이상, 가능하면 2년 정도 훈련해야 대원으로 쓰임새가 그럴 듯 해진다. 같은 숫자에서 가족 버금가게 친했던 전우들은 쓰러지고 줄어들어 한 줌 남았다. 과연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나? 명령이 떨어졌을 때 도피탈출로 복귀가 가능해? 진짜 천리행군으로 퇴출해? 다시 휴전선 생기는 거 아냐? 구출될 수 있어? 짧으면 보름 길어야 한 달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고립감에 다다르자, 대원들은 초연해지는 것이 아니라 잔인해졌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만주로 갈 것도 아니고.’


김중위와 윤중사가 냉랭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지역대원들과의 작전에 대한 추억만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사람을 죽인 곳들이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의견은 동일하다. 열 명을 죽였으면 서너 명 죽였다고 할 작정이다. 칼 썼단 말은 아무도 안 할 것이 분명하다.


항상 배가 고팠으며 땅 파고 풀 덮고 잤다. 화려한 남쪽 생활을 잊기에는 아직 시간이 모자랐다. 남쪽에 있다가 수송기 보트 헬기가 중간에 끼어 갑자기 문화적 충격으로 투척되어 떨어졌다. 지겹고 허무하고 공포가 물든 땅.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보니 김중위와 윤중사는 허무하다. 전우를 대신해 살아남은 게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전장에서 하는 본연의 행위를 의미한다. 싸우면서 월남전 때나 봤을 병기들을 봤다. 적 후방이라 RPD도 탄창 동그란 기관총까지 봤다. 우린 피자-기관총이라 불렀다. 아무리 준군사조직이라고 해도 보는 마음 애잔했다.


적이 애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손에 쥐는 그런 허접한 것들에 관한, 거지들을 죽인 것 같은 허무. 공장에서 나온 총과 칼은 빛나지만 곧 새로운 병기가 나와서 뒤로 밀리고 녹이 슬며, 후대는 현 최신병기도 바보 같이 저급한 무기였다고 평가할 것이다.


후대는 모를 것이다. 그런 병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를. 칭기즈칸의 칼이 녹슬어 땅에 묻혀 모양을 잃었듯 그들의 총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염세적이고 더러운 기분. 잊지 못할 죽어가는 자들의 눈. 꼭 본다. 그러므로 쓰러진 놈이 눈을 쓰기 전에 더 갈겨 완전히 끝내는 게 장땡이다.


연대장은 생존자들을 곧바로 병력수집소로 보내도 되었지만, 한번 보고 싶어 했다. 아무리 산과 들에서 짐승처럼 지냈지만 연대장 앞에서는 정확한 제식을 갖췄다. 연대장 역시 올라오면서 많은 전투를 겪은 듯 피곤해 보였다. 광이 없는 눅눅한 보병연대장 군화를 처음 보았고, 권총에는 실탄이 삽탄된 듯 보였다. 퇴각 못한 잔당들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특히나 후방에 따라가는 단독 차량들은 위험하다. 셋도 바로 그런 차량들을 노렸었다.


“상부에서 지시가 왔는데, 일단 초동리 근처에 병력을 수집하라네. 자네들 여단 전체를 거기에. 왜냐하면 자네들이 이 지역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보 취조도 정보사에서 원하고, 자네들 전사 실종자 정보를 주지 않으면 쉽게 수습 못 해. 알지? 수습이 가능한 상태는 사단 영현반에서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 여기서 점심 먹고 트럭 타고 초동리로 가. 무슨 학교에 모으기로 했어. 거기에 상황장교와 통신을 깔 거야. 만약 모르는 게 있으면 우리가 좀 문의할 수도 있어. 일단 그 학교로 가! 시간 나면 나도 한번 들를게.”


“해산인민학교입니다.”


“그런가?”


“저희가 나온 곳 구부러진 산길들에 대전차지뢰 조심하십시오. 놈들이 작업하는 거 멀리서 봤습니다.”


“그래 고마워. 대대장한테 통보하지.”


“대전차에 대인지뢰 BT로 연결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그래. 알았어. 어이! 이 사람들 식당 추레라로 데려가.”



된장국. 군황색 새털구름 물결에 떠도는 시래기와 두부. 된장국. 군대 된장국... 그리고 김치. 배식 텐트로 가서 첫 숟가락 심심한 된장국을 떠 입 안에 넣는데, 그 후끈한 목 넘김과 혀끝에 오는 맛. 식도를 타고 밑으로 흐르는 따스한 줄기... 셋은 밥을 먹고도 다른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흥분했다. 급하게 떠 넣어 턱 들고 입을 벌려 국과 밥의 열기를 식힌다.


“허... 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 늦은 아침을 먹던 연대본부 몇 명은 그들을 보고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셋은 자신들 두 배는 될 밥을 산처럼 얹고, 입에 넣으면 두 번 씹고 꿀꺽꿀꺽 삼킨다. 반찬 칸 검은색 간장 국물 아래 고기 왕건이가 있었지만, 셋은 밥을 빨리 많이 먹는 것에 습관이 들어 있었다.


몇 개월 동안 주로 먹은 것은 강냉이와 감자 고구마 쌀 염장 무였다. 북한군 전투식량 즉석쌀밥은 여기서도 귀하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일들. 야밤에 북한군 주둔지에서 염장 무를 파내간 기억도 있다.


기회만 되면 일단 최대한 많이 먹어야 했다. 체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많은 양의 먹을거리나 식량을 지고 산으로 튈 수 없었다. 특전조끼 등낭에 아무리 쌀을 채우고 올라가도 금방 동난다. 군대식당에서 하루 세 끼 먹는 밥. 그걸 실제로 지어보면 부피 질량 엄청나다. 반합을 잃어버리거나 부서져 민가의 솥을 훔친 중대도 있었다.


김치가 맛은 있었지만 셋에게 상당히 매웠다. 위장으로 들어가자 속이 바로 쓰리다. 고춧가루 들어간 매운 게 너무 오랜만이다. 북한은 모든 것에 소금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맛이 있어도, 아무리 배가 불러도, 셋은 웃을 수가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죄책감. 먹을 때 가장 세게 온다. 너는 먹고 있니? 너는 먹고 있니?


그래 너는 먹고 있구나...


환청이 들린다.



먹고 나오는 길에 북한 쌀과 주먹밥과 도토리를 으슥한 데 버렸다. 배가 상당히 불룩했으나 걱정 안 한다. 곧 꺼지니까. 정말 금방 꺼진다. 몸이 그렇게 적응되어 있다.


다시 트럭에 오를 때, 연대본부 원사가 오더니 군납 소주 세 병을 던져주었다.


“목이나 축여. 게릴라들아.”


“감사합니다.”


“당소 야전전환이다. 쎄면발이.”


“단결!!!”


“안주로 군납 황도 하나 받아라이. 여기!”



빨간 뚜껑 소주를 나발로 불며 가는데, 비포장도로 양 옆으로 행군하는 병력도 있고 장갑차도 지나가고 탱크도 지나간다. 걷는 놈은 타고 있는 놈에게 항상 좆같다. 트럭 뒤를 보며 쟤들은 뭐야 악의와 조소를 품는다. 쟈들은 타고 왜 우린 걸어... 후후후.


오랜만에 마신 술은 후끈하게 올라왔고, 감정도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강제로 끊었던 알코올은 강했다. 과연 얼마나 모일 건가 걱정도 된다. 특히나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단독 혹은 2-3인조로 활동하다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도 생긴다.


셋도 그러했으니까. 밥도 배불리 먹고 술도 마시자 곧 곯아떨어질 유혹에 시달린다. 그러나 도착해서 사람들을 보기 전에 퍼지기 싫었다. 몇 달 동안 제대로 마음 편히 잔 것은 손에 꼽는다. 지역대 병력이 줄면 줄수록 잠은 더 민감해졌다. 야간 동안 정식 경계병을 세울 방법이 없으니 2인조 이하는 항상 총을 잡은 채 가면을 취했다. 한 명이 세 시간씩 불침번을 설 수가 없다. 가면. 귀뚜라미 발걸음에도 검지가 방아쇠울로 간다. 그 귀뚜라미 소리가 죽음의 징후일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먹은 것은 20분도 되지 않아 푹 꺼졌다. 위장은 그 푸짐한 한 끼로 자신을 현혹시키지 말라며 비웃고 있었다. 윤중사가 주먹을 쥐고 힘을 부르르 쓴다. 먹은 것이 곧바로 힘으로 온다. 굶어본 사람들은 경험한다. 한 끼 잘 먹어 눈이 쑤욱 앞으로 나오고 팔뚝과 허벅지에 힘이 뻗히는 거. 황도 한 깡과 소주는 어느 훈장 못지않게 대단한 상이었다.


병을 입에 물고 그 맑은 액체를 꿀꺽꿀꺽 젖을 빨듯 들이켰다. 남에서는 소주 한 번 마시면 거의 물과 같았는데, 오랜만에 마시니 한 모금에도 훅 올라온다. 병목을 입에서 떼자 곧바로, 나누어먹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생각난다.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이 맑은 액체를 빨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살아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 이 한 모금의 술. 나누지 못하는 소주. 이 한 모금의 술로 내장이 따뜻해지고 그 열기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지역대원들... 장교, 부사관, 병사. 어디로 떠났나. 천국이 있다면 모두 계급장을 떼고 주민등록 앞자리 여섯 자리로 가리라...



각 지역대 모두 사건들이 있었겠지만, 김중위 지역대도 몇 시간 말로 풀어도 모자랄 사건들이 있었다. 이 중대 팀장이 재임 끝나고 보병부대로 떠났는데, 상부만 안 채로 전쟁이 목전으로 치닫는 가운데, 마땅한 팀장이 오지 않자 지역대장이 지역대본부 정작장교였던 김중위에게 대리팀장을 맡겼다. 그리고 작계가 현실화되었다.


전투보다 준비가 더 피곤했다. 막상 수송기에 올랐을 때는 이틀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였고, 얼마나 피곤했는지 지역대원 모두 비행기가 추락하건 말건 죄다 곯아 떨어졌다. 상기된 하루하루의 무거운 부담과 하달 정보와 감정싸움, 수도 없이 변경되어 내려와 최초의 것이 무엇인지도 까먹을 정도의 작계. 위성사진이 판독되면 하루아침에 목표가 바뀐다. 이어지는 작계연구와 브리핑, 브리핑, 브리핑. 그때 부팀장 서상사가 그랬다.


'(위에) 맞춰주세요. 그러나 우린 넘어가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야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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