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갑과을
작품등록일 :
2014.06.09 15:11
최근연재일 :
2021.08.24 02:05
연재수 :
101 회
조회수 :
32,710
추천수 :
36
글자수 :
1,247,842

작성
14.06.14 13:32
조회
598
추천
3
글자
23쪽

이스트 민스터와 이스트 민스터 - 01

DUMMY

Channel 1. 로키


1623년 4월 1일

이스트 민스터는 활기가 넘친다.

이렇게 말을 하면, 리버 다운 그리고 뉴 빌리지의 사람들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나는 ‘활기’란 단어의 적용사례를 단순히 유동인구로서 판단하지 않는다. 유동인구를 활기의 척도로 설정한다면 워터 프론트까지 활기가 넘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 이야기를 말 했듯이 난 혼잡스러웠던 워터프론트의 역전보다는 선요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시체를 처리하던 뒷골목에서 생기를 느꼈던 사람이다.


음.......... 막상 말을 하고 나니까, 내 취향이 고어틱 하지 않을까? 하고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으니 해명을 해둬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활기란 외적인 것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진정성있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가라는 내적인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 함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교환하는 미소, 그리고 때로는 눈치싸움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스트 민스터, 그중에서도 이 도깨비 시장은 사람들의 활기로 마치 일렁이는 것 같다. 나는 일렁이는 활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런데........... 나같이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이렇게 생명으로 약동하는 이곳에는 웬일인지 궁금한 모양이군. 혹시 나란 사람조차도 알고 보면 뜨겁게 생을 사랑하며 이런 생의 약동 속에서 숨을 고르는 취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당신은 역시 나에 대해서 아주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감정을 버렸다는 것은, 고어함 죽음 숭배와 동일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난 결코 죽음을 숭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로 오해한 것처럼 시장통에서 생명의 약동 속에 푹 빠져드는 취미 또한 가지지 않았다. 난 지금 이곳에 일을 하러 온 것이다.


오늘 아침에 토라에게서 이곳에서 타깃과 접촉할 기회가 있는 생길 거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녀가 간과한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우선, 나는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을 인식하려면 최소한 세 번은 봐야한다. 그녀는 늘 나에게 ‘오빠, 오빠같이 실력이 있는 사람이 확실하게 성공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이라는 걸 할 줄 알아야해.’라며 닥달을 했지만, 이런 내 약점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의뢰주와의 만남을 은연중에 꺼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 번째 약점은 난 남에게 살갑게 말함으로써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토라가 첫 번째 이유와 마찬가지의 래퍼토리로 고치라고 말했지만, 이 역시.......... 포기했다.


어쨋거나 이렇게 두 가지 핸디캡을 가진 내가 더욱 곤란에 처했으니, 이곳 이스트 민스터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인파로 북적거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애초에 접촉하기로 한 이와 마주치지도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억하자. 기억해............. 수녀복만 기억하자........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4월 1일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의 이스트민스터는 평소보다 더욱 더 활기가 넘칩니다. 오늘은 ‘한비아 북’에도 소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스트민스터 5일장이 서는 날이거든요.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이스트민스터이지만, 오늘만큼은 종교색을 버리고 인간 세계의 색채로 갈아입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편승을 해서 저도 오늘만큼은 수녀복을 벗고서 평상복 차림으로 시장에 나섭니다.


내일은 성 오바다의 축일입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 고아원에서도 거한 식사를 할 예정이에요. 어차피 할 일도 없는 마당이니, 오늘은 저도 일손을 더해야겠다는 생각에 장을 보는 것을 자원했답니다. 물론, 이스트민스터의 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평소에는 단정하게 정돈된 이스트민스터의 거리가 오늘 만큼은 상인들의 가판으로 어지럽혀집니다. 생선의 비릿한 냄새, 쑥의 톡톡한 향취가 어울려서 제 콧잔등을 간지럽힙니다. 이런 냄새를 맡으니 왠지 모르게 힘이 나면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아가씨, 이리로 와봐요. 오늘 프로하기온에서 싱싱한 과일이 잔뜩 들어왔다우.”


저를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저는 뒤를 돌아서 가판대를 살펴봅니다. 그곳에는 발그레한 노란빛을 띄고 있는 오렌지가 고개를 빠끔이 들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번 맛좀 볼라우? 오늘은 특히 오렌지가 꿀처럼 달달하다니까?”


저는 아주머니가 건넨 오렌지 조각을 받아들어 한입 베어물어봅니다. 채 씹기도 전에 달고 새콤한 과즙이 흘러나와 입안을 상큼하게 만들어 줍니다. 와! 정말로 맛있어요. 제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는지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흐릅니다.


“괜찮지? 오늘 아가씨가 운이 좋은 거야. 프로하기온에서도 이런 오렌지는 드물다우.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런 건 한 번에 우걱우걱 먹어버리기 보다는, 잘게 잘라서 샐러드를 해먹는 게 좋아. 맛있는 건 오래두고 아껴 먹어야 하거든.”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오렌지가 이렇게 달콤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거든요.”

“하하, 우리 영감이 싱싱한 놈이 떴다는 소문을 듣고서 첫 기차를 타고서 그대로 프로하기온으로 달려가가지고 이놈을 들여왔어. 경매장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러 상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경매장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우리 영감보다 달달한 놈을 고르진 못했을거야. 우리 영감이 그쪽 사람하고 연줄이 닿아있거든.”

“아아......... 우리 사모님은 인맥이 정말로 빵빵하신가 보네요?”

“이런것도 인맥이라면 인맥이라구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이런게 별건가? 우린 그냥 싱싱하고 좋은 녀석을 값싸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뿐이야. 그 녀석을 잘 활용하는건 산 사람의 몫인 거구.”








Channel 1. 로키


돈이 모이는 곳에는 그것을 노리고 온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재화나 용역을 가지고 등가의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는 교역의 장에서, 자신의 ‘상대적으로’ 적은 재화나 용역을 가지고 더 큰 재화와 용역을 노리는 자들을 불한당, 혹은 도둑놈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보는 경우도 그런 경우여서 이런 자들은 뭇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될 뿐 만 아니라, 법의 테두리가 허락한다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과일상 주변을 서성인다. 그의 눈길을 보니, 녀석이 노리는 건 끝물에 접어든 딸기나 창고에서 썩고 있던 땡처리 사과는 결코 아닐 것이다. 짐작컨대 과일 장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여자의 지갑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서성이며 자신의 지갑을 노리는 날파리가 있다는걸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으며 과일가게 주인이 네미는 오렌지 조각을 받아먹느라 바쁘다. 아마 저대로 가면 그녀는 자신의 지갑을 도둑맞게 되겠지. 그녀의 지갑에 들어있는 돈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지금 그녀에게 당면한 상황에 있어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라하면 ‘지키거나, 도둑맞거나.’ 일 것이다.


꼬마 소매치기는 여러 번 서성이며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마음을 굳혔는지 서서이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나는 수녀원 사람과 접근해야한다는 나의 입장을 잊어버린 채 소매치기의 심정에 동화되어 괜시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녀석은 운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는지 때마침 지나가던 행인에게 부딪쳐 그녀의 지갑을 낚아채기도 전에 나자빠져버린다. 에이그........ 쯧쯧, 어지간이 서투를 뿐 만 아니라 못먹고 살았는지 기운도 없었던 모양이다. 얼씨구? 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도 안 되는 저 여자가 승냥에게서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그녀는 엎어진 꼬맹이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본다. 꼬맹이는 그녀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럴 법 하지....... 자신이 해를 끼치려고 했던 상대에게 동정을 받는다면, 나라고 하더라도 꽤나 복잡한 심정일 것이다. 그정도는 나도 아는 사실이고.........


내가 어떻게 해석을 하건 말건 그녀는 흙투성이인 녀석의 바지를 툭툭 털어주면서 아이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장바구니에 들어있던 마를 하나 건네준다. 꼬마는 그새 눈물을 흘렸는지 코를 훌쩍이며 마 조각을 허겁지겁 씹어 먹는다.


꼬마아이를 달래고 보내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생각에 휩싸인다. 그녀는.......... 범죄자를 징벌하지 않았다. 아니, 남의 살갗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을 잡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범죄자임을 몰랐다. 아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동정이 필요없는 버러지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행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모든 사태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했을까? 아니, 이런 식의 유치한 생각은 접어두더라도 그녀의 이런 행위는 나에게 시사점을 남긴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닌, ‘오른뺨을 맞았을 때 왼뺨을 돌려 대는’이런 행위는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간관계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 같.........



“어라? 내 지갑! 내지갑!”


기는 개뿔.








Channel 2. 아이리스


과일상 아주머니가 네민 오렌지는, ‘정말 맛있다.’라는 진부한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던 맛이었습니다. 아까 아주머니가 자부심에 차서 영감님이 하신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셨는데요, 전 사실 그런 무용담이 결코 진부하게 느껴져서 한귀로 흘려듣거나 하지 않았답니다. 그녀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분이에요. 정말로요.


그걸 한 입 받아먹고 오물오물 씹노라니, 시큼하면서 달달한 액체가 입한 한가득 퍼집니다. 기분도 좋아지죠.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누군가가 저를 몰래 지켜보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뭐......... 기분 탓이거나, 아니면 아직도 ‘가상의 청중’을 의식하는 그러니까......... 소위 중학생 병에서 벗어나지 못할 만큼 제 의식 수준이 성장하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래도 그러려니.........하기에는 정말 뒤통수가 근질거립니다. 뭘까요? 이 찜찜하고 간지러운 기분은.........


“아얏!”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쿠당탕 하는 소리까지 등 뒤에 들려옵니다. 그쪽으로 돌아보니, 허름한 옷차림을 한 아이가 길바닥 위에 넘어져있었습니다. 아이의 볼에는 눈물로 뗏국물이 졌고, 입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습니다. 아이고 저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에요.


“괜찮니?”


제가 부축을 하려고 손을 네밀기도 전에, 아이는 화닥닥 일어나더니 그대로 뒤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한눈에 보아도 경계심이 느껴지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신 눈치를 보며 자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짠해져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를 포기하는 대신, 그 아이를 꼭 붙잡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는 이것 저것을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잠깐 잠깐, 이대로 가면 어떻게 하니? 바지가 온통 흙투성이잖아.”


아이는 몇 번 발버둥을 치지만, 제 손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걸 알았는지 반항을 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더욱 더 마음이 쓰이네요.


“아까 누나를 보고 있던게 너였어?”

“..........”

“에이그,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많이 배가 고팠나 보구나? 오렌지 좋아하니?”

“..........네.”

“그럼, 이 누나가 하나 사줄까?”

“아니요. 엄지는 오렌지 싫어해요. 엄지한테 그런거 가져다 줘봤자. 욕먹고 얻어맞을 뿐이에요.”

“..........”


‘아마도’라는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집니다. 이 거리의 아이는 구걸한 것을 엄지에게 바쳐야 하는 소위 ‘앵벌이’인 모양이에요. 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아이에게 오렌지 조각을 하나 건네줍니다.


“이건 엄지 말구 너 혼자만 먹으렴. 배가 고프다면 지금 먹어도 좋아. 사장님! 이건 제가 계산할 테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과도좀 빌려주시겠어요?”


사장님은 제가 거리의 아이에게 오렌지를 건네주는 것이 영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끌끌 찼지만 그래도 군소리 없이 과도를 건네주십니다. 제 손에 들린 과도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오렌지 껍질을 벗기는걸 보는 아이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해지고요. 이윽고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오렌지의 속살이 아이의 입에서 우물거리며 사라집니다.


“그럼, 엄지는 무얼 좋아하니?”

“음......... 마요. 저도 좋아하기도 하구........”


하하, 귀엽네요. 마침 아이들 간식하라고 사놓은 마뿌리가 한단 있어서, 저는 한 뿌리를 쓱 뽑아 아이에게 건네줍니다.


“이건 너 먹구, 엄지에게는 이걸 주렴.”


아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마 한웅큼을 보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만약 갈곳이 없다면 이스트민스터 고아원으로 와도 좋단다. 엄지가 네게 해꼬지 못하게 도아줄 수도 있구...... 혼자오기가 미안하면 친구들을 데려와두 좋단다.”


제가 말하는걸 듣는지 듣지 않는지, 아이는 우걱우걱 씹어먹느라 정신이 없네요. 이윽고 아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끄윽 트림을 하고는, 제게 고개를 숙이며 갑니다. 저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요.


저는 왠지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끼면서, 아주머니에게 계산을 부탁합니다. 아주머니는 1개에 3파운드이지만, 좋은 심성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며 3개에 6파운드만 달라고 하십니다. 저는 돈을 드리기 위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냅니........


어라? 제 지갑이 어디간거죠?








Channel 1. 로키


아까 말했지만 난 두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내게 새로운 단점이 하나 더 생긴 모양이다. 나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께에 손을 얹고는 ‘누군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봐.’라고 말 하고서, 소매치기 녀석을 뒤 쫒는다.


다행이 그 녀석은 멀리 가진 못했다. 아마, 오늘 따라 유난스러울 정도로 붐비는 인파를 헤쳐 나가기엔 턱없이 약한 육체를 타고난 탓이리라. 나는 초식 동물의 뒤를 밟는 육식 동물처럼 기척을 감추고 그 녀석의 뒤를 밟는다. 여기에 또 다른 행운이 작용했으니, 순진한 건지 아니면 눈 앞의 인파 때문에 경계심을 잃어버린 것인지 소매치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간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의 미행은 빠르고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녀석의 발걸음은 이스트 민스터의 뒷골목에서 멈춘다. 축축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이곳에,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토굴이 녀석의 보금자리인 모양이다. 난 좀 더 일을 확실히 하고자 녀석이 그 거지소굴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둔다. 오 분 뒤에 그 곳을 덮칠 것이다.


내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덮칠 것을 녀석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동료들에게 자신의 전리품을 들어 올리며 다소 과장된 무용담을 늘어놓겠지. 그런 식으로 그가 비열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는 홀연이 그들을 찾아갈 것이고, 녀석들은 열에 여덟 아홉은 혼비백산 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Channel 2. 아이리스


사라진 지갑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던 저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제 어께에 손을 얹습니다. 그쪽을 바라보니, 누군가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누군진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봐.”


그 말만 남긴채, 그 남자는 휙하고 사라져 버립니다. 저는 벙찐 채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아무래도 저 사람이 아가씨의 지갑을 찾아줄 모양인가 본데요?”


제게 아무런 예고 없이 연달아 일어난 사건을 해석하느라 과부하가 걸린 제 머릿속에, 아주머니의 말씀은 시원한 한모금의 물처럼 머릿속의 갈증을 깨끗이 닦아줍니다. 전 아주머니에게 ‘죄송하지만 저 사람을 좀 따라가면 안될까요? 잔금은 지갑을 돌려받고 나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한 뒤에 그의 뒤를 쫒아갑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의를 받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의 뒤를 밟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가 쫓는 사람이 힘겹게 인파를 헤치느라 느리게 가고있었다는 것이 첫 번 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그의 은발머리는 이곳에서 정말로 눈에 잘 띄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나를 헤치는 그의 걸음걸이는 매우 빨라서, 저는 아등바등 그와의 거리를 벌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답니다.


그와의 추격전은 이스트민스터의 뒷골목에서 끝이 났습니다. 은발머리의 사내는 골목에 잠시 멈춰서서 소매치기 소년이 허름한 토굴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토굴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립니다만.......... 분명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제 등 뒤에는 쫙하고 소름이 끼칩니다.








Channel 1. 로키


오분이 되었다. 단검은 꺼낼 필요도 없다. 나는 가볍게 손목과 발목을 풀고, 토굴의 입구로 다가간다.


“야 이 시팔새끼야, 어딜 그렇게 쏘다니나 했더니 고작 이런 마뿌리나 얻어와? 이거가지고 누구 코에 붙여? 이 개 씨팔새끼야!!!”


고함 소리와 함께 들려온 와장창 부숴지는 소리에 나는 걸음을 살짝 멈춘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토굴 안에서는 일종의 갈등 상황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내 짐작에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인지, 고함소리 뒤에는 뺨을 얻어맞는 것 같은 소리,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연달아서 내 귓속으로 열을 맞춰 들어온다.


..........정신 차리자. 내가 맡기로 한 것 외의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나는 장막을 걷고 토굴 안으로 들어간다. 토굴에는 얼굴에 길다란 상처가 난 사내가 우뚝 서서 땅바닥에 널부러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가재도구 위에 쓰러져서 쌕쌕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입가에는 피가 고여있었고, 왼쪽 뺨은 새빨개져 있었다.

이런 소년과는 대조적으로, 얼굴에 상흔이 난 사내는 거대해 보인다는 오해를 할 정도로 당당하기 그지 없었다. 사내의 손에는 지갑이 들려있었다.


“그래, 내 이럴줄 알았다. 이 개새끼. 다 굶어죽어가는걸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삥땅을 쳐? 이래서 터럭이 검은 동물은 거두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그랬구만, 시팔 옛 어른들 말씀은 하나도 틀린게 없다니까.”

“........... 그건 네 것이 아니다.”


도저히 보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내뱉은 내 말에, 사내는 등 뒤를 돌아본다.


“넌 뭐야 새끼야?”


사내가 뭐라 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나는 소년에게 다가간다. 녀석은 제 뺨을 어루만지며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야, 너 잡으러 왔다. 지갑내놔.”

“.........”


음....... 아무래도, 녀석은 내 말에 대답을 할만한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최대한 소년이 무서워 할만한 표정으로 차갑게 이야기를 해봤지만, 녀석은 실눈을 간신히 뜨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뒤를 돌아 사내를 바라본다.


“넌 좋은 인간은 아닌 모양이군.”

“안 좋으면 어쩔건데? 시팔놈아. 니깟게 뭔데 남의 집에 멋대로 들이닥치는거야?”

“안 좋은 사람에게는......... 나도 안좋게 대해줘야지.”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은발머리가 토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짐을 느낍니다. 이거......... 혹시 신종 납치 수법이 아닐까요? 소매치기 꼬마를 미끼로 삼아 제게 호의를 베푸는 척 하고 자신의 아지트로 저를 끌어들이는거죠. 아지트로 끌려간 피해자는 그렇게......... 사창가로 팔려가거나, 새우잡이 배에서 평생을 노예처럼 보내는 겁니다.


아우........ 별안간 신문에서 ‘왠지 본 듯한’ 헤드라인이 제 머릿속에서 떠오릅니다. ‘20대 여성이 이스트 민스터 뒷골목에서 싸늘한 변사체로 발견, 올들어 세 번째........’


........ 정신 차립시다. 이런 기사는 본 적이 없어요. ‘왠지 본 듯한’것일 뿐이죠. 머릿속이 제멋대로 찍어대는 기사와, 그로인한 두려움에 져선 안된다고 제 자신을 다잡아 봅니다.


공포와 불안은 ‘두려움’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감정이지만, 공포는 명확한 ‘대상’이 있는 감정이라면, 불안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에요. 일종에......... 스스로가 만든 함정에 빠져든다고 해야 하는 걸까요? 지금의 감정은 공포라기 보다는 불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니까, 한마디로 ‘한심한’ 생각이라는 거에요.


저는 마음을 다잡고 토굴로 다가갑니다만.......... 아, 잠깐만요. 5분만 있다가 들어갈까요? 아무리 허깨비에 놀아나선 안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보긴 했지만, 두려운건 어쩔수가 없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윽고, 5분이 지나고 전 제 두 뺨을 찰싹 때리고는 토굴을 향해 걸어들어갑니다. 이제 이 천막만 걷으면..........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돌려드리겠습니다. 돌려드릴 테니까 제발 그만좀!!”

“필요없어.”


공포에 젖어서 싹싹 비는 소리와, 그 목소리에 대한 대답으로 들려오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가 대화를 나누는가 했는데, 와장창 하고 무언가가 박살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뒤이어 찢어지는 비명소리와, 마지막으로 공포에 찬 울음소리가 뒤따릅니다. 뭔가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천막을 걷어 토굴속으로 뛰어들어가니,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은발머리의 사내가 한 말라빠진 노인장을 두들겨 패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멱살이 잡힌채로 공중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고, 토굴 속 가재도구는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습니다. 토굴속 아이들은 완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고요.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생각에 저는 은발머리의 사내에게 다가갑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아하단 표정을 짓습니다.


“어? 여긴 웬일이야? 내가 거기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잖..........”

“짝!”


저는 그가 말을 다 맺기도 전에 그에게 따귀를 날려버립니다.


“지금 그 손 놔요.......... 당장!”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두가지 인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두가지 인생 작가입니다 2. 17.11.21 333 0 -
공지 두가지 인생 작가입니다. 14.07.11 914 0 -
101 산새의 초혼가 - 03 21.08.24 30 0 22쪽
100 산새의 초혼가 - 02 21.06.07 48 0 26쪽
99 산새의 초혼가 - 01 21.03.27 45 0 16쪽
98 산새의 초혼가 - 0 20.05.24 38 0 16쪽
97 법치의 세바퀴 - 23 20.04.09 38 0 45쪽
96 법치의 세바퀴 - 22 20.02.23 57 0 31쪽
95 법치의 세바퀴 - 21 19.12.26 38 0 23쪽
94 법치의 세바퀴 - 20 19.11.18 43 0 24쪽
93 법치의 세바퀴 - 19 19.11.06 46 0 31쪽
92 법치의 세바퀴 - 18 19.10.23 36 0 32쪽
91 법치의 세바퀴 - 17 19.10.12 53 0 21쪽
90 법치의 세바퀴 - 16 19.09.23 64 0 41쪽
89 법치의 세바퀴 - 15 19.09.04 69 0 18쪽
88 법치의 세바퀴 - 14 19.08.24 79 0 27쪽
87 법치의 세바퀴 - 13 19.08.05 62 0 25쪽
86 법치의 세바퀴 - 12 19.07.09 60 0 26쪽
85 법치의 세바퀴 - 11 19.06.26 111 0 17쪽
84 법치의 세바퀴 - 10 19.06.02 68 0 30쪽
83 법치의 세바퀴 - 09 19.05.13 81 0 23쪽
82 법치의 세바퀴 - 08 19.04.25 88 0 18쪽
81 법치의 세바퀴 - 07 19.03.28 74 0 18쪽
80 법치의 세바퀴 - 06 19.02.17 149 0 28쪽
79 법치의 세바퀴 - 05 19.02.02 114 0 35쪽
78 법치의 세바퀴 - 04 18.12.27 89 0 31쪽
77 법치의 세바퀴 - 03 18.12.02 114 0 27쪽
76 법치의 세바퀴 - 02 18.11.08 146 0 18쪽
75 법치의 세바퀴 - 01 18.10.29 164 0 26쪽
74 고단한 아버지 - 07 18.10.11 126 0 23쪽
73 고단한 아버지 - 06 18.10.01 99 0 28쪽
72 고단한 아버지 - 05 18.09.17 130 0 33쪽
71 고단한 아버지 - 04 18.08.05 114 0 35쪽
70 고단한 아버지 - 03 18.07.20 129 0 37쪽
69 고단한 아버지 - 02 18.07.04 111 0 30쪽
68 고단한 아버지 - 01 18.06.06 123 0 28쪽
67 고단한 아버지 - 0 18.05.24 135 0 18쪽
66 구름의 아이들 - 15 18.05.13 124 1 37쪽
65 구름의 아이들 - 14 18.05.02 135 0 33쪽
64 구름의 아이들 - 13 18.04.19 153 0 33쪽
63 구름의 아이들 - 12 18.03.31 134 0 32쪽
62 구름의 아이들 - 11 18.03.20 128 0 33쪽
61 구름의 아이들 - 10 18.03.06 122 0 36쪽
60 구름의 아이들 - 09 18.02.21 131 0 33쪽
59 구름의 아이들 - 08 +2 18.02.12 169 1 43쪽
58 구름의 아이들 - 07 18.02.02 153 1 34쪽
57 구름의 아이들 - 06 18.01.03 140 0 44쪽
56 구름의 아이들 - 05 17.12.20 494 0 23쪽
55 구름의 아이들 - 04 17.12.14 138 0 44쪽
54 구름의 아이들 - 03 17.11.21 437 0 34쪽
53 구름의 아이들 - 02 17.11.07 166 0 32쪽
52 구름의 아이들 - 01 17.10.24 167 0 21쪽
51 사막의 어금니 - 06 17.10.07 181 0 35쪽
50 사막의 어금니 - 05 17.09.14 197 0 40쪽
49 사막의 어금니 - 04 17.09.01 157 0 15쪽
48 사막의 어금니 - 03 17.07.30 168 0 23쪽
47 사막의 어금니 - 02 17.07.20 197 0 24쪽
46 사막의 어금니 - 01 17.07.17 203 0 26쪽
45 당랑포선 황작재후 - 10 17.06.21 225 0 22쪽
44 당랑포선 황작재후 - 09 17.06.06 340 0 31쪽
43 당랑포선 황작재후 - 08 17.05.06 226 0 21쪽
42 당랑포선 황작재후 - 07 17.03.22 299 0 25쪽
41 당랑포선 황작재후 - 06 17.01.29 377 0 25쪽
40 당랑포선 황작재후 - 05 16.11.24 380 0 27쪽
39 당랑포선 황작재후 - 04 +2 16.11.07 615 1 22쪽
38 당랑포선 황작재후 - 03 16.10.18 546 1 25쪽
37 당랑포선 황작재후 - 02 16.09.26 565 1 25쪽
36 당랑포선 황작재후 - 01 16.09.11 499 0 30쪽
35 실마리 - 06 16.08.11 520 0 35쪽
34 실마리 - 05 16.07.21 580 0 30쪽
33 실마리 - 04 16.06.27 402 0 23쪽
32 실마리 - 03 16.06.09 396 0 28쪽
31 실마리 - 02 16.05.29 322 0 19쪽
30 실마리 - 01 16.05.23 470 0 13쪽
29 운터 브룩에서 - 04 16.05.22 303 0 12쪽
28 운터 브룩에서 - 03 16.05.08 465 0 28쪽
27 운터 브룩에서 - 02 15.11.04 531 0 21쪽
26 운터 브룩에서 - 01 15.10.10 480 0 11쪽
25 운터 브룩으로 가는 길 - 03 15.04.30 429 0 24쪽
24 운터 브룩으로 가는 길 - 02 14.07.18 625 0 19쪽
23 운터 브룩으로 가는 길 - 01 14.07.10 435 0 25쪽
22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7 14.07.09 423 0 14쪽
21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6 14.07.08 541 1 22쪽
20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5 14.07.07 475 0 24쪽
19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4 14.07.06 680 1 17쪽
18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3 14.07.05 605 0 17쪽
17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2 14.07.04 563 0 32쪽
16 뉴 빌리지와 뉴 빌리지 - 01 14.07.02 841 0 21쪽
15 운터 브룩과 무르짐 산맥 - 02 14.06.30 721 1 40쪽
14 운터 브룩과 무르짐 산맥 - 01 14.06.29 630 0 36쪽
13 이븐타운과 무르짐 산맥 - 03 14.06.28 576 2 43쪽
12 이븐타운과 무르짐 산맥 - 02 14.06.27 773 0 30쪽
11 이븐타운과 무르짐 산맥 - 01 14.06.26 522 0 14쪽
10 피아제와 비고츠키 14.06.25 572 0 13쪽
9 이스트 민스터와 이스트 민스터 - 05 14.06.24 705 1 45쪽
8 이스트 민스터와 이스트 민스터 - 04 14.06.23 352 0 37쪽
7 이스트 민스터와 이스트 민스터 - 03 14.06.20 516 0 32쪽
6 이스트 민스터와 이스트 민스터 - 02 14.06.19 389 1 10쪽
» 이스트 민스터와 이스트 민스터 - 01 14.06.14 599 3 23쪽
4 운터 브룩과 이스트 민스터 - 02 14.06.13 409 2 2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