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언니, 언니! 찾았어요!"
드디어!
"진짜 해도 돼?"
"안된다고 하면 때릴거잖아. 빨리해, 빨리! 오딘님 뵈러 가야지!"
꽈아악, 뽝빡빡!
닭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닭 머리를 밀어넣었어요. 벼슬하고 딱 맞는 구멍에 밀어넣자마자, 닭의 색과 같은 황금빛이 빛나며 구름이 갈라져요!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느냐! 저 쓸모없는 닭대가리, 저거 감시 잘 하라니까 다 어디간거야!}
"네가 더 씨끄럽다, 베헤이머스."
{끄흥.}
구름을 뚫은 나무줄기가 말을 하는 것 같아요.
나뭇가지를 칭칭 감은 덩치 큰 초록 뱀과 가지에 걸터앉은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
저 둘이 뱀들의 왕인가요?
구름 위에 있는 할아버지와 공중에 떠있는 천사. 저번에 아리테에서 맨 마지막에 나타났던 그 천사! 오른편에는 다섯 갈래의 창, 왼편에는 빛나는 검. 그때 봤던 그대로예요.
잠깐, 뭔가 반짝 했는데?
쨍! 쩡! 꽝!
콰광!
어떻게 된 거죠?
그 짧은 순간에 제자리에서 수십번의 공방을 하다니. 분명 할아버지는 어깨가 살짝 들썩인 것 같은데 어느새 이곳 저곳, 여기 저기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요.
할아버지가 던지는 투창과 스스로 움직이는 창과 칼의 대결이라니···
저희는 방해만 될 것 같네요...
{이제 슬슬 진짜 무기를 꺼내지 그래요? 이 아이들도 날뛰고 싶어 견디질 못해서 말이에요.}
"..."
{벙어리는 별로인데. 진짜 생각 없죠? 안오면.. 제가 갑니다? 프라가라흐! 브류나크! 마음껏 날뛰어라!}
한 자루의 창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창과 검을 동시에 상대하는 걸로 모자라 직접 나선 천사까지 상대하고 있어요! 천사가 들고 있는 노란 창도 상당히 위협적인걸요? 수십 명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점이 스스로 움직이는 무기들은 도무지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어요.
사람이 다루는 무기는 신체 구조의 한계로 움직임이 제한적이라면 저 무기들은 베는 걸 흘리면 곧바로 찔러 들어오고, 찌르기를 피하면 즉시 휘둘러서 베어버려요.
할아버지는 솟아있는 나무랑 같은 색의 창을 들고... 어라? 무늬도 같네?
{왜 마법은 안쓰나요? 당신이 마법을 얻기 위해 발버둥치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는데! 설마 늙어서 다 까먹었나요?}
할아버지는 묵묵히 창을 돌려 공격을 막으며 적의 협공에 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하고 있어요.
쩌저정!
분명 천사의 갑옷에 맞았는데! 갑옷은 흠집 하나 없네요. 반면 할아버지가 노란 창에 스쳐서 난 상처는 도통 아물지 않아요. 움직이는 창이나 칼에 베인 상처는 금방 회복되고 있는데...
{제가 '게 비더'까지 들었으면 성의를 보이셔야죠! 이것들을 만든다고 제가 공방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시죠?}
{이 창에 맞으면 절대 회복되지 않아요! 이걸로 당신 옛 동료들 여럿 잡았는데 못들으셨나? 하나같이 픽픽 쓰러지는게 재미없더라구요? 당신도 피 많이 흘렸다고 쓰러지면 시시한데.}
놀라운 건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딱 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않았다는 거에요.
몸을 비틀고, 창으로 공격을 흘리거나 되돌려주는 움직임은 우아한 춤을 보는 것 같아요.
사각에서 들어오는 검을 창 자루를 이용해 튕겨서 천사의 창을 쳐내고, 창을 크게 휘두르면서 옆을 노리는 창을 걷어냈어요.
{시시하네요. 어쩔 수 없죠. 합!}
화난 천사의 등에 날개가 한 쌍 더 생겼어요. 날개가 넷이 돼서 그런지 더 흉포해져서 강하게 몰아붙여요.
{이제 슬슬 보여주시죠?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죠?}
할아버지의 첫 발이 떨어졌어요.
오른발을 쭉 뻗고 창을 내지르는데, 와.
창에 무슨 글씨가 빛을 내뿜네요.
갑옷이 뚫리지는 않았지만 찌그러진 것 같아요!
{호, 이래야 싸울 맛이 나죠. 역시 광기로 미친 늙은이가 더 어울리네요! 하하하하!}
할아버지의 발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세가 역전됐어요.
구름 위에서 창이 휘둘리면 공기 자체가 소멸되는 것 같아요.
움직이는 창도, 날뛰던 검도 예리한 창에 한 번씩 부딪친 이후로는 주춤거려요. 자기들도 아픈건지 쉽게 달려들지 못하네요?
{이 멍청한 것들! 빨리 저 늙은이를 작살내어라! 걸친 건 누더기 천 조각 밖에 없는데 왜 상처 하나 제대로 못내는거야! 설마 고장났나?}
휘이익!
{미첬나 지즈! 이게 무슨 짓이지?}
나무에 감겨 꾸벅꾸벅 졸던 초록 뱀의 머리가 달아날 뻔 했어요.
{칼은 정상인데... 무슨 짓을 한 거죠?}
{지즈! 내 말 안들리나!}
할아버지는 묵묵히 창을 휘두를 뿐. 정말 그 말 많던 할아버지 맞나요?
심지어 한 손으로 다섯 갈래 창과 천사의 창을 모두 상대하더니.
왼손으로 뭔가를 하늘 위로 던졌어요.
{드디어! 오딘이라는 신화의 힘을 볼 수 있겠군요!}
지금까지 내내 이걸 기다린 걸 까요?
천사는 한 쌍의 날개를 더 펼쳤어요.
여섯장의 날개가 몸을 감싸고 보석 달린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
어느 성벽보다 단단해보이네요.
앗!
천사가 온 몸을 날개로 가리고 발을 들어올리니까 발 밑에서 뭔가가!
"다시는... 이 힘을 꺼내지 않으려 했으나.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할아버지의 눈이 검게 물들고 발 아래 둥근 문양이 새겨져 어두운 빛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어요.
우욱.
날아온건 뼈로 만든 작살인가요?
할아버지 발 밑의 원에서 검은 손이 불쑥 나와 작살을 낚아챘는데.
작살에서 수십개의 가지가 나왔어요!
비위가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징그러워요. 가지를 치고 분열하는 뼈작살과 꿰뚫리는 수십개의 손이라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보는 것 같아요. 이번 전투에서도 내내 여유있어보였는데···
{과연 그 바다 괴물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꼼짝도 못하는 꼴 하곤! 그 잘난 권능은 왜 안쓰고 마법이나 쓰죠? 또 버림받으셨나? 캬하하하하!}
{이봐, 지즈! 분명 모른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거 만든다고 내가! 어? 하찮은 문어랑 고래랑 물고기 놈들을 유혹한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나! 그런데 어떻게 시치미를 뚝···}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요.}
{지즈!!!}
느긋하던 초록 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안하네요. 뱀들도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은가봐요.
“결투 후에 이야기해라, 베헤이머스.”
검은 망토가 딱 정리해버리네요.
"그람!"
할아버지가 외치자 어른 남자 키보다 훨씬 큰 양날의 대검이 원 안에서 솟아올랐어요!
{드디어 제대로 하시나요?}
뻗어오는 가지와 덤벼드는 검과 창을 대검을 든 손이 상대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눈을 감았어요.
"역시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그럼에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하던 할아버지가 눈을 뜨기 무섭게.
전에 봤던 기술, 하늘에서 떨어지는 창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드디어! 흐흐흐! 와라, 신화의 창! 내 것으로 만들어주겠어!}
"넌 저 창에 맞을 수 없다."
{무슨 소리죠? 저 창만 손에 넣으면 모든 신화의 창이 전부 제 소유가 되는건데! 진정한 힘은 그 때 부터···}
"그 전에 이것에 당할테지."
{갑옷에 흠집도 못내면서 웬 허세를.}
"이건 <그 분>의 말씀 그 자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겠지."
할아버지가 주먹을 말아쥐자마자 그 동안 봤던 어떤 것 보다 찬란한 빛이 검의 형상을 갖췄어요.
{아니, 잠깐! 이건 명백한 위반...}
번쩍!
빛이 비치면 물러가는 어둠처럼.
순백의 날개도, 견고한 갑옷도, 화려한 투구도 모두 사라져버렸어요.
남은 건 단 하나. 몰골의 여인 뿐. 그마저도 곧바로 녹아내려 작은 뿔 하나만 달린 흉측한 흰 뱀이 됐어요. 부르르 떨면서 공중에 떠올랐어요.
{내 갑옷이! 내 투구가! 어떻게 모은 날개를! 죽여버리겠어요! 반드시!}
{오딘! 갑옷이 사라지면 계약 위반인 거 모르나! 이 베헤이머스님은 갑옷을 점찍어뒀단 말이다!}
{닥쳐요, 베헤이머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 아름다운 육신이 망가졌잖아요!}
{아무리 네가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이번엔 가만 있지 않겠지... 어떻게 할텐가? 음? 뭐야! 어디갔어!}
앉아있던 검은 망토가 사라졌어요.
{지즈! 어서 무구의 소유권을 넘겨라! 그럼 내가 돕지!}
{제 앞가림이나 잘 하시죠?}
하늘에서 떨어지는 창은 하얀 뱀이 아니라 초록 뱀의 머리로 향했어요!
쩌어엉!
금속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찔러요.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나, 오딘?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내가 감고 있는 이 나무가 네 창과 똑같은 세계수라는 건 몰랐나? 아무리 너라도 나와 지즈를 동시에 상대할 순 없다!}
초록 뱀이 꼬리에 감은 나뭇가지를 꽉 조이니까 나뭇가지가 움직이네요? 쭉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나뭇가지와 창 끝이 만나 엄청난 열기를 뿜내요. 불꽃이 튈 정도에요.
{베헤이머스, 오늘 입은 갑옷은 진품이 아니에요. 진품은 내 동굴 속에 있으니 날 도와요. 그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죠.}
{교활한 네 녀석에게 한 번 양보하지. 내가 길을 연다.}
여전히 치열한 스스로 움직이는 창, 날뛰는 검, 가지를 뻗는 뼈 작살.
그에 더해 초록 뱀이 있던 나무의 가지들이 이끼에 뒤덮여 날카로운 나뭇잎을 날리기 시작했어요!
저희도 나설 때가 온 것 같아요.
"새미야."
"준비됐어요."
두 개의 빛으로 된 검이 나뭇잎을 추격하고, 구슬들이 할아버지 뒤를 노리는 나뭇잎을 포획하고 있어요.
{꼬맹이들, 귀찮게 하는구나. 죽어라!}
이제는 가지가 뻗어오네요?
권능으로 온 몸을 두르고 손으로 가지를 쳐내곤 있지만, 손이 얼얼해서 오래는 못 갈 것 같아요.
"언니, 숙여요!"
새미의 붉은 구슬에서 불꽃이 나와 가지를 불태우지만 가지는 끄떡도 하질 않네요. 하지만 가지를 조종하던 이끼가 불타서 움직임이 멈췄어요.
흰 뱀이 떨어진 깃털을 주워먹더니 다시 날개가 생기고 빛을 내기 시작해요!
{내게 절하세요! 모든걸 용서하고 이 영광을 하사하겠어요!}
"언니!"
움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이 굽혀지고 있었어요!
"두 눈 꼭 감거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며 두 손을 모으니 진짜 빛이 모여들어요.
{저런, 무식한! 피해라, 지즈!}
{아깝지만 뿔 하나는 포기해야겠네요. 이번에는 이렇게 물러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에요, 오딘.}
흰 뱀의 뿔이 바스러지고, 초록 뱀이 온 몸을 감은 나무가 초록 이끼로 뒤덮이는 순간.
가지런히 모은 상처투성이의 손이 펼쳐지며 엄청난 빛이 공간을 가득 채웠어요.
♥♥♥
그 날 이후 할아버지의 세상은 빛을 잃었어요.
"할아버지, 눈은 좀 어떠세요?"
"사람이 빛 자체이신 <그 분>의 빛을 봤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껄껄."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제일 기뻐보이세요."
정말로 밝아지셨어요.
새미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곁에서 눈이 되어드리고 있어요.
"내 몸의 눈은 안보이지만 영의 눈은 어느 때보다 맑아졌단다. <그 분>께서 기뻐하지는 않으셨지만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시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니 내가 무슨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느냐. 감사, 또 감사 뿐인게야. 허허허."
새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가던 할아버지가 잠깐 손을 멈추더니 말씀하셔요.
"다마스쿠스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고 하시는구나. 조금 먼 여정이 되겠지만 함께 하겠느냐?"
"<그 분>의 뜻이라면 물론이죠!"
"저도 언니랑 할아버지 따라갈래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 같아요.
- 작가의말
맞춤법 지적 환영합니다.
에이브: ***
에이미: ♥♥♥
이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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