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할리우드!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9.19 09:05
연재수 :
963 회
조회수 :
4,129,545
추천수 :
127,122
글자수 :
10,699,341

작성
24.04.18 09:05
조회
1,535
추천
68
글자
26쪽

불한당(不汗黨). (9)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더 바라지도 않습니다. 딱 1년만 맡아주십시오. 그걸 토대로 해외 E-스포츠 행사에 다니시면서 전도사 역할을 해주시면 좋고. 누가 뭐래도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입니다. 제2의 태권도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습니까?”


류지호는 E-스포츠가 적어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 채택되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기 위한 국제적 활동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고유현을 써먹을 궁리를 해봤다.

비정치적인 활동이라서 국내 정치권에서도 말이 나올 여지도 적고.

임기 내내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쳐 좌충우돌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한 것도 제법 많은 대통령이 고유현이다.

그 중에 하나가 전자정부 확립이다.

대통령 재직시 대한민국 정부의 전산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비록 전자정부법을 세계 최초로 제정해 전자정부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김태평 대통령 재임시기였지만, 그를 이어 받은 고유현 정부에서 '전자정부 31대 로드맵 과제'를 마련해 전자정부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전자결재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이지원시스템'을 구축해 모든 행정·공공기관에 보급한 바 있다.

IT업계 출신 대통령 후보가 IT산업과 관련해 말만 앞세웠던 것과 달리 고유현은 IT 관련 경력도 없고 이를 자랑한 적도 없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전산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E-스포츠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고 싶어 하기도 했고.


- 내게 생각할 시간이 주세요.

“측근들과도 충분히 의논해 보세요.”


류지호는 작정하고 판을 크게 키웠다.

전직 대통령까지 끌어들여서 E-스포츠의 올림픽 종목 이슈를 던지는 한편으로 정식 스포츠 종목에 걸맞은 룰과 처벌을 정립하기로 했다.

되든 안 되든,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게 범죄단체 혐의까지 씌워 중한 처벌을 받게 할 생각이다.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밑바닥까지 싹 다 훑어서 발본색원하기로 했다.

E-스포츠 관련 도박사이트 운영자는 지구 끝까지 추적해 괴롭혀 줄 생각이다.

이참에 국민체육진흥법이나 그 외 스포츠토토 관련 유관 법률을 개정해서 승부조작 범죄에 대한 형량이나 추징금 등을 대폭 올릴 계획이다.

해외에 영업장을 차려놓고 있을 경우에는 현지 경찰과 협력해서 단속할 계획이다.

돈이 얼마가 들든지 다 때려잡을 생각이다.

불법도박사이트 운영자들에게 국내가 아니라 중국, 필리핀, 태국 등 현지 징역 맛을 보게 해 줄 생각이다.

한국에서 징역 살게 해달라고 싹싹 빌어도 소용없다.

무조건 현지 교도소에 수감되도록 손을 쓸 것이다.


‘아무리 관련 입법을 하더라도 처벌 수위가 그렇게 높지 않을 테니까.’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최고 전성기만 못한 것이 현실이다.

프로게이머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 되었고, 새로운 전략이나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명경기가 드문드문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 와중에도 특별한 선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미래 전망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때마침 Snowstorm Entertainment가 후속편 발매를 공식화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침체에 접어들었고, 그를 만회할 신작이 발매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엄청난 스캔들이 터져버린 것이다.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실망한 팬들이 E-스포츠를 떠날 것이다.

그에 따라서 스폰서의 후원도 위축될 공산이 컸다.


‘예전의 성세로 돌아갈 순 없겠지.’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침몰만은 막고 싶었다.

한때 E-스포츠 마니아였고, 현재는 관련 비즈니스를 벌이고 있는 류지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른 스포츠 분야에서도 승부조작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에 E-스포츠 승부조작이 다른 프로 스포츠 종목으로까지 이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로축구 K리그다.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서 팬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선수가 있다.

승부조작 사건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200시간을 선고 받게 된다.

그 이후에도 논란이 이어졌는데, 대한축구협회 징계로 영구제명이 되었음에도 해외리그 진출을 시도해서다.

그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축구팬들은 크게 분노하게 된다.

결국 해외리그 진출 시도는 FIFA의 결정에 의해서 무산된다.

자국에서의 징계가 해외 리그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유권해석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해당 선수는 더 이상 축구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전 삶에서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의 원흉으로 지목 된 모 선수는 몇 해가 지나고 중국의 게임대회에 출전하는 뻔뻔한 행보를 보였다.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게임 콘텐츠를 통해 돈을 벌었다.

안 될 말이다.

류지호는 E-스포츠 분야에서 돈이 되는 게임 IP를 다수 보유한 세계 최대 게임개발유통회사의 오너다.

승부조작 같은 파렴치한 범죄를 주동했거나 가담한 이들이 본인이 소유한 게임사가 서비스하는 게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JHO와 가온그룹 산하 게임사의 게임을 활용해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수익을 얻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다.

수백 조 규모의 글로벌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억만장자가 체통도 없이 조그만 산업에서 칼춤을 춘다고 미국 상류사회에서 수군대고 있단다.

지금 이 시기의 E-스포츠 시장규모는 그리 먹음직스럽진 않다.

그러나 2020년대로 가면 한국은 3,000억 원 수준, 글로벌 시장규모는 14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아시안 게임 정식종목,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 시장이 더 커질 터.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은 사람들.... 쯧.’


승부조작 연루자들뿐만 아니라, E-스포츠 유관 협회들과 대기업 계열 게임단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스포츠계에서 우울하고 혈압 올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인미답(前人未踏).


말 그대로 앞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

100년에 달하는 한국 피겨스케이팅 역사에서 마침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탄생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종목에서 김예나 선수가 금메달을 수상한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와 4대륙 선수권, 그랑프리에 이어 올림픽까지 석권하며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했다.

쇼트-프리 합계 228.56점이라는 경이적인 점수로 세계 신기록도 함께 수립했다.

종전 기록은 201.03점이었다.

캐나다에서 들려온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 소식이 모든 국내 뉴스를 집어삼켰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린 김예나의 모습은 평소 피겨 스케이트에 관심이 없던 국민들의 마음까지 적셨다.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피겨 여자 싱글 1위를 차지한 김예나의 금메달로 한국은 밴쿠버 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과 쇼트트랙, 피겨 등 빙상 3종목을 석권한 ‘빙상 트리플 크라운’ 국가가 됐다.

이번 밴쿠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순위 5위를 차지해 역대 최고 성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더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간 쇼트트랙에만 한정되었던 메달 종목이 피겨뿐만 아니라 스피드 스케이팅까지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가온그룹이 지원하고 있는 4인승 봅슬레이팀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해 결선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섣부르게 빙상강국이 되었다고 자평하는 분위기도 감지되었다.

피겨 스케이팅과 슬라이딩 및 설상종목에 많은 투자를 해온 가온그룹이 새삼 매스컴에서 주목받았다.

덩달아 비인기 동계스포츠 종목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는 류지호까지도 다시금 조명됐다.

동계 올림픽 종목 가운데 설상경기에 강한 국가가 곧 동계올림픽 강국이다.

올림픽 종목 100여개 세부종목 중 무려 61개의 종목이 설상경기이기 때문이다.


[이번 피겨 금메달로 인해 많은 한국 선수들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2010년 밴쿠버 올림픽 피겨 금메달 김예나 선수가 한 말이었다.

누군가는 돈 몇 푼에 승부조작을 벌이고.

어떤 선수는 편파판정(사실상 승부조작)으로 메달의 색깔이 바뀌기도 한다.

일반 대중들은 그런 것을 스포츠라고 부르지 않는다.

‘야바위‘라고 부른다.


❉ ❉ ❉


“이 듀퐁으로는 곤란해요. 이건 아닙니다.”


모든 듀퐁 라이터에는 식별이 가능한 고유번호가 새겨져 있다.

그를 통해 세상 단 하나의 라이터를 소지한다는, 그 같은 특별한 가치를 고객에게 선사했다.


“새 라이터로 다시 구해오세요.”


류지호의 말 한 마디에 소품 담당자는 진땀을 빼야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전 세계 중고시장과 벼룩시장을 뒤져 류지호가 원하는 듀퐁 라이터를 수소문했다.


“솔직히 말해서 듀퐁 라이터가 아무리 대단해도 화면에서 보이는 것은 거기서 거기 아냐? 모조품을 만들어도 되잖아. 왜 꼭 진품이어야 하는데!”


<불한당> 제작파트는 류지호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씨네아스트병‘ 혹은 감독의 ’갑질‘로 받아들이는 보조스태프까지 있을 정도다.

류지호의 사단이라 분류되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장의 ‘고집‘이라고 여겼다.

사실은 동시녹음팀과 폴리(Foley) 아티스트가 류지호게 먼저 부탁한 일이다.

그들은 ‘퐁’ 하는 듀퐁 라이터 특유의 사운드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담아내길 바랐다.

본래는 대본에 없던 설정이다.

그런데 사운드팀에서 ‘퐁’ 소리에 집착하는 것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다.

듀퐁 라이터를 통해 중요한 사건을 풀어보기로 했다.

서울로 상경한 최양동은 조선호텔 고고클럽 투모로우 영업부장이 된다.

영업부장을 하면서 명품 라이터라고 불리는 듀퐁을 얻게 된다.

대강의 사연은 이랬다.

70년대 중앙정보부 수사관이면서 호남주먹계 후원자 노릇을 하던 인물이 있었다.

최양동은 멋도 모르고 그에게 대들다가 괘씸죄로 구속되어 실형까지 산다.

암튼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최양동이 일하던 업소 로얄룸에서 놀았는데, 우연히 그들이 놀았던 방에서 듀퐁 라이터를 줍게 된다.

최양동은 듀퐁 라이터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아우들 앞에서 허세를 떨며 권위를 내세우는 상징으로 사용한다.

한편으로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닌다.

‘퐁’하는 특유의 소리를 들으며 중정 출신의 반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최고의 주먹이 될 것이라 다짐한다.

그렇듯 어느 순간 듀퐁 라이터가 최양동에게 소중한 물건이 되었는데, 순천 출신의 행동대장이 우연히 주웠다가 나중에 돌려준다.


[이게 그렇게 가지고 싶었냐?]

[돌려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만나 뵙지를 못해서...]


별 일 아니라면 별 일 아닌 일.

그러나 이 듀퐁 라이터 하나로 최양동과 순천파 관계가 틀어진다.

끊임없이 남을 의심하고 배신하는 폭력배들의 특성을 듀퐁 라이터를 통해 암시한다.

즉 최양동은 듀퐁 라이터를 돌려주지 않고 보관했다는 것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라이터 하나 때문에 순천파 두목은 아우들 앞에서 망신까지 당한다.

그로인해 최양동이 자신이 모셔야 할 두목의 그릇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결국 순천파 두목으로써는 반란을 도모할 수밖에 없고.


“듀퐁 라이터의 재질은 황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품 담당자 어렵게 당시에 제작된 진품 듀퐁 라이터를 구해왔다.


“금, 은, 청동, 팔라듐 이정도의 재질로 도금을 한다고 합니다. 비싸다고 좋은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어떤 도금을 했느냐에 따라서 소리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금 도금이 가장 소리가 좋고 다음이 은, 팔라듐 순이랍니다. 황동하고 청동을 섞은 재질이 소리가 좀 특이하다고 하셔서 정말 열심 찾았습니다. 트럼펫 같은 관악기를 황동으로 만드는 이유가 떨림 즉 소리의 전달이 좋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듀퐁 라이터도 재질이 쉽게 휘는 황동으로 만든다고 하죠.”


소품 담당자가 주저리주저리 떠는 것을 류지호가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바로 내가 원하던 바입니다.”


솔직히 류지호는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도 가는 법.

류지호는 듀퐁 라이터와 관련해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 감독 류지호는 적당히 하는 법이 없다!

- 그는 자신이 화면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감독이다.


언젠가부터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때문에 류지호 사단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사소한 것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의상팀의 경우 조폭이 입는 양복 단추 하나까지 고민했다.

시청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허리띠와 단추까지 캐릭터에 맞췄다.

깡패들이 입는 수트와 검찰 같은 공권력이 입는 수트도 자세히 보면 스타일링이 전부 달랐다.

심지어 벤트와 라펠 디자인을 통해 조직 간의 차별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조폭 세계에서 흔히 연장이라고 지칭하는 회칼, 쇠파이프, 야구배트도 일부러 손때 느낌을 주도록 하고, 채 닦이지 않은 혈흔까지도 디테일을 살리는가 하면, 당시 활동했던 조폭에게 고증(?)을 받아서 제품 브랜드를 각기 달리했다.

사실 시청자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류지호 작품에 참여하는 스태프들은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신인감독이 따라하면 안 된다.

단번에 스태프들로부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 소리 듣기 십상이니까.

그러다가 팀워크에 금이 갈 수도 있다.

영화연출(Directing).

무척 즐거운 작업이다.

어찌 보면, 매우 쉽다.

쉽게 연출하는 방법?

사실 별 것 없다.

류지호가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뭐든지 다 잘한다.”


그것에 대해 류지호가 대답한다.


“세상 모든 일이 다 내 뜻대로 되면 그게 사람이냐, 신이지.”


신인감독이 연출 기회를 잡으면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감독은 전 세계적으로 따져 봐도 손에 꼽을 정도다.

작가주의니 완벽주의 감독이니 하다가 팀워크 깨먹는 감독도 수두룩하다.

기성 감독들도 그런데 초보감독이나 아마추어 연출자가 그렇게 하다가는 ‘네까짓 게 뭔데?’ 대번에 그런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쉽다.

공동창작자들의 조정자로의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면 된다.

프로듀서와 투자자의 반응이 시원찮다면 시나리오와 연출의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왜 그런지 고민한 후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이후로도 스태프와 배우들을 설득할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한다.

설득할 자신 없으면 부탁하고 사정해야 한다.

영화감독은 질문하는 직업이다.


‘이번 씬은 어떻게 연기할 생각이야?’


그에 대한 답을 배우가 리허설을 통해 보여준다.

당연히 촬영감독은 가장 좋은 구도와 조명으로 배우의 연기를 화면에 담아서 보여주고 아이디어까지 제시한다.

배우는 연기톤을 준비하고, 카메라 감독은 그걸 보고 앵글을 만들고, 조명은 앵글을 보고 빛의 세기와 색감, 질감 등을 세팅하고, 동시녹음 감독은 화면에 잡히는 않는 위치에서 최적의 사운드를 채집하려고 노력한다.

영화현장에서는 모든 일들이 유기적으로 흘러간다.

때론 감독이 인위적으로 뭔가를 지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본이 있고, 배우가 있으며, 베테랑 스태프가 있다면.

영화감독은 ‘레디 고‘와 ’커트‘만 외쳐도 현장을 운영할 수 있다.

그래서 잘 모르거나 자신이 없으면 ‘함께‘ 만들어간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

어설프게 아는 척 하다가는 금방 탄로가 나버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작품의 성공을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입버릇처럼 공동창작을 강조함으로써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다.

필모그래피가 쌓이면서 차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면 된다.


“매번 이야기 하지만, 조폭이라고 해서 힘 잔뜩 들어간 연기 하지 맙시다!”


감독이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지시하기 시작하면 배우는 흥이 나지 않는다.

또한 프리프로덕션과 대본리딩에서 감독과 함께 잡아 놓은 연기의 톤 앤 매너가 촬영현장에서 갑자기 달라져서도 안 되고.

류지호는 프로덕션에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과 합의를 보는 편이다.

현장 리허설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배우들이 잡은 연기로 그대로 진행한다.

다만 리허설을 매우 꼼꼼하게 하는 타입이다.

필름을 사용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디지털 작업을 할 때도 그런 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심쩍어도 일단 촬영해 보고 판단하자라는 방식은 일절 없다.

한 번 촬영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지금까지 류지호는 비교적 괜찮은 배우들과 작업을 해 왔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류지호가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류지호는 고민이 없는 배우를 무척 싫어한다.

오디션을 볼 때마다 배우의 기본적인 교양수준을 꼼꼼하게 따진다.

일반인들은 잘 모를 것이다.

말귀 못 알아먹는 배우가 은근히 많다는 것을.

생각과 고민을 하지 않은 배우와 감독이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될 리가 없다.

그래서 류지호는 지식이 모자란 배우와는 일을 해도 머리 나쁜 배우와는 일을 안 한다.

대체로 연기 잘 하는 배우는 머리가 좋다.

반대로 머리 좋은 배우가 연기도 잘한다.

사고력이 깊어지면 연기 역시 묵직해지기 시작한다.

가장 좋은 배우는 독서나 다양한 예술작품을 즐기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깊은 정서감과 감정처리가 자연스럽다.

류지호는 현장에서 언제나 여유가 넘친다.

당황하는 법이 거의 없다.

이전 삶부터 많은 경험을 해 왔기도 하지만.

연출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사랑, 미움,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끄집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여유롭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에게 릴렉스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감독이 여유롭고 자신만만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안정된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면에 더욱 몰입하기 쉽고, 그를 통해 깊은 감정을 표현해 낼 수가 있다.


[야, 너 일루 와바라.]


버버리 코트를 입은 행동대장이 냉큼 최양동에게 달려온다.

최양동이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벗어봐.]

[....예?]

[바바리 줘보라고.]


행동대장이 버버리 코트를 벗어서 넘겨준다.

최양동이 행동대장의 코트를 똘마니 한 명에게 직접 입혀준다.


[어때? 어울리지?]

[자... 잘 어울립니다. 형님.]

[좋은 거 있음 아우들 먼저 입혀. 아우들 행색이 좋아야 형들의 면이 서는 거다.]


똘마니들이 감동한다.

최양동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 똘마니에게 코트를 빼앗긴 행동대장에게 건넨다.

똘마니가 입고 있던 싸구려 옷을 자신이 걸친다.


툭툭.


똘마니들의 어깨를 다독인 최양동이 떠나간다.

그 뒷모습을 향해 넙죽 굽힌 똘마니들의 허리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꺾인다.

그런 최양동과 엇갈려 똘마니가 씩씩거리며 나타난다.


[미치아불것네.]

[또 왜?]

[영재 X발 것이, 큰형님 칼 준다고 온사방에 나불댄다 안 혀요. 광주 아우들도 영재가 애들 모으고 다닌다닌다고 서울서 보당 안 오냐 허고... X발 거 그때 확 재탕해부렀어야 했든디.]


앞 장면만 놓고 보면 최양동이 부하들을 아끼는 건달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최양동은 결코 멋진 마피아 보스가 아니다.

순천파가 칼잡이 보낸 것을 알고, 똘마니와 옷을 바꿔 입고 사무실을 벗어난 것이다.

이런 장면이 복선이 되어 나중에 부하가 최양동 대신 회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에피소드로 발전한다.

부하 면전에서는 복수를 다짐하지만.

정작 최양동은 순천파와 협상을 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기존 조폭 미화 클리셰를 살짝 뒤틀었다고 볼 수 있는 서사다.


❉ ❉ ❉


한동안 여주 WaW종합촬영소에 틀어박혀 주구장창 세트촬영만 하던 <불한당> 제작진이 여주를 벗어나 전국 곳곳을 돌기 시작했다.


[하암~]


화신8인조 친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꼭두새벽에 찾아와서 판을 벌리자니... 갑자기 돼지꿈이라도 꿨어?]


최양동이 너스레를 떤다.


[돼지꿈이 뭐냐? 황금 두꺼비가 떼로 품에 안기더라.]


두 사람은 속칭 하우스라고 불리는 불법도박장에 들어선다.

하우스 장면은 전주에서 촬영했는데, <불한당>이 촬영된다고 하자 지역 깡패들이 떼로 몰려왔다.

행패까지는 아니지만, 촬영불가 시위를 벌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증권가 찌라시에서 <불한당>에서 전북과 전주 지역 조폭이 좋지 않은 이미지로 비춰진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영화 <두목> 촬영 때는 전주 유림에서 반대를 했다고 하는데, <불한당>의 경우는 정작 유림은 가만히 있고 깡패들이 난리였다.

광역수사대가 뜨자 얌전한 강아지처럼 곧바로 꼬리를 말았지만.

암튼 하우스는 사운드 스테이지가 아니라 일반 가정집을 빌려 세트로 꾸몄다.

본격적으로 놀음을 하려는지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최양동이 마작판과 포커판을 기웃거린다.

속내는 도박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연신 손목시계만 확인한다.

본래 도박장에서는 시계를 차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그런데 최양동은 버젓이 시계를 차고 있다.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전국구 조폭 두목으로 올라선 최양동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근처에 목욕탕 없나?]

[골목 나가서 큰길 나오면 왼쪽을 쭈욱 가면 신화목욕탕이라고 나옵니다.]


최양동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하우스 뒷문을 빠져나오고.

잠시 하우스와 주위의 인기척을 확인한 후, 옆 골목에 대기하고 있던 외제차에 올라탄 후 하우스를 떠나간다.


“컷!”


이어지는 장면은 군산에서 촬영했다.

새벽길을 달려 부하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반란 주동자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집이고, 그곳에서 숨어 지내던 순천파 두목을 최양동이 붙잡게 된다.

한시가 급한지라 순천파 두목을 차에 태워 병원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순천파 두목의 아킬레스건을 회칼로 그어버린다.

인적이 없는 새벽시간이고, CCTV도 없던 시절이라 행할 수 있는 대담한 범행이다.

아킬레스건이 잘린 순천파 두목은 스스로 응급실로 찾아가고.

황급히 하우스로 돌아온 최양동은 태연하게 마작판에 끼어든다.


[순천 오야붕 김 사장이 작업을 당했다네, 글씨.]

[뭣시여? 이영재가?]

[시방 00병원 응급실에 있디아.]

[아따, 어떤 시버럴 놈이 연장질을 해부렀디아?]

[몰 것어. 본인이 입을 꽉 다물고 있어서.]


최양동 딴에는 나름 알리바이를 만든 것이다.

경찰에 붙잡혀 가더라고 범행이 있던 시간에 하우스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다고 하면 되니까.

하우스에 있던 이들이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것이고.

목욕탕에 가지 않은 것은 담배를 사서 한 대 피우느라 그랬다고 둘러대면 되고.

21세기에는 헛웃음이 나오는 알리바이다.

70년대를 감안하면 딱히 트집잡힐 에피소드는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순천파 두목이 최양동을 찾아온다.

최양동 부하들의 조롱을 감수하면서 최양동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쯧쯧. 어쩌다 다리를...]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형님.]

[이 아우가 큰 일 날 소리를 하네. 뭘 살려주고 자시고 해? 흰 소리 말고 일어나, 다리도 불편한 사람이... 인나, 얼른.]


짐짓 최양동이 대인배인척 행세한다.

직계 부하들 앞에서만 보이는 연출된 모습이다.

은밀하게 부하들을 시켜서 결국 순천파 두목을 야산에 산채로 묻어버린다.

실제 역사에서 해당 인물이 생매장을 당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다만 어느 순간 실종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뒷골목에서는 그와 관련해 여러 소문만 무성했다.

드라마에서는 최양동의 이중성과 범죄행각의 비밀을 묻어둔다는 의미에서 야산에 생매장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 클리셰에 류지호의 아이디어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순천파 두목을 생매장하는 똘마니들이 굳이 야심한 밤에 작업을 한다.

장소를 물색할 때도 쓸데없이 야산을 빙빙 돈다.

일을 마친 후에도 마치 길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산속을 헤맨다.

모두 최양동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실행에 옮긴 이들조차 암매장한 곳을 모르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만약 순천파 두목 살인에 대해 똘마니들이 붙잡혀 가더라도 어디에 암매장했는지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사건 자체가 미궁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존파 이후에 탄생한 신흥 조폭들이 쓰는 수법이다.

<불한당> 고증에는 다소 위배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보신(保身)을 위해서는 온갖 잔머리를 굴린다는 최양동의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해 넣었다.


“커엇! 좋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런 제목의 책이 강조하듯이 긍정적인 말은 현장 분위기를 활력 넘치게 만들어준다.

어려운 과제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으면 다음번에는 더 잘하는 법이다.

류지호는 무척 까다로운 편에 속하지만, 보상 역시도 확실한 감독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의 성취감이 높다.

어려운 촬영을 할 때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반드시 칭찬을 해주고 그에 따른 보상을 해줬다.

때로는 류지호의 요구가 밑도 끝도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류지호 사단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만사 제쳐 두고 류지호의 작품에 달려오는 이유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Mr. 할리우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46 Légion d’honneur. +4 24.05.03 1,703 71 24쪽
845 남에게 비싸게 파는 것도 비즈니스다! +6 24.05.02 1,651 72 28쪽
844 자기 과시, 거장으로 다가가는 순간... 그 어디쯤. +4 24.05.01 1,603 89 28쪽
843 칸 영화제. (3) +8 24.04.30 1,546 96 26쪽
842 칸 영화제. (2) +5 24.04.30 1,434 74 26쪽
841 칸 영화제. (1) +3 24.04.29 1,567 84 25쪽
840 자네까지 나서지 않도록 하겠네. (2) +4 24.04.27 1,673 72 27쪽
839 자네까지 나서지 않도록 하겠네. (1) +4 24.04.26 1,670 76 24쪽
838 큰 기대 안 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5 24.04.25 1,649 73 24쪽
837 뭘 망설일 것이고,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3) +4 24.04.24 1,635 72 28쪽
836 뭘 망설일 것이고,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2) +3 24.04.23 1,632 71 25쪽
835 뭘 망설일 것이고,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1) +6 24.04.22 1,665 76 23쪽
834 두 배 성장할 겁니다! +6 24.04.20 1,689 74 25쪽
833 불한당(不汗黨). (10) +6 24.04.19 1,591 71 29쪽
» 불한당(不汗黨). (9) +2 24.04.18 1,536 68 26쪽
831 불한당(不汗黨). (8) +8 24.04.17 1,526 78 22쪽
830 불한당(不汗黨). (7) +6 24.04.16 1,536 74 24쪽
829 불한당(不汗黨). (6) +5 24.04.15 1,576 75 26쪽
828 불한당(不汗黨). (5) +6 24.04.13 1,667 71 27쪽
827 불한당(不汗黨). (4) +9 24.04.12 1,678 80 30쪽
826 불한당(不汗黨). (3) +6 24.04.11 1,625 79 24쪽
825 불한당(不汗黨). (2) +5 24.04.10 1,648 80 24쪽
824 불한당(不汗黨). (1) +10 24.04.09 1,739 79 26쪽
823 미래의 성장 동력. (3) +8 24.04.08 1,764 83 28쪽
822 미래의 성장 동력. (2) +6 24.04.06 1,789 78 23쪽
821 미래의 성장 동력. (1) +7 24.04.05 1,844 73 24쪽
820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게임기? +9 24.04.04 1,824 72 22쪽
819 아시아 패자 정도는 돼야겠지! (4) +5 24.04.03 1,760 86 22쪽
818 아시아 패자 정도는 돼야겠지! (3) +3 24.04.02 1,733 79 20쪽
817 아시아 패자 정도는 돼야겠지! (2) +4 24.04.01 1,773 74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