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종(末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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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US
작품등록일 :
2022.02.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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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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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DUMMY

“준비되셨으면,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꺽정이 발을 굴렀다.


‘빵’ 차면 없어진다더니 5m 이상 되는 간격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저 큰 몸으로.

디딤발 한 번에 검 끝이 순신의 턱 밑이다.


휘익!


그걸 고개를 돌려 가볍게 흘려버린 순신의 도포 자락이 펄럭였다.


“이런, 제가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형님 이것 좀 가지고 있으시오.”


순신이 도포를 벗어 돌돌 말고는 내게 던졌다. 검을 두 손으로 말아 잡고 어깨너비로 발을 비비며 보폭을 벌렸다. 단, 1합으로 임꺽정의 실력을 캐치 한 것이다.


“이 정도 실력이시면 저도 맘 놓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나랑 할 때는 여유를 부렸다는 말인가? 기분이 나쁘기보다 기대가 됐다. 허세나 부리는 자들과는 천성 자체가 틀리니까.


보폭을 조금씩 줄여가던 순신의 검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같은 초식에서 세 번의 내리침.


따다닥!


이게 이제 열 여섯 살밖에 안 된 자의 검이라니. 내가 저걸 막았던 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힘, 속도에 유연성까지 단번에 끌어올리다니. 넌 도대체···’


목멱산에 올랐을 때만 해도 장난기가 남아 있었는데. 대련할 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었는데, 멀리서 보니 순신의 우아한 검세가 눈에 들어왔다. 1년밖에 안 지났는데, 익위사의 어떤 자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날카로웠다.


순신이야 당연히 만렙 찍을 위인이지만, 그걸 몸도 움직이지 않고 쳐내는 저 괴물은 또 뭐야? 재밌다는 듯 방어하던 임꺽정의 입꼬리 한 쪽이 올라가 있었다.


순신의 검이 한 획, 한 획 그려지는 한 폭의 동양화라면, 임꺽정의 검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수와 같다.


흐앗!


따가각! 따닥, 따다다닥!


빈틈없이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에 순신이 점점 젖어 들었다. 아직 임꺽정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나이가 어리니까.


“자 이제 그만들 하시고 술이나 한잔 합시다. 벌써 열 합이 넘었어.”


내 말에 웃는 낯으로 변한 두 영웅이 칼 끝을 땅으로 내렸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한 번도 못 보던 보법에 힘도 대단하시고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저야말로 놀랐습니다요. 제 검을 모조리 막아내는 자를 본적이 없었는데.”


이순신, 류성룡, 임꺽정, 내 형제와 같은 이들이 내 집에 함께 있다. 우린 밤늦게까지 술을 즐기며 담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별다른 진지한 이야기는 오고 가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란 건 그런 거니까.




* * *



명종 16년, 1561년 4월 22일


-부산 앞바다-


우리가 탄 배는 돛을 편 채 선선한 북풍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배에는 나와 토정 상단의 대행수, 임꺽정 그리고 30명이 넘는 정예 상단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원래 임꺽정의 부하들로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4, 5월 달에 부산에서 버리면 오키나와에서 줍는다.’는 말이 있다. 이 기간에는 부산에서 버린 쓰레기가 오키나와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저 북풍과 해류에 순응하면 별다른 조타 없이도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게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전국에 수소문 해봤으나 유구국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 일본어랑 비슷하지도 않을 텐데 그게 걱정이었다. 한가지 희망은 유구국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곳에 고려 삼별초의 후예들이 남아 있을 테니까.'


곧,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북쪽에서 불기 시작했다.


“북풍이 붑니다.”


순풍에 커다란 돛이 불룩해지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다 냄새와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난 숨을 깊이들이 마셨다. 그동안 한 곳만 보고 달려왔었는데, 마치 여행을 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홀가분한 느낌이었지만 한편으로 순회세자가 마음에 걸렸다.


순회세자는 시도 때도 없이 날 찾았었다. 그렇다고 항상 웃음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나름 속마음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걱정은 주로 아버지 명종에 대한 것이었다. 어머니 문정왕후와 윤원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안타깝게 보였나 보다.


“몇 밤 자면 오는 게냐?”


“손가락을 다 접기 전에 오겠사옵니다.”


몇 번씩이나 반복되었던 세자와의 마지막 대화가 마음에 걸렸다. 잘 설명해 드렸어도 이번 출장을 세자는 끝까지 떼를 쓰듯 반대했었다. 내가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지니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윤원형이 중요한 일이라며 세자를 설득했고, 난 세자의 웃음을 위해 두 세마를 훈련 시켜 대령했다. 나름 괜찮은 호흡을 가진 새로운 개그 듀오는 지금쯤 동궁전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 형, 유구국이라는 곳까지 얼마나 걸릴까?”


난 그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며칠이 걸릴지, 그건 나도 안 가봐서 모른다. 21세기면 비행기로 두 시간 정도 날아가면 되지만 돛이 달린 배는 처음이었다.


잔잔한 조류와 북풍은 별다른 출렁임 없이 배를 밀고 나아갔다. 그 덕에 처음 배를 타는 사람들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한 배는 정오쯤에, 우현에 대마도를 두고 지나갔다. 제주도 만큼 먼 거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채 50Km가 안 되는 거리였다. 배에 윤원형이 준 삼을 싣고 있어서 대마도를 들리지는 못했다. 대마도는 올라오는 길에 들려 정탐할 예정이다.


“자 다들 밥도 먹었으니 잠들 좀 청하시오. 아직 한참 더 가야 하외다.”


“내일이면 도착하려나?”


“아마 적어도 3, 4일 걸리지 않을까?”


대마도까지 반나절 걸렸으니, 어림잡아 그정도 거리라 생각했다. 임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베개를 한 채 눈을 붙였고 나도 옆에서 잠들었다. 선원들의 코를 고는 소리가 상갑판을 가득 메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다가 해의 모습을 삼킬 무렵, 상장 갑판(3층)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행수님! 배 두 척이 쫓아옵니다.”


임꺽정과 난 부리나케 상장 갑판으로 올라갔다. 어디서부터 쫓아왔는지 약 600M 쯤 떨어진 곳에 불을 밝힌 배 두 척이 나란히 다가오고 있었다.


“해적인 것 같소.”


“그런 거 같네.”


“배 모양을 보니 왜구들 같은데?”


임꺽정은 걱정은커녕 신이 난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루한 항해에 마치 재미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대행수님, 100보까지 쫓아왔습니다. 어찌할깝쇼?”


“자 일단 상갑판(2층)으로 다들 다 내려가 있게. 놈들이 넘어오면 되도록 칼은 쓰지 말도록 하게. 알았지!”


간격이 50M 안쪽으로 들어서자 화살이 상장 갑판(3층)에 쏟아져 박히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쇠갈고리가 우리 배의 상장 갑판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쿵! 그그그극

쿠구궁, 끄으으익!


배가 요동치고 쿵 하고 부딪히는 충격이 있더니, 배 양쪽에서 나무 갈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양쪽을 포위하듯 배를 붙인 왜구들이 배를 타고 넘어온 게 분명했다. 상판을 확인하는 듯 천장 이곳저곳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 다들 준비하자고.”


내려오는 계단을 두고 우리는 넓게 원형을 그리며 둘러싸았다. 나름 학익진이라고 할까? 각자의 손에는 짐을 지지하던 막대기가 들려 있었고 계단 바로 앞 사람들은 길그물(원망)을 바닥에 늘어놓은 채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이어 칼을 든 왜구들이 갑판에서 쏟아지듯 내려왔다.


“당겨!”


내려오는 왜구들은 족족 그물에 걸려들었다. 1차 몸둥이 찜질이 끝나면 정성스럽게 옷을 벗겨 하나하나 밧줄로 포장했다. 우리는 1층 갑판에다 왜구들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한형 한 50두 되겠는데?”


조선의 노예제를 타파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구들이 타고 온 배를 확인한 뒤 나도 함께 머릿수를 세어 나갔다. 이 왜구들은 사람이라 부를 수 없었으니까.




* * *




유구국, 중산(中山)



배에서 내린 상단 사람들은 이국적인 분위기에 취해 다들 한껏 들뜬 표정 들이었다. 못 보던 열대성 나무들과 사람들의 옷차림이 신기한 듯 다들 이리저리 구경하며 다녔다. 왜구들을 포획하느라 몇몇이 칼에 베여 붕대를 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참을 수소문하며 돌아다녀 봤지만, 유구국 중산에서는 조선말을 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구국 본섬은 북쪽부터 산북, 중산, 산남으로 불리고 있었다. 분명 삼별초의 후예들이 어딘가 있을 텐데, 설마 모두 동화된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다. 고려인의 피가 어디 갈 리가 없다.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어도 고려말을 하는 사람들인데. 동화될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몽골군에게 쫓긴 삼별초의 고려사람들은 진도에서 제주도로 그리고 다시 오키나와로 향했다고 알고 있었다. 북풍과 해류를 타고.


다행히 왜놈 말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손짓 발 짓 하며 물어볼 수 있었다. 우리가 정박한 곳은 중산(中山). 우리들과 비슷한 행색을 한 사람들은 남쪽의 산남(山南)이라는 곳에 있다고 했다.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할 텐데.”


“그곳에는 있어야 할 텐데. 하여튼 가봅시다.”


나와 임꺽정은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서기 한 명을 데리고 말을 빌려 남쪽으로 향했다. 나머지 일행들은 3척으로 늘어난 배와 갑판 1층에 있는 포로들을 지키느라 중산에 남았다.


섬이 작다 보니 해 떨어지기 전에 산남이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눈 앞에 펼쳐진 희한한 광경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형태는 다르지만 아름다운 성의 성곽과 기와가 조선의 것과 비슷했다. 기와를 자세히 보니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거다. 이걸 찾은 거였어.’


수막새 기와, 연꽃을 새긴 전형적인 백제의 기와 문양이었다.


산남의 궁궐 모습도 기존에 알고 있던 오키나와의 성(城)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내가 알고 있던 오키나와의 성은 사시마 번 놈들에게 침략당한 이후 다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성곽을 따라 마을을 구경하며 걷고 있는데, 얇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자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고, 오 매무새이···, 고리에서 오셔난?”


이두식 어미를 쓰는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무얼 말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교역을 하는 상인을 만날 수 있겠소?”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한자로 交易이라 쓰며 다시 얘기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를 데리고 포구 쪽으로 내려갔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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