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종(末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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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US
작품등록일 :
2022.02.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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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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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DUMMY

“내 자네 말을 막으려는 것은 아니네만, 장소는 가려서 해야 하지 않겠소?”


“죄송합니다. 제가 궁금한 걸 못 참는 성미라, 그만.”


“계속 말해 보시게.”


“제 생각엔···, 그 숫자로도 부족하다 생각하옵니다. 왜 이십 만입니까?”


“음, 것도 최대치지. 조선의 인구 때문에. 왜? 뭐 다른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는가?”


“만약 신분제를 타파한다면, 노비든 승려든 일반 백성이든 구분 없이 모병해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정여립은 이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의 생각이 더 궁금해졌다.


“그럼 자네는 신분제를 타파할 방법이라도 있는 게요?”


“그건 저도···.”


“괜찮소, 그러지 말고 말해보시오. 내 스승님에게는 비밀로 하외다.”


“혁명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말고는 조선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이때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어려도 정여립답다 생각했다.


“허허, 혁명이라. 어이 정형, 나를 믿소? 내가 익위사에 있는 것을 알 텐데. 지금 내게 뭐라 하셨소?”


“송구하옵니다. 저도 들었던 얘기가 있는지라.”


“허허 이 사람. 지금 뭐, 나도 협박하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오라, 그런 진취적인 생각도 받으실 줄 알고··· 그만. 예의 없게 굴어 죄송합니다.”


“하하, 아니오. 나도 농이었소. 나도 그렇지만 그대도 지금은 빳빳해야 제 맛인 시기 아니오. 이리 저리 아무렇게나 들이받아도 괜찮을 시기이지만, 만약 그 치기만으로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면···. 사람들, 이 시대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두 잃게 될 것이오.”


“그래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모두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도 내지 않고 오히려 입신양명만 꾀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문헌 그대로 싸이코 패스여서 그런지 정여립은 다소 흥분한 듯 보였다. 그래도 정여립 또한 내겐 중요한 인재다. 당대의 어떤 인재보다 천재성을 보였던 자. 인격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차차 확인해보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전라도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자. 그가 지금 내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게 내겐 더 중요했다.


“만약 방법이 있다면 그대도 도울 수 있겠는가?


정여립과 한참을 얘기하고 있는데, 한 중년의 여인이 서슴없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새로 태어난 뒤, 조선에서 본 여인 중에 가장 당당하고 예뻤다. 고양이상에 앙칼진 눈매. 2000년대 이후에나 어울릴 얼굴. 그녀가 치마를 살포시 들고 다가올수록 분내와 향내가 뒤섞이며 풍겨왔다.


“이게 누구신가. 우시직 양반 아니신가?”


이 여자가 나를 안다. 누구지?


“영감께서 어찌나 극찬을 하시던지. 아무튼 향낭은 고맙게 잘 받았네. 내 무리한 부탁을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영감? 향낭?

이 여자 정난정이다.


“아, 네. 바로 몰라뵈서 송구합니다.”


“아니네. 고마워서 이리 발걸음을 했네. 귀군 덕택에 면이 설 수 있었어. 암튼 저기서 보고 우시직 양반인 것 같아서, 직접 인사하려고 왔소. 이번에 정말 신세 많이 졌네.”


“신세라니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


“호호호, 내 그리해도 되오?”


손을 가리고 웃는 모습조차 예쁘다.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네, 향낭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조만간 내 집으로 초대하겠소. 우시직 양반은 어찌 덩치도 이리 사내답고 그런지요. 볼수록 나까지 든든해지오. 아무튼 대화들 나누시는데 실례했소이다.”


“네, 불러만 주시면 언제든 괜찮사옵니다.”


왜 내 말투가 돌쇠처럼 변하는지. 엄청난 포스를 풍기던 정난정이 날 위아래로 훑어보는 바람에 그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색기를 품은 눈빛을 진하게 남기고 정난정이 멀어져 갔다.


난 왜 이렇게 연상의 나쁜 년한테 끌리는지. 이것도 병이다.


한참을 눈을 못 떼고 바라보다 다시 정여립과 대화를 하려고 몸을 돌렸는데, 이 녀석 표정이 완전히 썩어있다.


정여립도 윤원형과 정난정에 대한 세간의 소문을 들었을 터,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리라.


“왜 표정이 그러하오?”


“뉘신데 쩔쩔매시는지요?”


“허허, 쩔쩔매다니.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 윤원형 대감의 부인일세.”


“······ 왜 저런 자들과”


확인하듯 물어본 정여립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허허, 그래서 표정이 안 좋았구만. 아까 내게 신분제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떨떠름한 표정의 정여립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원형, 갖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자이지만 공을 논하자면 조선 중기에 유일하게 신분제를 타파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던 사람이다.


불교를 신봉했던 윤원형과 정난정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현재로선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분일세. 지금은 정경부인이시지만 그녀가 서얼 출신임을 알고 있나? 더군다나 노비든 승려든 서자이던 얼자이던 어떤 신분에 있는 자든 편견 없이 품으시는 분일세.”


“···그래도··· 윤원형은···”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 부부가 재산을 착복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조정을 문란케 한 자들은 맞지만, 난 차라리 그들이 낫다고 생각하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사람들이 그나마 더 낫다는 말이지. 안 그런가?”


정여립의 표정은 아직도 그대로 싸늘했다.


조선의 크롬웰로 불리는 정여립이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린 자다. 그게 어찌 보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직 사상이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정여립, 그의 대동사상이 더 넓게 펼쳐질 가능성이 아직 충분히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문정왕후가 죽으면 윤원형 부부는 관직을 삭탈 당하고 방귀 되었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 전에 그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불교 세력을 모으는 일과 신분제 타파의 기반을 이들을 통해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_____________



- 성명: 정여립


- 연령: 15세 (1546년)


무력(54) 지력(83) 통솔(80) 매력(77) 정치(65)

___________________





***





-한성 장통방 도자전-



토정 상단의 분기 정산이 있는 날, 서리급 이상의 핵심 멤버들이 도자전 뒤편 아지트로 모여들었다.


대방 토정 이지함, 도방 압살 임거질정, 대행수 서림, 대행수 한온, 그리고 서기와 사환 각 3명씩. 모두 내가 들어서자 일어나 인사를 했다. 한 사람만 빼놓고.


“네 놈은 늙은이한테 일 다 시켜놓고 코빼기도 안 비쳐? 또 뭔 일을 시키려고 온 게야?”


“거,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또 숟가락을 들고 그러시오? 채신머리 없게시리.”


“아무런 직책도 없는 놈이 내 상단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니 그렇지, 이 놈아.”


딱!


자리에 앉는 나를 또 숟가락으로 때리셨다.


“아이 씨, 거, 그만 좀 때리시오. 그리고 아무런 직책이 없다니, 내가 이 상단의 실세요. 비선 실세. 임형, 대방 이거 그냥 확 잘라버릴까?”


“아니 이놈이, 이거라니? 어디 대방 어르신한테···.”


처음에 심하게 부딪혔던 게 약이었을까? 이지함 선생은 늘 나를 아들처럼 편하게 대하셨다. 회의가 열리고 대행수, 서림의 3/4분기 보고가 이어졌다. 서림의 보고를 들은 우리들은 입이 떡 벌어진 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문이 이렇게나 많다고? 천 명이 넘는 인원 모두 나눠주고도···. 헤엑, 이게 다 얼마야? 일 십 백 천···.”


“한형 이걸 어떻게 하지? 중원에는 이제 더 쌓아둘 곳도 없는데. 어떻게 창고를 더 매입할까?”


상단 사람들은 서림이 재고를 기록한 서책에 고개를 박았고, 글을 모르는 임꺽정은 나를 보며 물었다.


“쌀은 묵혀두면 썩으니 구휼에 쓰도록 합시다. 우선 우리 상단 사람들한테 두 섬씩 상여(賞與)로 먼저 내어주고, 나머지는 각 지역 사찰에 시주하면 어떨까 하오. 그리고 서림, 자네는 유구국에서 가져온 은으로 함경도 단천의 백산과 평안도 운산 일대의 임야를 전부 매입하시게.”


구휼에 쓰자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산을 매입하자는 말에는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백산은 뭐요? 산 이름이요?”


“아닐세. 단천에 가면 하얗게 보이는 산들이 있을 것이네. 어차피 나물도 안 나는 쓸모없는 땅 취급을 받고 있을 테니, 지주를 만나 헐값에 매입하시게.”


“아니, 쓸모없는 땅은 사서 뭣을 하려고?”


“그 산 전체가 돈 덩어리요.”


이지함 선생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돈 덩어리라는 말에도 뾰롱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돈이 된단 말이오? 뭔 작물을 심을 수도 없을 테고.”


“하얀 산에서 채굴한 원석을 가마에 넣고 구운 뒤, 그걸 잘 빻아서 순백색 분말로 만들면,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화장품을 만들 수 있고···. ”


동해안과 맞닿아 있는 함경남도 단천에는 마천령 산맥을 따라 하얀색 산들이 감춰져 있다.


하얀 산, 마그네사이트 덩어리. 전 세계 매장량 3위. 우리가 그곳을 채굴해서 실컷 쓰더라도 극히 일부일 것이다. 모든 곳에 활용하고도 후세에 99% 이상을 그대로 물려줄 수 있을 양이 그곳에 묻혀 있다.


“구워야 하니, 그래서 도공들을 모으라 한 것이오?


“그뿐 만은 아닐세. 그 분말을 퇴비와 섞어 비료로도 쓸 수 있소. 그렇게 해서 논밭에 뿌리면 곡물 수확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렇게 만들어진 비료를 각 농가에 무상으로 나눠주시오. 양반들에게는 비싸게 팔고. 어차피 우린 계속 셀 수도 없는 재물이 들어올 테니까 농민들에겐 그냥 주어도 좋소.”


“그럼 대장장이는 무엇에 쓰려고 모으라 한 게야?”


이지함 선생이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으셨다.


“대방 어르신께서는 대장장이들과 뭣 좀 만들어 주셔야겠소.”


“싫다 이놈아. 나보고 또 산속에 처박히라는 말이냐? 이제 한성 생활에 좀 적응하나 했는데···.”


부탁드린다며 이지함 선생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럼, 운산 일대의 산은 왜 사려는 것이오?”


“운산에 대해서는···, 내 때가 되면 설명하도록 하겠소.”






* * *






-봉은사-



“주지 스님 계십니까?”




“아니 이게 다 무엇이오.”


쌀 150 섬을 싫은 수레 행렬을 이끌고 봉은사를 직접 찾았다.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 1515~1565)를 직접 만나야 했다.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가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자다.


현 시점의 비선 실세. 불교를 움직이는 자. 외척들을 적절히 이용하려면 그들의 불심에 기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관세음보살, 이게 다 무엇이오?”


“쌀입니다. 스님.”


봉은사 주지, 보우스님에게 난 공손히 합장 반 배로 인사했다.


“이제 곧 겨울이니 해서 민초들 구휼에나 써 주십사하고 가지고 왔소이다.”


“이 많은 양을 어떻게? 아무래도 각 사찰에 나누어 보내야겠소.”


“큰 사찰마다 모두 보냈으니, 한성과 주변의 어려운 자들에게 전부 나눠주십시오. 스님”


보우 스님은 크게 놀라며 두 손을 다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아, 내 놀라서 그만···. 실례했소.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네, 익위사 우시직, 한 이정이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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