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종(末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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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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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DUMMY

“두 번째는, ······오늘 자네들과 귀중한 서약을 맺고 싶어서 불렀네. 한 동네에서 이리 좋은 벗들을 만났는데, 순신이가 떨어지게 되었으니···. 비록 이곳에 복숭아나무는 없으나 도원결의 같은 것을 맺고 싶다는 말일세.”


제길, 낯이 뜨겁다. 그래도 끝까지 말해야만 했다.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믿음 없인 대업을 이룰 수 없을 테니까. 어릴 때 친구인 것만으로도 좋지만, 뭔가 더 끈끈하게 우리를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우린 네 명인데··· 그럼 난 뭐 깍두기요?”


허성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토라졌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순신이가 팔을 잡아당겨 무르팍에 앉혔다.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는데, 넷이면 어떻고 셋이면 또 어떤가. 성이도 꼭 함께해야 하니 불렀지. 제갈량도 도원결의 때 없었지만, 나중엔 형제 이상의 존재가 되는 걸 잘 알지 않느냐.”


지금은 코흘리개일 뿐이지만 훗날 남인을 대표하게 된다.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허균과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될 인물이다.


류성룡은 한동안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고 있나 하는 표정으로. 난 그저 류성룡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조른다고 될 인물이 아니니까.


“말하고자 하는 게 뭐요? 진의(眞意) 말이오.”


생각을 마친 듯 눈을 뜬 류성룡이 입을 열었다.


“음, 내 자네들과 함께 부국강병(富國强兵), 부국안민(富國安民)을 꿈꾸고 싶네.”


“그 뜻이야 늘 형님이 말하던 것이니 알겠소만, 내 묻는 것이 아님을 아시지 않소?”


역시 날카롭다. ‘함께 새로운 나라라도 만들자는 거요?’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을 뿐. 그런 말은 왕이나 할 말이 아니냐고 류성룡은 물었던 거다.


다음 왕이 선조고 그다음이 광해, 인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선조 모가지부터 비틀고 싶었다.


“그럼 나도 하나 묻겠네. 나라가 왜 있다고 생각하나? 백성 때문인가 아니면 왕을 위함인가?”


“그거야···”


류성룡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유교의 틀 속에서 공부한 사람이니까.


“백성이야? 아니면 왕을 위함이야?”


둘 다라고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난 택일하라 강요했다. 내가 왕이 되어서 앞으로 벌어질 전란을 수습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대업에 꼭 필요한 인물들을 잃을 것이 자명했다.


“내 자네랑 그런 얘길 하자는 게 아닐세. 만약 자네에게 이 나라를 갈아엎자고 하면 자네가 그리할 텐가? 난 그저 우리가 한날한시에 갈 때까지 함께 하자는 걸세. 서로 언제나 한 편이 되어주자 이 말이야. ”


한날한시에 죽자는 말은 무엇보다 앞서는 진심이었다. 먼저 세자의 죽음을 막고 순신이의 죽음을 막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만약 이순신 장군께서 전사하지 않으셨다면 향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늘 궁금했었다.


“뭐 그렇다면 좋소. 내 형님 마음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오만···,”


“그럼 뭐가 더 필요한가. 오늘부터 우리는 형제지.”


빈틈을 보였을 때 말을 막아야 했다. 더는 질문을 못 하도록 성룡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류성룡이 당황하며 답하자, 순신이가 우리의 손을 말없이 덮어 주었고 성이가 마지막으로 손을 올렸다.



[이순신, 허성, 류성룡과의 관계가 의형제로 격상되었습니다.]



‘됐다.’


수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그간 성격에 안 맞는 스토킹을 한 걸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업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수만 가지지만, 이 첫 단추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할 뿐이니까.


난 가슴팍에서 몰래 가져온 술을 꺼냈다.


“뭐요 그게?”


“형제가 되었는데, 축하주는 기본 아닌가?”


술병을 돌렸다. 어린 시절 함께한 일탈이 잊지 못할 추억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성아, 시나 한 수 읊어봐라.”


허성이 시를 읊는 동안 난 허공에 뜬 상태창을 바라봤다. 어린 나이임에도 대단한 능력치 들이다. 언젠가 정점을 찍을 스탯이 기대된다.




———————————


[성명: 이순신]


연령: 13세 (1545년생)


통솔(80) 무력(81) 지력(83) 매력(86) 정치(23)


———————————


———————————


[성명: 류성룡]


연령: 16세 (1542년생)


통솔(79) 무력(34) 지력(88) 매력(83) 정치(78)


———————————


———————————


[성명: 허 성]


연령: 10세 (1548년생)


통솔(25) 무력(12) 지력(78) 매력(68) 정치(75)


———————————





* * *






다음날, 한양, 장통방(長通坊, 지금의 종로, 남대문 일대의 행정구역)


“여어, 나리 또 오셨습니까.”


“허허, 그 나리라는 소리 좀 집어치우라니까? 나이도 어린 사람한테···.”


“어떻게 소인이···.”


“거 참, 이 사람. 그냥 나는 한형, 정 못하면 자네도 한씨 그러면 될 것을. 꼭 매번 올 때마다 나랑 이리 실랑이를 할 텐가?”


“돌림자도 어른이신데 소인이 어떻게···.”


어릴 때부터 봐왔던 사람이 말을 높이는 게 싫었다. 연배도 위고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세월이 그래도 꽤 되는 사인데. 정 뭐 하면 그냥 서로 반말하면 될 것을.


“그나저나 오늘은 뭘 또 팔아 치우실려고? 전물(맡긴 물건)을 찾으시려는 건 아닌 거 같고?”


“거,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어디 맡긴 걸 다시 찾을 사람인가? 오늘은 급전이 필요해서 왔네. 내 귀한 벗한테 선물을 좀 해야 해서.”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순신이한테 뭔가 소중한 걸 주고 싶어서 또 큰아버지 창고에 손을 댔다. 내 과거급제에 신이 난 큰아버지께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쓰라고 하셨으니까.


“한형, 상술이 아주 좋아. 나날이 이렇게 번창하면 조선 제일 갑부가 되겠어.”


“그냥 쬐금 풀칠하는 거 가지고 또 그러십니다요.”


“치, 겸손은, 운종가에 육의전을 다 갖추고, 도자전(금은방)까지 하는 사람이 입에서 풀칠이나 한다고?”


“쫌 그러지 마시고, 에헤이, 내가 찾아줄게. 거, 뒤적거리지 좀 말라니까요. 에이 그 양반.”


‘오늘은 볼 수 있으려나?’


내가 많은 도자전 중 굳이 이곳을 들락거린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 씨, 이 작자가 한 온이다. 임 거정의 장물을 유통하고 관리하는 자.


한참 교환할 물건을 가지고 한 온과 실랑이를 하는데, 거대한 풍채를 가진, 양인처럼 생긴 자가 봇짐을 들고 가게에 들어섰다.


‘이자다. 이 자가 임꺽정이다.’


누가 봐도 이자가 임꺽정일 수밖에 없는 외모. 그가 도자전 문 앞에서자, 점포 내부까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어두워졌다. 압도적인 풍채에서 나오는 위압감 그리고 살기.


임꺽정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


‘압살(壓殺)’


“어이쿠야! 이 백정 놈이 어딜 들어와! 썩 나가.”


한온은 내 눈치를 보며 임꺽정을 밀어내듯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물론 상태창에 떴었던 일본의 장수, 우에스기 겐신이 무력 103이었지만 그건 전투경험이 많은 까닭일 거다. 난 입을 벌린 채 말도 안 되는 상태창과 임거정만 번갈아 쳐다봤다.



———————————


[성명: 임거질정]


연령: 37세 (1521년생)


통솔(78) 무력(99) 지력(43) 매력(89) 정치(13)


———————————


저잣거리까지 밀려 나가던 임꺽정이 한온을 뿌리치며 말했다.


“백정놈? 뒤질래?”


“아니 임형, 그게 아니라. 손님이 있어서.”


한온은 점포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휘저어 댔다.


“누군데?”


“왜 내가 말했던, 그 좀 다르다고 한 양반. 한이정이라고.”


“···한이정? 아, 그분? 그건 그렇고 뭐, 백정놈? 이 쌍놈의 새끼, 불알째 다 뽑아 버릴까?”


임거정은 왼팔로 한 온의 목을 감아 조였다. 거대한 이두근이 한껏 부풀어 오르자, 한온의 까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백정놈’이란 말은 임꺽정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였다.


“그냥 소개나 시켜주면 될 것이지. 이 좆만한 장사치 새끼가.”


“아,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잘못했네. 이것 좀 풀고 얘기 하시게에엑! 사람 목 빠··· 켁,케켁”


둘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가게로 다시 들어왔다. 난 물건 고르는 척을 하며 곁눈질로 임꺽정을 살폈다.


얼핏 봐도 이 사내, 사람이 아니다. 진한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매며, 툭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얼굴보다 굵은 목. 헐렁한 옷에 가려져 있어도 그의 거대한 골격과 근육 갑옷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백정이 북방 유목민 일 거라더니, 위구르 계열인가?


“저 나리, 이 자가 백정이긴 한데, 인사드리고 싶다고···”


“젠장, 그놈의 나리는···. 저 한 이정이라 합니다.”


한온의 말을 자르고 임거정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임거정은 손을 맞잡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했다. 신분이 다르니까.


난 뒤로 팔을 빼는 그의 소매를 붙잡아 양손으로 임거정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두툼한 손을 살포시 감쌌다. 글러브 같았다.


“···소인, 임가라고 하옵니다.”


임꺽정은 커다란 풍채에 걸맞지 않게 머리를 조아리며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이 짠해서 나는 더 낮게 머리를 숙였다.


내 계획 속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물. 이 소중한 사람이 이런 대접을 받게 만드는 이 나라, 반드시 바꿔야만 한다. 신분제의 폐해는 조선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아랫사람은 기가 눌려서 못살고 윗사람은 그 눌린 기마저 빨아 먹고 있었다.


“한가놈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요. 그래서 언젠가 꼭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자가 또 제 욕을 합디까?”


장난스럽게 한 온을 가는 눈으로 째려봤다. 한형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닙니다요.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저희 같은 자들에게도 격의 없이 대해주신다고···.”


“아, 그건 그렇고. 임형께서 고기를 다루신다고 하셨소? 그럼 내 부탁 좀 합시다. 쇠고기를 좀 구할 수 있겠소?”


“쇠고기요? ······얼마나 필요하신지.”





* * *





한양 외곽의 산 중턱, 북악산 기슭.


이 시대에는 소를 도살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있었다. 특히 도살자를 엄하게 처벌하란 명이 팔도에 내려져 있었다. 소가 농사에 쓰이니 그리한 것이었다.


한 온이 소개시켜 준 암시장에서 살집이 오른 암소 한 마리를 사왔다. 임거정은 소를 계곡 근처까지 끌고 내려가서 굳이 목을 졸라 죽였다. 무슨 최영의 선생도 아니고 밧줄 하나로.


“어허이, 거 쫌 하지 마시라니까? 짐승 피 묻힐 분이 아니신데. 어여, 칼 이리 주십쇼.”


“허허, 거 괜찮다니까 그러시네. 둘이 번갈아 잡으면 금방 끝날 것을 뭐하러?”


소를 해체하는 게 쉬워 보여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도살하는 자를 벌한다는 명이 있었으니, 임거정에게만 시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대체 뭐 하시는 분인데, 발골까지 할 줄 아십니까?”


어떻게 보면 나도 백정 출신이다. 전생의 부모님이 정육점을 하셨었으니까. 어깨너머로 어릴 때부터 배웠고 글 쓰면서도 부모님이 바쁘실 때마다 일을 도왔었다.


임거정도 그러고 보면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백정이고 본인은 유기장인 고리백정이었어도 꼬리표에는 늘 그냥 천한 백정이라 새겨져 있었다.


“다 사람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배워야지요.”


“허허, 거 참 재밌는 양반이십니다. 내 살다 살다 한 형같은···.”


순간 말실수라고 느낀 임거정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는 땀을 훔쳤다.


“허, 한형이라고 했소? 거 참 듣기 좋은 소리요. 임형, 우리 편하게 말 놓으십시다. 그나저나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간다?”


나보다 거의 스무 살이 많은 사람이다. 이 놈에 망할 나라의 이상한 존대는 해가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가 한 씨 놈한테 애들 좀 보내라고 했습죠. 지난번에도 이곳에서 잡은 적이 있어서. 허허”


올 때는 소에 수레를 달고 왔는데, 이제 소가 없으니 한 말이었다. 한참 동안 해체한 소를 부위 별로 담고 있는데, 네 명의 사내가 계곡으로 내려왔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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