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종(末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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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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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9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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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DUMMY

“그게 무슨 소린가. 삭탈이라니!”


“소신이 어떤 자리에 있던지 또 다른 구설수가 생겨날 것이옵니다. 지금이야 본인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지만, 결국 서로의 의견이 갈라져 전하를 괴롭히게 될 것이옵니다.”


“···크음, 다른 자들의 말이 신경 쓰이는 게로구나. 귀공이 관직을 탐하여 그리했다고들 하는 자들도 있고, 계략을 꾸며 그리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으나 내가 괜찮다면 되는 것 아니더냐. 그들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지. 그렇다 해도 삭탈은 아니 된다.”


“황송하오나 그리하셔야 하옵니다.”


“···이 일은 내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마.”


그날 이후 공포에 휩싸였던 자들도 하나, 둘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나를 탄핵하라는 상소도 줄지었다. 수천 명이 보는 앞에서 7명의 목을 베어 버렸으니.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기분 좋은 일이지만 누구의 시선 따위에 자유로워 진지 오래였다.


“소신 청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그래. 말해보거라”


“시대의 천재, 세자의 선생 이이를 중용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의 분열을 융합할 수 있는 자는 율곡밖에 없사옵니다.”






* * *






한성을 떠나기 전, 동궁전에 들렸다. 순회세자는 명종과는 다르게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랐다. 세자는 한층 더 단단해진 표정으로 나를 동궁전으로 들였다.


“아직 일이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어딜 가려 하느냐?”


“소신, 피를 많이 묻혔사옵니다.”


“그래서, 중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이 얼굴에 머리까지 없으면···.”


세자는 그 모습을 상상한 듯 피식 웃었다.


“신이 없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저하가 되시옵소서. 더욱 튼튼해지셔야 하옵니다.”


“내 이번에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내 똑똑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으나 죽음을 직접 목도하고 나니,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구나.”


늠름해진 세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마음 편하게 앞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


수일이 지나고 명종은 대외적으로 내 관직을 삭탈한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말이 7마리나 그려져 있는 마패와 사목과 봉서를 내게 준 뒤였다.


말이 7마리가 그려진 새 마패는 원래 영의정 이상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제 역참에서 말을 7마리나 빌릴 수도 있다.


이 마패는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신분이 전국 어느 곳의 관료들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신분증 같은 것.


숭례문을 나서며 열어본 봉서에는 명종의 친필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원래 봉서는 임무에 대한 정확한 지침이 빼곡히 적혀있었지만 내가 받은 것은 달랐다. 달랑 한 줄의 글과 그 위에 찍혀진 옥새.


[一切都被允許]

모든 것을 허가한다.


마포 나루에 이르자 미리 배를 준비해 둔 임꺽정과 토번이 나를 맞이했다.


“고생했네. 근데 어디로 가려고?”


“우리 당진으로 갑시다.”


“당진? 당진은 뭐하러?”


“순신이 보러 아산으로 가려 하오. 우리 거기서 며칠 같이 놀면서 좀 쉽시다.”


“좋지. 안 그래도 나도 그 동생이 보고 싶어. 내려간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어찌 그리 매력이 넘치는지.”


순신이도 보고 싶었지만, 병서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동안 짬짬이 무예도보통지와 기효신서, 절강병법을 서책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적절히 조합하기에는 한계가 느끼고 있었다.


새롭고 강력한 병법서를 완성 시키려면 충무공 이순신의 도움이 절실했다. 창의력의 대가. 전신, 이순신이 만들어낼 새 병법서를 기대하며 당진으로 향했다.





***




당진에 도착하자


이지함 선생과 상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늙으셨소?”


“그게 인사냐?”


걱정되서 말한 건데 이지함 선생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방 어르신”


“이게 인사지.”


임꺽정이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이지함 선생은 임꺽정의 팔을 툭 치고는 날 째려봤다.


오랜만에 만난 이지함 선생의 볼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동안 날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멋쩍어서 농담처럼 인사를 건넸지만,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살이 좀 빠져도 인물은 그대로 그저 그렇구나. 네놈 지랄에 대해서는 이미 다 들었다.”


“거,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 좀 가려서 하시오. 지랄이 뭐요? 지랄이.”


“망나니처럼 칼춤을 춘 게 지랄이지, 그럼 뭐라 해주랴?”


“아직도 멀었소.”


“뭐가 멀어?”


“이놈의 늙은이 더 굴려야지 정신을 차리지. 이번엔 백두산이나 좀 다녀오시오.”


“뭐야 이놈아!”


“때리시오. 내 이럴 줄 알고 갓까지 쓰고 왔소.”


모처럼의 해후, 상단 인원 50여 명과 함께 우리는 당진의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갔다. 각 방과 평상에 자리를 잡자 주막이 상단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다들 밥부터 먹자고. 여기 게장이 끝내줘. 술지게미에다 절인 것인데, 아주 이놈이 밥도둑이야. 오늘 내가 다 값을 치를 테니 마음껏 여독이나 좀 풀게나. 탁주도 시원하게 한 사발씩 하고!”




“넵, 대방어르신”


원래 대로라면 이지함 선생은 이곳에서 현감을 지내게 되는 곳이다. 1578년 이곳에다 걸인청을 만들어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과 약자들을 구호하는데 힘쓰시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지함 선생은 제집처럼 편안하신 얼굴이었다.


“네놈 혹시 송익필이라고 아느냐?”


“송익필?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놈은 널 알고 있던데. 소과에 같이 급제 했었다고···.”


“아! 그 송익필···.”


그자가 나와 1558년에 소과 급제를 했다고?


왜 그걸 몰랐었지?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이었지만, 그를 모를 리 없다.


“어, 저기오네. 여길세.”


“우와, 어르신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들이 다 선생님 상단 사람이오?”


남루한 선비의 옷차림을 한 사내가 이지함 선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으음, 극히 일부일 뿐이지. 인사들 하시게 여기는 송익필이라고 이 동네 사람이네.”


송익필이 당진 사람이었구나. 파주 삼결로만 알고 있었는데. 파주 삼결, 이이와 성혼 그리고 송익필. 훗날 파주로 찾아가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둘이 구면이라며?”


“저는 기억을 해도 이분은 잘 모르실 거요. 저 송익필이라 하옵니다. 의금부 도사나리.”


왠지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저 이제 도사 아니옵니다. 한 이정이라 하옵니다.”


언젠가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혹시라도 삼고초려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과거 볼 때, 옆에 앉아서 같이 봤었소.”


“그랬소?”


“이놈이 이렇게 둔하다니까. 천하의 인재를 옆에 두고도 몰라보니. 쯔즛, 네 놈은 안 돼. 글렀어.”


“글른 게 맞소. 이런 사람이 옆에 있었는데도 못 알아보고, 고약한 영감탱이를 모셨으니 말이오. ”


퍽!


“허허, 하나도 안 아프오.”


“이제 갓 좀 벗으시지. 편하게 응?”


“싫소. 내 체통이 있지. 으헤헴!”


이지함 선생은 내 갓을 수저로 한 대 더 내려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상단 사람들 얼굴 좀 봐야 하니, 둘이 얘기 좀 하고 있게. 가십시다. 임도방”


임꺽정과 이지함 선생은 이 상 저 상을 옮겨 다니며 상단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이지함 선생과 연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송익필을 술자리로 불러냈고, 나와 단둘이 있게 만드신 이유를 난 알 수 있었다.


“근데 송형은 왜 여기에 있소? 급제를 했으면 관직을 하셔야지.”


“원래 사는 곳은 고양군이오. 골이 아파서 잠시 내려와 있소.”


송익필이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질문을 피해갔다. 그럴 줄 알면서도 난 일부러 속을 긁는 질문을 던졌던 거다. 서얼 출신의 송익필이 급제를 하자, 사관 이해수등이 대과 응시를 정지시키고 초시 합격 자격을 박탈하여 벼슬길을 막아버렸었다.


“이이와 정철에게 한형 얘기는 많이 들었소. 이번에 큰 사건을 저지르셨다고.”


“큰일은 무슨.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오.”


나도 동문서답을 하듯 비꼬는 말을 피해갔다. 팽팽했던 말장난은 술을 한두 사발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말투가 편해지고 있었다.


‘뭐 과거 동기이기도 하니까.’


송익필은 구도장원공 이이조차도 인정한 천재였다. 성리학을 논하려면 송익필, 송한필과 이치를 따지라는 말이 있다. 송한필은 그의 동생이다.


정철과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송익필은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이 정권을 잡을 때, 이들을 움직인 서인(西人)의 모주(謀主:일을 주장하여 꾀하는 자)로 알려진 자다.


어쩌면 정여립의 난을 사주한 것도 또 수많은 사류(士流)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철을 사주한 것도 이 자의 짓일지 모른다. 정치공작의 대가라는 설도 남아 있으니까.


신분의 한계만 없었다면, 그로부터 시작된 미움과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다면 구봉(龜峯)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난 이 자의 미래를 바꾸고 싶었다.


‘임진왜란을 송구봉(宋龜峰), 송익필이 맡았으면 여덟 달 안에 평정했을 것이다.’ 라는 야사의 기록이 있을 정도니, 이 인물이 늘 궁금했었다.


좋은 머리로 이 작은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데에만 사용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장예원은 왜 태워버린 것이오?”


“5할은 이 나라를 구할 병사를 얻기 위함이었소.”


“면천을 미끼로 모병을 하시겠다?”


‘아’하면 ‘어’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느낌을 온전히 표현 못 할 것이다. 이 자는 지금 내 한마디를 듣고 세 단계를 뛰어넘어 속내를 읽어 버렸다.


“허허허, 이 양반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요? 여기 있을 자가 아닌데···.”


“나머지 5할은?”


“앞날을 움직일 책사를 얻기 위함이었소.”


“책사가 5할이라. 조선에 그런 자가 있소?”


“한 명 있소. ······송익필이라고.”


사발을 들이키던 송익필의 목젖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생각한 것이니까.


“농담을 하신 게요? 허허허, 말을 참 맛갈나게 하시는 양반이구려.”


“농 아니오.”


이자는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불린다.


‘서인의 제갈공명’


조선 중기의 학자들은 말했었다. 제갈량을 알고 싶으면 송익필을 보면 된다고.


“나 같았어도 정철에게 이번 일을 맡겼을 것이오.”


“···케헥, 뭐라 하셨소?”


송익필의 반격 한 마디에 사레 걸리고 말았다. 난 잠시 뒷간에 다녀오겠다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이, 류성룡과도 다른 종류의 지(知)를 갖춘 인간이다. 이이와 류성룡이 일말의 선함이 걸림돌이 되어 생각지 않으려는 것까지 이자는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냉혈한이 전란을 앞둔 조선에게 꼭 필요할지도.’



순간 떠오른 상태창이 궁금해서 도저히참을 수가 없었다.


____________


성명: 송익필


연령: 27세 (1534년 생)


무력(36) 지력(98) 통솔(91) 매력(85) 정치(93)


_______________


뭐야 이 미친 능력치는?


조선의 제갈량이라더니···. 이 자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후의 술자리는 이지함 선생이 다시 합류했고, 그저 그런 시국에 대한 이야기와 노친네의 썰렁한 농으로 마무리되어 갔다.


송익필은 그 이후 내게 어떤 빈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였다. 술자리를 마치고 일어나는 송익필을 따라나섰다.


“송형, 내게 하루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소?”


“우리 오늘 실컷 이야기한 것 같소만. 왜 그러시는지?”


“잠시만 기다리시오. 보여줄 게 있소.”


난 짐꾸러미에서 무예도보통지를 꺼내서 건넸다. 소설 쓸 때 참고용으로 하드에 넣어놨던 자료다. 이걸 필사하느라 죽을 뻔했다.


“이 책 좀 봐주시구려.”


“무예도보통지라. 이게 무엇이오?”


“내가 지금 전하께서 분부하신 신 병서를 준비하는 중이요. 이걸 그대와 함께 만들고 싶소.”


서책을 넘기는 송익필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난 미끼를 던졌지만 그를 낚을 수는 없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 낚는 것은 다른 자의 몫이라 생각했다. 그를 품을 수 있는 한계가 없는 또 다른 대기(大器).


송익필, 드디어 대어의 입질이 시작되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단지로 들어오는 인터넷이 끊어진 듯 합니다. 황급하게 카페로 나와 글을 올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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