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머 아카데미 유학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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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톤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2.05.20 17:59
최근연재일 :
2022.07.02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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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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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게임 속으로 납치당하다

DUMMY

뚝뚝.

진홍빛 액체가 비릿한 쇳내를 풍기며 바닥을 적셨다. 물과 꿀을 반쯤 섞은 듯한 점성이 묘한 불쾌감을 일으킨다. 곧이어 그 불길한 웅덩이 속에 타액과 땀, 추억 서린 눈물이 스며들었다.


“헉, 헉······.”

“헉, 헉······.”


웅덩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눈매를 송곳처럼 세우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학원 동기, 친구, 라이벌.

한때는 이렇게 밝은 단어들로 둘의 관계를 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훨씬 처절하고 날선 단어가 필요하다.


숙적.


“항복해, 윤나래.”


소년이 먼저 입을 뗐다.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서.


“승부는 났어. 널 죽이고 싶진 않아.”

“아하, 아하하하하······.”


순해빠진 소년만화 주인공 대사가 튀어나오자, 광녀의 조소가 돌아왔다. 무릎을 꿇은 건 이쪽인데 오히려 여유가 흘러넘친다.


“너 진짜 알기 쉬운 놈이라니까, 민수호. 항상 사람의 선한 면만 보려고 하더라. 그게 썩어빠진 인간일수록 더더욱.”

“이제 그만 옛날로 돌아오라니까.”

“쭉 이랬는데? 입학 첫날부터.”


삐걱삐걱.

소녀의 탈을 쓴 태엽인형이 드디어 수명을 다하려 한다. 으리으리한 저택, 충직한 집사, 재산과 명예······.

남 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영애가 최후를 맞이하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음침한 동굴 속이었다. 자신과는 반대로 영웅이 된 학원 동기를 마주한 채.


“이만 끝내. 뭘 망설여? 지금 날 살려보냈다간 또 누굴 죽일지 모르는데.”

“······.”


민수호는 깨달았다.

이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해봐야 의미 없다는 걸.

더 붙들고 늘어져봐야 이 소녀를 옛날처럼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그럼 선택지는 단 하나.


“용서해.”


결단을 내린 주인공은 조용히 검지 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러자 뒤에서 콧김을 뿜고 있던 비룡이 웅장한 날개를 펼쳤다. 마지막 진화 단계에 다다른 궁극의 몬스터. 그게 악어처럼 커다란 입을 벌리자, 생물의 영혼을 파괴하는 광선이 창백한 빛을 내뿜었다. 그 무자비한 일격은 너덜너덜해진 소녀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그동안 재밌었어. 다음 승부는 지옥에서 내자.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털썩.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고딕드레스에 싸인 얇은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마지막으로 꺼져가는 눈빛에 서린 건 웃음기가 아니었다. 뼈에 사무친 후회였다.


난 이 장면을 더 지켜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냐고? 채팅창 민심이 개박살났거든.



- 좆같네 진짜

- 이건 진짜 실드 못 침

- 작가 홍머병 씨발 ㅋㅋㅋㅋ

- ‘12세 이용가’

- 나래가 무슨 죄냐

- ㄹㅇ 민수호 저 새끼가 진짜 광기임



물론 외국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 Who call him a hero? KEKW

- ¿Hay otros finales? ¿Puede terminar así?

- これが韓国の誇りというそのゲームですね。良い口径でしたwwwwww



내가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술술 읽히는군. 항상 반응이 똑같다니까. 위 아 더 월드.


솔직히 개똥같은 스토리는 맞다. 라이벌에게 밑도 끝도 없이 불행이 몰려오는데,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마왕의 간부로 타락한다. 그리고 이 변절자를 처단한 주인공은 정의의 용사이자 영웅으로 거듭나고······.


뭐 여기까진 흔해빠진 권선징악 얘기다. 꿈나라 어린이 동화책이나 7080 무협영화 감성이랄까. 하지만 속사정을 안다면 누구나 라이벌 편을 들 걸? 완전히 개막장 설정이라서 안 망가지고 배길 수 없는데. 불행 포르노도 아니고.


아무튼 선 넘는 조롱 나오기 전에 얼른 수습을 해야겠군. 요즘 근위치 채팅 검열 빡세더라. 내 밥줄이 끊기면 곤란하거든.


“아, 형들 좀 참아줘. 나 정지되면 어디 가게? 이 거지같은 엔딩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중요한 건 따로 있잖아.”



- ㄹㅇㅋㅋ

- 진짜 이쯤이면 나와야하는데

- 이거 몇 트였음?

- 106트

- 사람새끼임?



채팅창 지박령들이 내 겜창력에 감탄하는 와중에,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지가 떴다. 이 오랜 노가다의 결실이.



[BOSS CLEAR]

[스토리 모드를 완료했습니다.]


〈 획득 포인트 : 19573 〉

- 승리 횟수: 223

- 패배 횟수: 0

- 수집한 몬스터 수: 25

- 쓰러뜨린 몬스터 수: 617

- 사용한 아이템 개수: 0

······.


〈 축하합니다! 글로벌 랭킹 22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마우스 휠로 스크롤을 쭉쭉 내렸다. 등수는 관심 없어. 어차피 1위부터 21위까지 전부 내 점수인데. 나랑 시청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 신규 달성 업적 〉

- 없음



“하.”


또 쪽박이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이 메시지 볼 때마다 힘이 빠지는군. 열기와 의욕이 팍 식는 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



- 또 안 나왔음?

- 이 정도면 게임사에서 특전으로 하나 줘야하는 거 아닌가 ㅋㅋ

- ㄹㅇ

- 진지하게 물어보자 농담이 아니고



89개의 업적 중에 무려 88개를 달성. 보통 이쯤이면 질려서라도 졸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마지막 1개가 핵심이거든.



(89)〈깨어나는 전설〉

- 상태: 미달성

- 조건: 불명



오늘도 실패다.

전설의 몬스터, ‘로기아’ 획득.


“조건이라도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쌓인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왔다. 프로 시절에도 이 수준은 아니었는데. 책상 구석에 굴러다니는 카페인 에너지 드링크 캔들이 이젠 생수통보다 친근하다.


“물 속성 빼고 클리어해도 안 돼, 다섯 시간 타임어택해도 안 돼······. 내 머리로는 이제 한계다. 개발자들 뇌 뚜껑이라도 열어보고 싶은데.”



- 암만 봐도 낚시임

- 신작 개발 시간 벌려고 떡밥만 던진 거라니까

- 클뜯해도 뭐 없던데

- 2년이나 붙들고 있는 얘가 미친 거임ㅋㅋ



“아아, 됐어. 설마 이런 걸로 낚으려고? 그냥 내가 못 찾은 거지.”


자기들도 재밌게 봐놓고선 돌아이 취급이야.

평소라면 의욕이 꺾여 방종을 때렸을 거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계속 달려야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니까.


8분만 기다리면 대축제거든.

대망의 신작 타이틀 발매.



<캡슐 몬스터즈 배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게임 시장을 주름잡은 프랜차이즈다.

놀랍게도 한국 개발사 작품! 게임 시장인지 도박 시장인지 헷갈릴 만큼 사행성으로 물든 황무지에 한 떨기 장미꽃이 피어났다. 미국은 부러워하고 중국은 구애하고 일본은 전전긍긍하는 국뽕튜브 썸네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


장르는 몬스터 테이밍물. 야생의 몬스터를 포획한 다음, 육성과 훈련을 거쳐 최종단계까지 진화시키는 게 첫째 목표. 이렇게 완성한 몬스터들로 대마왕 디아볼로스의 부활을 저지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다.


성공 요인은 단순 그 자체. 몬스터 디자인이 귀엽고 멋져서. 불과 5년 만에 타이틀이 3개나 나올 만큼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이 게임의 흥행가도를 가로막은 강적이 있었으니······.

K-검열.


“씨발, 여성형 몬스터 몇 마리 기획했다고 성 상품화라니.”


꾹꾹 눌러온 울분이 육두문자로 튀어나왔다. 그러자 동조하는 채팅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ㄹㅇ

- ㄹㅇㅋㅋ

- 선 넘었지

- 가상 캐릭터 인권도 중요하다구욧!!!

- 그거 출시도 못함 ㅋㅋㅋ

- 국제망신 ㅅㅂ

- 펄~럭



신작에 넣기로 한 몇몇 몬스터 디자인이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먹잇감을 발견한 언론의 하이에나들이 신나게 물어뜯었고 개발사는 뒤로 후퇴. 기획을 전면 수정하다가 완성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핵심 개발자의 의욕이 감퇴했다나? 유저 수도 그때부터 줄었고.

진짜 답이 없다니까. 여기가 무슨 독재국가냐.




[김민석 님이 <Capsule Monsters Battle – Brave Heart> 을(를) 방송 중입니다.]

[제목: 3시에 신작 타이틀 오픈!]

[7,086 명의 시청자와 함께 시청하세요.]




새삼 방송 정보를 확인하니 화가 약간 누그러졌다. 시청자가 이만큼 모인 게 얼마만이지? 웬만한 레전드 오브 리그 프로게이머, 버추얼 유튜버 부럽지 않은 숫자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네.


오랜만에 복귀한 네임드 시청자들도 꽤 보인다. 팬 아트 그려주신 일러스트레이터, 가끔 시크하게 50만원씩 던져주고 가시던 회장님. 동창회에서 옛 학우들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그리고······.



- 정실은은보라 님께서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보라쟝 1집 <The Wise Choice> 듣고 가자]



하······. 씹덕 빌런, 너도 살아있었냐?

영상 후원 하나에 채팅창 분위기가 작살이 났다. 캡슐 몬스터즈 관련 영상이라 컷할 명분도 없고, 이런 거 하나하나 잘랐다간 후원도 줄어들겠지. 일단 듣는 척이라도 하자.

‘은보라.’ 이 게임 세계관 내의 무명 가수라는 듯하다. 신작 타이틀 낼 때마다 PV 영상으로 얼굴을 비치는 소녀. 이젠 멜로디가 익숙해져서 반사적으로 흥얼거리는 내가 밉네. 언제까지 봐야 하나.


그때 고맙게도 3시 정각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2년 만에 막을 올리는 대축제.

후원 영상을 끄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미리 띄워놓은 공식 사이트에서 게임 실행 버튼을 누르자, 낯익은 클라이언트와 함께 환대 메시지가 모니터 중앙을 가득 채웠다.



[캡슐 몬스터즈 배틀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테이머 님, 새로운 여행을 하실 준비가 되셨나요?]



- 감격이다 ㅅㅂ

- 그래도 이날이 오긴 오네

- 새 캐릭들 디자인 커엽더라

- 디아볼로스 생긴 거 궁금한데

- 암컷타락 마왕임 ㅇㅇ 백퍼

- 검열로 박살난 지 얼마나 됐다고ㅋㅋ



덩달아 시청자들도 흥분을 감추질 못했다. 후끈대는 열기가 모니터 너머로 전해질 정도. 흐뭇함에 입 꼬리가 반원을 그렸다.



[그동안 시리즈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테이머 여러분의 열성과 응원에 힘입어······.]



패스, 패스. 뭔 잡설이 이렇게 길어.

휠을 쭉쭉 내리다가 마지막 문단에서 손이 멈췄다.



[<캡슐 몬스터즈 배틀 – 라스트 호프>는 시리즈의 마지막 타이틀이 될 예정으로, 여러분께서 고대하던 최종 결전이 준비돼있습니다. 반드시 대마왕 디아볼로스의 부활을 저지해주세요.]



“······.”


작별인사. 마법에 걸린 것처럼 채팅창이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뭐, 이해는 간다. 그만큼 정부와 언론한테 두드려 맞고 유해매체 이미지까지 뒤집어썼는데 개발 의욕이 생길 리가. 퍼블리셔한테도 버림받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시대를 풍미한 IP가 저무는 구나. 앞으로 계속 이 타이틀만 우려먹어야겠네.


“자자, 괜찮아! 이러다가 급전 필요하면 또 마음 바뀔지 누가 알아? 게임사 태세전환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텐션을 끌어올리며 스크롤을 끝까지 내렸다. 그러자 곧 실행 버튼이 활성화됐다. 이걸 클릭만 하면 캡슐 몬스터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번엔 제발 스토리로 뇌절하지 말자.



[VIP 모드]



“음?”


뭐여, 이게.

바로 오른쪽에서 노란색으로 깜빡이는 버튼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클라이언트에 이런 기능이 있었나? 지금까지 수백 번을 켰지만 처음 보는데.



- 뭐임?

- 내 클라이언트엔 없는데?

- 퍼클 업적 보상인가?

- 몰?루

- 저걸로 해보자 ㄱㄱ



시청자들도 금시초문인 모양이네. 호기심에 커서를 올려보니 이런 안내 메시지가 떴다.



[최초로 전작 3편을 각각 100회 이상 클리어한 계정만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는 대신, 전설의 몬스터 ‘로기아’를 스타팅 멤버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하, 이게 이렇게 되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포도밭에 숨긴 보물 동화가 떠오르는군.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스토리 모드에만 수백 판을 들이부인 노력이 드디어 보상을 받는 건가?


“이거 봐라, 낚시 아니었지? 어디 딴 방송 가지 마라. 여기서밖에 못 보니까.”



- 옼ㅋㅋㅋㅋㅋㅋ

- ㅊㅊ

- 이게 되네

- ㅊㅊㅊㅊㅊ

- 야 미친 새끼 드디어 성불하네

- 어어어 사라지지 마라

- 아 300번 클리어면 내가 먼저 해보는 건데 ㄲㅂ

- 왜 선착순 1명임?



의기양양해서 어깨에 힘을 주자 배 아파죽는 소리가 난무했다. 그새 입소문이 퍼졌는지 겨우 1분 만에 시청자가 800명이나 폭증한 것은 덤.


“그럼 이걸로 한다? 난이도가 대폭 상승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자꾸 헤매도 뭐라고 하지는 말고.”



- 전 프로가 엄살은 ㅋㅋㅋ

- 니가 못 깨면 우리도 다 못 깸

- ㅎㅇㅌ

- 선발대의 숙명임 ㄱ ㄱ



좋아, 그럼 어디 달려볼까?

나는 심호흡을 하고 노란색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CPU 전산처리 속도가 느려지며 타이틀 화면이 뜨고, 시리즈 전통 BGM이 유쾌하게······.



[데이터 다운로드를 개시합니다.(0%)]

- 필요 용량: 229.7GB



“229기가??”


입이 떡 벌어지는 용량이다. 게임을 만들랬더니 누구 인생이라도 통째로 집어넣었나. 고작 한 명을 위한 특전인데 너무 오버한 거 아니야? 괜히 부담되는데.


“어떡하지? 예상 다운로드 시간이 6시간인데. 첫 트는 일반 모드로 할까?”



- ㄴㄴ

- 그냥 기다림

- ㄴㄴㄴㄴ

- 딴방 가서 보다가 오지 뭐



민심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칼라로 연결된 것처럼 똑같은 반응. 로기아가 뭔지 어지간히도 보고 싶나보네.

하긴, 다들 2년 동안 기다렸으니까. 이날이 오기만을.


“그럼 딱 한숨만 자고 올게. 피곤해죽을 거 같다.”


양해를 구하고 방송을 끈 뒤, 침대에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푹신한 쿠션에 얼굴을 파묻자 그동안 억누른 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암.”


하품이 내 몸 상태를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도대체 몇 시간을 달린 거야? 역시 물 속성 없이 <브레이브 하트> 클리어는 무리였어. 중반부터 화염 속성 보스가 줄줄이 나오는 타이틀인데.


손을 쭉 뻗어 스마트폰을 머리맡에 두었다. 곧이어 스르르 눈이 감기려는 와중에, 뿌연 시야 너머로 반짝이는 은색 트로피들이 보였다. 내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물건들.


“······.”


옛날이 그립네. 이 게임이 e스포츠 종목으로 살아있던 시절이. 스토리 모드가 아니라 대전 모드로 진행된 공식 국제대회였다. 당연히 종주국인 우리나라가 최강.

대전으로 넘어가면 게임이 훨씬 하드해진다. 몬스터의 종족치, 기술, 배치, 상성도 모르고 전투에 임했다간 얻어맞기 일쑤. 사람들은 NPC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질 않으니까.

그 시절이 진짜 재밌었지. 프로들끼리 합숙하면서 새로운 메타 발견하고, 고인 취급받던 몬스터가 한순간에 사기캐로 등극하고, 개발사가 너프하면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버둥버둥.

저때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할 곳이 지금은 없다. 내 수준에 맞는 상대가 있어야지. 양학 컨텐츠도 너무 자주하면 물리고.


VIP 모드라고 했나? 이왕 어려울 거면 화끈하게 불지옥 난이도로 갔으면 좋겠다. 방송으로 오래 우려먹을 수 있게.



[VIP 모드를 시작합니다.]



음? 방금 웬 안내창이 뜬 거 같은데.

잘못 봤겠지. 게임에 얼마나 파묻혀 살았으면 꿈 도입부가 게임 UI일까. 앞으론 좀 건강하게 살자, 김민석.




*




“지금 여러분이 가슴에 달고 있는 백금 배지는 아카데미의 상징이자 자부심으로써······.”


꿈나라 투어를 떠난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이것은 특혜가 아니라 의무이자 짐, 그리고 희망입니다.”

“흑색 가운을 입고 졸업식을 거행한 선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심을 다하여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명성에 흠집이 가지 않도록 매사 주의하여, 여러분도 영예로운 졸업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아, 네. 네. 실컷 떠드세요, 학장 아저씨.

또 이 부분이네. 뇌리에 대고 펜촉으로 긁은 것처럼 또렷이 각인된 대사다. 최소 수백 번은 들었거든.


‘테이머 아카데미’ 입학식 연사.

캡슐 몬스터즈 배틀 시리즈의 스토리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이 성장을 끝마치기 전까지 기초적인 부분을 배우는 장소. 어디 다음 전개도 맞춰볼까?

곧 라이벌이 앞으로 불려갈 거다.


“입학생 대표, 윤나래 양은 앞으로.”


그러자 우아한 금발의 여학생이 단정한 발걸음으로 단상에 나섰다. 남들과 똑같은 잿빛 교복이지만 자태와 옷맵시에서 고급스런 아우라가 풍긴다. 연예인이 일코한다고 특유의 매력을 감출 수는 없듯이.


아, 라이벌이 나래야? 그럼 <브레이브 하트>잖아. 시리즈 첫 타이틀. 몬스터와 기술 종류도 적고 전투 시스템 역시 투박하지만, 추억보정 때문에 제일 인기 있는 작품이다.

곧 남학생들이 감탄하겠지.


“존나 이쁘다······.”

“병신아, 네가 넘볼 위치가 아니야.”

“누가 넘본댔냐? 눈요기만 할 거다, 눈요기만.”


분량 채우기용 실없는 잡담.

그리고 이 부분에서 그 녀석이 불쑥 등장한다.


“쟤가 수석 입학이지?”


갈색 머리에 순박한 눈매의 남학생. 캡슐 몬스터즈 배틀 시리즈의 주인공, 민수호.

그는 나래를 바라보며 ‘언젠간 저 녀석을 뛰어넘고 말겠어.’라고 각오를 다진다. 여린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렇게 소박한 주인공이 용사로 거듭나는 장대한 모험이 시작되지.


“어, 윤나래. 랭크 1위야.”


뒤이어 엑스트라 한 명이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름은 모른다. 원작 스크립트에는 ‘남학생C’라고만 나와 있었거든. 곧 사라질 존재인데 이름 따위 알아서 뭐해.


그런데 지금은 알 거 같다.

김민석. 내 이름이니까.



······.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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