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세 사람이 간다
70화 세 사람이 간다
“할 곳이야 근처에 나라가 많지 않습니까. 명은 물론이고 썩 좋은 기분은 아니나 청이나 왜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래, 갈 곳이야 적지 않지. 헌데 너는 지금 거론한 나라들과 교역하여 어떻게 이득을 얻을 생각이냐?”
“예?”
“이 일을 논하는 게 된 이유가 공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고, 그 해결책으로 너는 재정이 튼실해야 한다고 했다.”
송시열이 상기시킨 이야기에 윤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송시열은 윤휴가 가벼이 낸 말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여겼으나 물과 달리 사람이 품은 것은 직접 들어야 아는 법이었다.
“어느 나라와 교역하던 중점은 이것이다. 우리 조선이 이득을 보아 어떻게 재정을 튼튼하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되새기며 다시 대답해봐라. 어디랑 교역할 생각이냐?”
송시열의 물음에 윤휴는 한동안 생각하는가 싶더니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윤선거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눈을 감았다.
가만히 들은 말을 토대로 헤아려보던 그는 이내에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은 물산이 풍부하나 그만큼 아국에서 가져다 팔 것이 없다시피 합니다. 그러니 이득을 보기 힘들고, 청은 반대로 물산이 적으나 가져다 이득을 볼 게 적군요. 그리고 왜는.....”
말을 하다 말고 고민이 드는지 윤선거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러모로 껄끄러운 곳입니다.”
“그렇지.”
왜라는 나라는 조선에게 있어서, 아니 삼한 역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참으로 어려운 나라였다.
사귀기에는 믿음직하지 못하고 배척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나참, 사방 나라가 이리도 도움이 되지 않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윤휴가 투덜거리니 윤선거 역시 동감하듯 말을 이었다.
“정말입니다. 전날에 침범한 나라가 하나에 당대에 침략한 나라가 하나에 이제는 흔들리는 우방이라, 새삼스레 지금 천하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겠습니다.”
“그래도 발품 판 일이 헛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두 사람의 말에 송시열은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에 시선이 모이니 송시열은 곧이어 생각한 바를 입에 담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재정이 튼실해야 함은 당연함이 아닌가. 이번 공납에 한 손 보태기로 한 것과 별개로 상소를 올리겠네. 그러면 아마 자네들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오를 테니 나중에 조정에 출사하기 용이하겠지.”
“좋은 일이기는 하나 저는 부끄러운 꼴로 도망치듯 사직한 몸입니다. 사형의 마음 씀씀이는 고맙습니다만 거두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사양에 송시열은 고개를 흔들며 재차 권했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좀처럼 있는 게 아니니 한번 이름이나 올리는 게 좋지 않겠나?”
“그런 것 하등 의미 없습니다. 제가 지금에 와서 뻔뻔하게 군다는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조사하여 안 수미법만 조금 개량하여 내놓았다면 저는 율곡 선생의 뜻을 이어 민생을 살피는 유학자라 허명을 얻었겠지요.”
“허허.”
두 사람의 반응에 괜스레 미안해진 송시열은 머쓱한 얼굴로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의 생각으로 보름, 아니 그 이상을 고생한 이들이니 무어라도 해주지 않으면 속이 편치 않았다.
“그럼 뭐 다른 거라도 바라는 건 없나? 내 힘은 없으나 그래도 아는 건 있고 연줄도 있으니 말이나 해보게.”
은근한 물음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딱히 무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에 바라는 것을 물어도 연이어 곤란하기만 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두 번 물은 것에 더하면 이번이 세 번째 권유라 마냥 사양만 하는 것도 영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곤란하던 중 윤휴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익살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명이나 청 그리고 왜에서 오지 않은 사람을 아십니까?”
“응?”
“그런 사람이 있다면 소개나 해주시죠.”
“어허, 자네 말이야.”
턱없는 말에 윤선거는 눈살을 찌푸렸다.
명도 아니고 청도 아니고 왜에서 오지도 않은 이라니, 그런 이가 조선에 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안남이나 섬라 혹은 유구국 사람 정도이나 그들 역시 조선에 발걸음하지 않은 지 오래였기에 윤휴의 말은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적어도 윤선거는 그리 믿었으나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명도 청도 아니고 왜도 아니다? 가만있자,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인데?”
“예?”
“어라? 진짜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그런 건 생각지도 않은 윤선거는 물론이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물었던 윤휴 역시 크게 당황했다.
이들의 이런 반응 속에서 송시열은 기억을 더듬어서 제가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살폈다.
이윽고 송시열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훈련도감이군. 거기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네. 어디서 왔는지 몰라서 명나라에 보내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명과 청이 전쟁으로 혼란스러워서 가지 못한 외국인이 있었어.”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누굽니까?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날 듯 보이는 윤선거와 달리 윤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모습에 괜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가 싶었으나 이왕 꺼낸 이야기를 없는 일이라고 잡아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여 잠시 주저하던 송시열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훈련도감에 그런 이가 있네. 원하면 찾아가서 볼텐가? 내 병졸 가운데 아는 사람이 좀 있으니 소개장을 써주지.”
“부탁드립니다!”
윤휴의 기운찬 말에 송시열은 문득 자신 역시 한번 가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상과 대면하여 답을 들려드릴 정도는 되지 않았다 여기나 여차피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연명소의 형태로 말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지금 여기 있는 세 사람이 논한 것을 조정에 올리면 어찌 반응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 같이 가는 게 더 좋겠군. 며칠만 기다리게. 이번 공납에 도우는 일만 마치고 나면 같이 올라가자고.”
“하이고.”
“왜 그러나?”
“이거 저도 꼼짝없이 따라가는 흐름이지 않습니까.”
앓는소리를 내는 윤선거에게 물으니 그는 울상이 되어 대답했다.
그에 송시열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자네는 돌아가겠네? 말리진 않겠네. 강요도 안 해.”
“저기 희중이 녀석 얼굴이 보고서 다시 말씀해보시겠습니까?”
손가락으로 윤휴를 가리키며 말하니 송시열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게 무슨 얼굴이냐?”
“길보 형이 떠나가지 못하게 간청하는 얼굴이지요.”
다 큰 사내의 고양이와 같은 눈망울이라니, 우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윤선거는 그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희중, 좀 봐주게.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한단 말이네.”
“한양에서 춘부장과 자당께서 보양할 거리라도 사서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에휴.”
윤휴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말하니 결국 먼저 두 손을 든 것은 윤선거였다.
“서신이라도 보내게 붓과 종이 좀 빌려주십쇼.”
“그거야 얼마든지. 희중, 자네도 연락 정도는 하고 올라가는 게 좋겠어.”
“그야 당연하지요.”
그렇게 유학자 세 사람의 한양행이 결정되었다.
***
“후우.”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내의 용모는 범상치 않았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건장한 사내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조선에 표류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은 벨테브레이였다.
또르르륵
잔 셋에 술이 따른 그는 천천히 잔을 하나 들고 중얼거렸다.
“히아베르츠, 피에테르츠, 역시 고향의 술은 무리였던 모양이야.”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읊조리며 벨테브레이는 우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슬픈 일은 그들을 추억하려고 해도 벌써 떠올리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와 함께 이곳 조선으로 표류한 동포들은 지난 전쟁에서 죽었다. 싸운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본래 고국 네덜란드라면 받지 못할 대우를 이 나라에서 받으니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살피시겠지.”
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이 외로움과 우울함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면 종종 셋이며 모여서 고국의 말로 떠들고 즐거워하며 시름을 덜었건만, 이제는 셋이 아니라 혼자이니 그도 쉽지 않았다.
“하아.”
“박 종사관님, 계십니까?”
“응?”
이미 해가 저물어가서 곧 어두컴컴하게 될 때가 머지않았는데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생각하던 벨테브레이는 훈련도감에 있는 병졸 가운데 하나임을 기억하고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다른 분이 부르시나?”
“아이고, 그건 아닙니다. 종사관님 앞으로 서신이 와서 전해드리려고요.”
“서신?”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친한 이들의 육신은 이미 땅에 묻혔고 영혼은 하늘의 부름을 받았으니 서신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을 제하고 나면 벨테브레이와 안면이라도 있다 할 이들은 모두 한양에 있었다.
‘아니, 그 섬에도 있긴 하겠네.’
조선에 처음 당도했을 때 마실 것을 구하려고 상륙했던 섬 제주도를 떠올리니 벨테브레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어휴.’
빌린 중국 상선에서 반란이 일어나 버려진 일도 그렇고 식인한다고 들었던 이들이 다가와서 펑펑 울었던 일도 그렇고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애써 고개를 흔들며 아픈 기억을 지운 벨테브레이는 병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여깄습니다.”
서신을 받은 벨테브레이는 곧장 내용을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기세 좋게 서신을 펼친 것도 잠시, 그는 곧 당황하고 말았다.
아주 당연하게도, 서신은 그의 고국에서 쓰던 말로 쓰이지 않았다.
한문이 빽빽한 서신을 읽기란 그에게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얼추 10년은 조선에 있었기에 말이야 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한문으로 쓰여진 글을 읽는 것은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는 수준은 면했으나 그에 그치니 읽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는 서신을 읽기 위해 골머리를 싸맬 필요가 없었다.
“오.”
당황하는 마음에 서신을 문지르니 서신이 둘임을 알리듯이 다른 종이가 보였다.
‘같은 내용으로 2장, 일 처리가 꼼꼼한 사람이군.’
한문으로 한 장, 언문으로 한 장해서 혹여라도 그가 읽지 못하면 누구에게 부탁해서라도 읽기를 바란 듯이 서신은 두 장이었다.
여전히 어려운 한문을 읽기보다는 쉬이 쓰는 언문을 읽기로 정한 그는 편지를 살폈고, 이내에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는 이만 가도 될까요?”
“응?”
내용을 읽고 잠시 생각하던 중 서신을 전하러 왔던 병졸이 물으니 벨테브레이는 그제야 그가 아직도 있음을 깨닫고 고래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이만 가봐도 돼.”
“예.”
병졸을 보내고 나니 계절이 이제 쌀쌀해져 간다는 걸 알리듯이 서늘한 바람이 그를 휘감았다.
“으흐, 춥구나.”
굳이 바깥에서 고민할 이유가 없었던 벨테브레이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훈훈한 방안 온기를 느끼며 잠시 즐거워한 벨테브레이는 다시 편지를 들었다.
“내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 곧 방문하겠다?”
벨테브레이는 편지 내용을 요약해 중얼거리니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들뜸과 그리움이 동시에 솟는 걸 느꼈다.
“그래, 나쁘진 않지.”
누가 되었건 이런 이야기를 할 대상이 있다면 한결 기분이 나아지리라 생각한 벨테브레이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마시려다 만 술잔을 집어 들었다.
어쩐지 오늘은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거 같았다.
- 작가의말
[첨언-벨테브레이, 박연]
조선 시대 귀화인으로 잘 알려진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남게 된 계기는 당시 본래 탔던 배와 합류하기 위해 빌린 중국 상선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마침 마실 게 떨어져서 제주도에 동료 두 사람과 내렸을 때 일어나 이들은 그대로 버려졌고, 그대로 잡혀서 한양으로 이송됩니다.
이때의 일화로 당시 네덜란드인들 사이에는 조선(고려)인이 식인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사람들을 오는 걸 보고 겁먹어 울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명에 물었으나 명은 당시 청과의 분쟁으로 정신이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다시 일본에 물으니 당시 일본은 이들이 절리지단, 카톨릭이라는 명목으로 거절했습니다.
결국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이들을 조선은 훈련도감으로 보내 화포 제작과 다루는 기술 그리고 전술 훈련에 써먹게 되었고, 이들은 병자호란 당시에도 훈련도감 소속으로 참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벨테브레이를 제외한 두 사람은 병자호란 당시 전사하나 벨테브레이는 살아남아서 이후 현종 시절에 하멜이 표류해올 때까지 70세가 넘도록 장수합니다.
[후원 감사]
kkatnip님,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후원하신 기대에 응해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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