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 49 ] Complementarity 보완적인 관계 - 21
.S01_Chapter 02. [ Elongation of Transcription ] 전사의 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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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 49 ] Complementarity 보완적인 관계 - 21
한혁의 제시한 게릴라전은 사실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저들의 전력을 한곳으로 모으지 못하게 하고,
소수인 전력을 차근차근 잡아먹는다는,
게릴라전의 정석과도 같은 전략.
우선 시작은 통로가 이어진 주방이었고, 주방을 전진 기지로 삼아,
방어에 중점을 둔다.
주방을 기점으로 거실까지 탈환하면, 1차 중간 목표 달성.
그리고 출입구까지 탈환하는 것을 2차 중간 목표로 설정했다.
그중 남윤호를 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
우선 주방은 어쩔 수 없이 힘으로 깨야 한다는 것이 리스크였다.
만약 주방을 확보하기도 전에 저들의 지원이 이뤄진다면,
싸움은 결국 별장을 내주기 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흐를 것이었고,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비상 구멍만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었다.
따라서 주방의 확보는 시간 싸움.
최대한 빨리 주방 내의 적들을 제거하고 방어 라인은 구축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리고 일단 주방을 확보하면, 남윤호가 사용하던 천장 공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래도 가능한 범위에서 조용히 주방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일 것이었다.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면서 열린 비상 구멍 덕에 잔뜩 긴장해 버렸다.
비상 구멍을 가려놓았던 냉동고도 무겁고 커서 움직이려면
소음이 생길 것이 분명했음을 알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았다.
생각에는, 아니 성질 같아서는 소리가 나든, 말든
냉장고를 전방 공간으로 밀어 버리고 빠르게 주방으로 진입하고 싶었지만,
어찌 되었건 비상 구멍의 노출 가능성을 줄이는 게 훨씬 더 좋은 전략이 맞았다.
어떻게든 머리를 조금이라도 더 내밀어서 냉장고 아래를 보았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냉장고 바닥, 그래도 튼튼한 부분을 이용해서 조금씩, 조금씩
최대한 소음이 안 나도록 전방으로 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냉장고를 밀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
냉장고의 뒷면이 나오면 더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슬쩍 보니 뒷면에 손이 닿으려면,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더 밀어 보려고 힘을 주는 순간, 갑자기 주방 전체에 조명이 켜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은 분당 150회는 뛰는 것 같았다.
손가락도 그대로 멈춰라.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그렇게 신경 쓰일 수 없었다.
마치 뭔가 하면 안 되는 일을 몰래 하다가 들키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심지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의 인내의 끝이 어디인지 시험해볼 요량인지,
저놈은 냉장고를 열어보면서 다녔다.
무의식적으로 쫌 나가라는 텔레파시를 보낼 뻔했던 것을 간신히 그만두었다.
하나씩 냉장고를 다 열어 본 놈이 나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만큼이 나에게는 일 년의 시간 같았다.
냉장고를 밀어내고 주방으로 올라와서 다시 비상 구멍을 가려두었다.
한혁의 작전 중 지금 부터가 가장 중요했다.
주방을 거점화하고, 거실을 탈환하는 1단계.
거점화는 한혁 자신이 하겠다고 하도 큰소리를 쳐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뭘 어떻게 해 놓겠다는 건지.
한혁과 한인철이 주방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천유리와는 이미 말을 맞춰 놓은 상태여서,
환풍구를 통해 바로 천장 위로 올라갔다.
젠장.
천장 안쪽은 통로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망이었다.
남윤호의 시선으로 봤던 모습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쪽은 엘리베이터를 망가뜨리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결국 천유리와 양쪽으로 흩어져서 거실로 접근하려던 계획은 불가능해졌다.
천장 위로 주방 건너편 이서연의 방으로 먼저 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좌측의 천유리의 방을 지나 한혁의 방에서 양쪽으로 갈라져서,
나는 내 방을 지나 박 실장의 개인실을 통해 거실로,
천유리는 한혁의 방을 통해 바로 거실로 가기로 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주방을 지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복도의 환풍구에서 내려다본 복도에는 정장들이 주저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상당했다. 별장 자체가 옛날 건물이라
천장 위 공간이 낮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장을 받치는 프레임이 낡았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간신히 조금이라도 더 튼튼히 보이는 곳을 밟으면서 나아가고 있었지만,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나면 그대로 멈춰라가 저절로 되었다.
별일이 없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1분이나 걸렸을까?
천유리와 눈을 맞추면서 조심스럽게 기어서 복도를 지났다.
이서연의 방을 환풍구를 통해 보면서 답답함이 더해졌다.
복도에는 그래도 정장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는데, 방에는 더 많아 보였다.
아닌가? 모여 있어서 그렇게 보이나?
그래도 다섯 명은 넘었다.
천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천유리의 방으로 향했다.
천장 위를 기는 것도 단순 작업이었던가?
생각보다 금세 익숙해지면서 쭉쭉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천유리의 방에도 다섯 명이 있었다.
그때 저들의 무전을 얼핏 들었는데,
연구소 앞 폐쇄 장갑은 뚫거나 때리는 것으로는 안 되겠다며,
플라즈마 절단기를 공수해야 한다고 했다.
이훈정의 말대로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플라즈마 절단기를 근처에서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결국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 두껍고 무거운 폐쇄 장갑을 잘라낼 정도의 성능을 가진 것이 있겠는가?
분명 서울까지 다녀와야 한다는 말이었고,
단순히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장비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최소 대여섯 시간은 넘게 걸릴 수 있다는 단순 계산이 나왔다.
천유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씩 웃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내 속을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자신의 이능을 나에게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닌가?
내가 둔해서 모르는 건가?
어쩌면 내가 독심(讀心, Mind reading)으로 상대를 어렴풋하게라도 읽어 내듯,
그녀도 ‘공명(共鳴, Resonance)’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가능한 다른 뭔가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미소는 예뼜지만,
음흉한 나는 내 시커먼 속을 들켜버린 것만 같은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에라! 그녀가 알든 말든!
한혁의 방에서 헤어져서,
천유리는 내가 보내는 신호를 기다리면서 거실로의 진입을 기다리기로 했고,
나는 내가 쓰던 방의 천장으로 갔다.
내 방에도 다섯 명이 있었다.
내가 방에서 쉬고, 씻는 것 말고 아무것도 안 해서
중요하다거나 귀중한 뭔가가 있지도 않았다.
그냥 내 방이었으니까, 신경이 쓰였던 것뿐.
빠르게 박 실장의 개인실로 넘어갔다.
박 실장의 개인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똑같이 생긴 방이라 있어 봤자 정장들이 쉬고 있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아무도 없을 줄은 몰랐다.
혹시 그 옆방에 모여들 있나?
그 옆방에는 군사지도만큼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가 있었다.
박 실장이 불러서 한혁과 함께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박 실장의 개인실로 내려가지 않고, 마음에 옆방으로 이동했다.
헉! 저자는?
저놈들이?
이 방에 안 와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오 회장, 천영성, 최성록!
죄다 거기 있었다!
블러드라인이 셋이나?
천유리랑 둘이 들어갔으면, 살아나올 수 있으려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오 회장이 이곳에 있다는 말은 진심이라는 뜻이고,
끝을 보기 위한 장소로서 이곳을 택했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저들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도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최성록 하나도 무서운데, 블러드라인 셋을 동시에 상대 한다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장점도 있었다.
저들의 대화가 아주 잘 들리는 것.
천영성이 플라즈마 절단기 공수 문제로 떠나기로 했다고?
오 회장은 짜증이 제대로 났구만.
이훈정이 엘리베이터 룸을 무너뜨리는 전략이 아주 잘 먹힌 것 같았다.
움직일 때 보니까, 최성록의 걸음걸이가 좀 이상했는데,
허리를 꾸부정하게 수그린 채, 느릿느릿, 그리고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오 회장은 의례 짜증 가득한 말투로 늙은이한테 얻어맞은 게
재생도 잘 안 되느냐고 최성록에게 소리를 질렀다.
최성록은 그 늙은이가 바로 한혁이며, 현존 최강자라고 하며,
못 믿겠으면, 다음에는 오 회장더러 직접 상대하라고 했다.
오 회장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고는 팔장을 꼈다.
일단 천유리에게, 그리고 일행에게
저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천유리에게 텔레파시를 전해보려고 해봤으나, 잘 되지 않았다.
거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결국 저들의 감각에 들키지 않고,
천유리의 근처까지 움직여야 한다는 지랄 맞은 결론.
정말 초당 1mm씩 움직인 것 같았다.
아무도 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나는 그저 공기에 불과하다는 자기 암시를 초당 열 번씩은 했던 것 같았다.
정신적인 피로가 너무 심했다.
심력을 소모한 것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급했다.
간신히 내 방 천장 위에 도착해서 천유리에게 텔레파시를 전해 보았는데,
천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공명을 시전했다.
그녀에게 박 실장의 개인실 옆방에 누가 있었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를 동영상 재생하듯 전해줬다.
천유리의 당황한 감정이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천장 위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나오는데,
내가 그 아래서 듣고 있는 것 같은 공간감으로 천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빠르니까 주방에 다녀오겠다고.
속으로 그녀를 배웅하고, 기약 없는 대기에 들어갔다.
내가 엎드려 있는 위치는 내 방과 복도, 거실을 직접 볼 수 있고,
박 실장의 개인실은 조금만 움직이면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것도, 너무 느리게만 가는 시간도 다 힘들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그 시간이 의미가 있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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