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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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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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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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DUMMY

“흐어억!”

여인의 혼이 괴성을 질렀다.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과 인간세에서의 모습이 두 겹으로 겹쳐 보였다.


혼을 달래려고 손을 뻗는데, 그와 동시에 한얼의 지팡이가 빛을 뿜었다.


파지직 푸른 불꽃이 튀더니 혼은 저 멀리 나뒹굴었다. 혼은 바닥에 웅크리고 낑낑거렸다.


지팡이 솔찬은 그냥 지팡이가 아니었다. 불꽃의 검이며, 주인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혼이 움직이지 않자 지팡이 끝의 푸른 불꽃도 하얗게 사그라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웅크린 혼에게 다가가며 한얼을 막아섰다.


“중천의 혼은 모두 못다 한 말이 있습니다. 거기 신경 쓰면 닷새 안에 못 돌아갑니다.”

한얼의 말투는 냉정했다.


아날빛숨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다정하고 온화했는데, 혼을 대할 때는 전혀 달랐다.

예전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달라지지? 구석에 서서 얼굴도 못 들었는데.’

나와 다른 세상에 속한 존재 같았다.


그래도 할 일을 해야지. 나는 여인의 팔을 잡았다.


마음숲의 혼은 몸이 있지만, 중천의 혼은 진짜 몸이 아니었다. 혼이 가진 허상이라 잡는 순간 물컹거렸다.


여인이 메마른 눈으로 울먹였다.

“보내주세요.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못 했어요.”


여인이 내 소매를 잡고 흐느꼈다.

“죽도록 일만 했어요. 진짜 죽는 줄도 모르고···. 눈치만 보다가···.”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손과 작고 통통한 손이 두 겹이 되어 흔들렸다.

“나도 꿈이 있었어요. 여행가가 되고 싶었는데···.”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은 어리지만 우아한 여인이었다.

인간세에서 가져온 얼굴은 굴곡이 깊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꼬리가 올라가 화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허상이라도 위로가 될 것이다.

“이제 괜찮아요. 여기서는 당신의 진짜 모습을 찾을 수 있어요.”


혼빛과 사람의 모습이 다르니 인간세의 삶이 고단할 수밖에. 혼에 어울리지 않는 몸에 갇혀 사니 감옥이나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인간세가 영천옥보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삶이 지옥이라고 하는 걸까.


여인의 혼을 다독이며 돌아보니 어둠 속에 많은 혼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바위나 돌멩이가 된 듯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한얼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가까이 귀물씨앗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는 밧줄 다술을 풀어 채찍처럼 손에 쥐었다.

밧줄은 원래 혼을 이끄는 길잡이지만, 지금은 지팡이 솔찬처럼 인도자의 무기가 되었다.


혼들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바위틈에서 쉬익 숨을 삼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게 기대앉은 여인도 벌벌 떨었다.

“비뢰수, 비뢰수예요. 혼을 잡아먹는 괴물이라고요!”


‘비뢰수? 그런 건 못 들었는데?’

정말 괴물이라면 훼 대차사가 경고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차사들이 처리했겠지.


‘차사도 모르는 괴물이 있다고?’

귀물씨앗은 들어봤지만, 정말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이거 무슨 일이야?’


땅바닥이 우르르 떨렸다.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따라 마른 흙이 풀풀 일어났다. 자갈이 튀어 올랐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저점 가까이 다가왔다.


천인들의 집채만 한 검은 바위가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와 몸의 털은 검붉은 빛으로 이글거렸다. 눈동자도 붉게 타올랐다.


“크아앙!”

이빨을 드러내고 고함을 지르자 새맘계곡의 메아리가 빠르게 소리를 날랐다. 천둥 치는 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한 마리가 아닙니다. 두···, 아니 네 마리입니다.”

한얼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손에는 밧줄을 움켜쥐었다.


나는 여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다른 혼 사이로 끼어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도 한얼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바위는 무엇을 찾는지 붉은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저리 냄새를 맡았다.


맨 뒤에 있던 괴물이 크흡 소리를 냈다.

바위틈에 숨은 혼을 발견한 것이다. 절벽 사이 구멍에 코를 들이밀고 바람을 빨아들였다.


“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혼 하나가 괴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날카로운 비명은 꾸르륵 소리와 섞여 작아지더니 마침내 들리지 않았다.


“뭐죠? 저것들은?”

“저도 처음 봅니다.”

한얼은 비뢰수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앞을 노려보았다.


“차사도 모를 겁니다. 중천은 생각보다 넓거든요. 차사들은 오래 있지도 못하니 그 틈을 이용해 숨을 겁니다.”

그의 지팡이 솔찬이 서서히 빛을 끌어모았다.


“귀물씨앗이라고요?”

“예. 귀물씨앗을 삼켰을 겁니다. 여기까지 씨앗을 뿌리다니···. 반계 놈들.”

한울은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순간,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비뢰수가 귀물씨앗을 먹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차사가 모를 정도라면···,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을 거야.


“그런데 왜 혼을 먹죠?”

“피천귀와 같다면 욕망을 먹을 겁니다. 집착과 탐욕을 여기까지 가져오니까요. 중천에 왔으니 미련과 후회가 되겠죠.”


‘그럼 잡아먹힌 혼은 어떻게 되지?’

묻지도 않았는데 답이 바로 나왔다.


괴물이 꾸웨엑 소리를 내자 뿌연 가루가 콧구멍을 통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혼이 소멸한 것이다.


혼은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바닥으로 사그라들었다.


나는 희뿌연 가루가 완전히 흩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시큰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중천이 황폐해진 것은 사람의 독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련과 후회에서 나오는 어두운 기운에, 귀물씨앗이 더해진 탓이다.


혼이 소멸하며 흩뿌려진 가루가 다른 혼의 슬픔을 자극했다. 바위틈에서 신음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귀물씨앗, 비뢰수, 사람의 독기, 소멸한 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놔둘 수 없어. 중천을 되돌릴 방법이 있을 거야.’

어딘가 해답이 있을 것이다.


가물거리는 생각을 잡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는데 한얼이 소리쳤다.

“피하십시오. 제가 맡겠습니다.”


한얼이 지팡이와 밧줄에 기합을 넣었다.

불꽃이 일어난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에 실려 나도 길 끝으로 날아갔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바위산 같은 괴물 네 마리를 혼자 상대한다고?

‘혼자서는 무리야. 도와야 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막대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렸다. 뭐라도 좋으니 빨리!


지팡이 솔찬이 빛을 번쩍이며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허공에서 불을 뿜으며 빙빙 돌았다.


휘도는 속도가 빨라지자 바닥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거대한 벽이 되어 한얼과 네 마리의 비뢰수를 감쌌다.


회오리 속에서 비뢰수들이 콧김을 뿜으며 씩씩거렸다. 서로 몸을 부딪치며 발을 구르자 먼지가 일어나고 땅이 울렸다.


회오리에 흙먼지가 더해져 안이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눈으로 들어와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먼지와 회오리 틈으로 언뜻 한얼이 보였다.

밧줄 다술이 쭉 늘어났다. 맨 뒤의 비뢰수를 향해 날아갔다. 뒷다리를 감싸 잡아당기니 괴물이 비틀거렸다.


한 마리가 쓰러지자 다른 세 마리가 꽤액 소리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맨 앞의 비뢰수가 한얼을 향해 달려들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송곳니를 번쩍이며 뛰어올랐다.


한얼은 양손을 펼쳐 대기의 힘을 끌어모았다. 중천의 기운이 뭉클거리며 그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흙먼지 회오리 속에서도 그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기운이 또렷이 보였다.


“이얍!”

한얼이 기합을 주자 빛의 기운이 비뢰수들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날선 기운은 회오리 장벽을 뚫고 계곡 아래 반김길을 덮어버렸다. 비명이 들렸고, 괴물이 쓰러지는 충격에 땅이 울렸다.


내가 서 있는 곳까지 후끈한 바람이 덮쳐왔다.

흙먼지를 피해 재빨리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돌멩이가 살갗을 찢으며 날아갔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꺼풀 안쪽 허공에 작은 비뢰수들이 보였다. 네 마리 비뢰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송아지만 한 크기에 머리는 말과 나귀를 닮았다. 그들은 커다란 눈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계곡을 두리번거렸다.


‘환상인가?’

환상이든 꿈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할 일을 알려주었으니.

“살려야 해! 저 비뢰수들!”


나는 벌떡 일어나 한얼에게 뛰어갔다.

“죽이지 말아요. 바꿀 수 있어요!”


한얼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한 번이면 끝납니다. 혼을 소멸시키는 괴물입니다. 살려두면 안 됩니다.”


비뢰수들은 피를 흘리며 바둥거리고 있었다.

‘한 번에 네 마리를 쓰러뜨린 거야?’


그는 내가 알던 한얼이 아니라 소문 속의 한얼이었다.

북방흑천에서 온 다훤의 제자, 천사직과 인도자를 함께 맡을 수 있는 중간자.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아니에요. 이 아이들은 방법을 모르는 거예요.”


나는 떨리는 가슴을 달래며 비뢰수 앞을 막아섰다.

“귀물은 사람의 상상에 따라 달라져요. 혼이 상상하는 대로 모습이 바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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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3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9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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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44 2 12쪽
»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45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9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8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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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71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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