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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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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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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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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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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알 수 없는 일들

DUMMY

해담 대차사가 손을 들어 허공을 쓸자, 눈앞에 드넓은 대명천이 펼쳐졌다.


마음숲은 대명천의 동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음숲에서 나가 북쪽으로 오르면 한긋장벽과 대기곡이 맞닿아 있었다. 대기곡 아래를 흐르는 회람강은 대명천 곳곳을 돌고 도는 넓은 강이었다.


대명천에서 천인들이 사는 곳은 네 군데인데, 모두 산과 강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염라부 영천옥에서 들어오면 한긋장벽까지 곧게 뻗은 길로 내려온다. 그 길은 영진촌을 지나는데, 영진촌에 인도자들의 숙소가 있었다.


사람의 혼은 영천옥과 대명천 경계에서 두루천으로 곧바로 옮겨지므로 대명천을 보지 못한다.


해담이 손짓하자 허공에 떠오른 풍경이 서서히 움직였다.

서쪽 궁혈산에서 동쪽 동철산까지, 북쪽 금정산에서 남쪽 소하산에서 천천히 지나갔다.


검붉은 흙으로 이루어진 붉은 바다는 타오를 듯 이글거렸고, 대명천을 둘러싼 한긋장벽은 희고 검은 뭉게구름이 꿈틀거렸다.


해담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한긋장벽 위의 결계가 더 크게, 더 가까이 보였다.

“천기공은 대명천에 꼭 필요하지. 숨이 통하는 구멍이니. 허나, 이곳으로 귀물씨앗이 들어온다는구나.”


“반계에서 뿌린 겁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삼도천을 건너는 혼에 묻어올 수도 있고.”


해담은 대명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중천에서 들은 소식이 마음에 걸렸다.


훼 대차사가 몹시 기뻐했다.

‘사빈과 한얼이 중천에 다녀간 다음부터 기운이 달라. 미미하기는 해도 무언가 바뀌었더라고. 중간자라서 그런지 확실히 차사들과는 달라.’


중천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얼에게 물어봤지만, 별일 없었다고 했다. 사빈이 찾는 혼을 못 찾았다는 대답뿐이었다.


‘마고가 다녀가서인가, 중간자가 다녀가서인가? 뭔가 일이 있었을 텐데···.’


허공에는 마음숲을 둘러싼 한긋장벽이 떠 있었다. 투명한 풍경이 동쪽으로 움직였다.

해담은 생각을 멈추고 대명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동방청천, 대명천 그리고 반계와의 경계인 해날품곡, 세 곳이 모이는 곳에 숲센장벽이 있었다.

“숲센장벽과 빙천골도 둘러봐라. 여기서도 마음숲으로 이어지니.”


“빙천골은 제가 수련한 곳 압니다. 저기서는 마음숲으로 들어오는 길이 없습니다.”

백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어린 시절, 스승 엄장을 만나 수련한 곳이 바로 빙천골 능금원이었다.

숲센장벽의 서쪽 끝자락이라 중앙황천이라고도, 동방청천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골짜기이지만, 엄장의 천력으로 능금원은 언제나 봄이었다. 수련을 위해 마련된 곳인 듯 공기도, 빛도, 바람도 시원하고 맑았다.


무엇보다 피천귀들이 가까이 오지 못했다.

반계가 불천수까지 넘어왔음에도 빙천골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피천귀뿐만 아니라 천인들도 여간해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랬지. 엄장님이 살아있을 때는.”

해담이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엄장을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에 눈꼬리가 내려갔다.


“엄장님이 무결의 고리에 들고, 네가 대명천으로 옮긴 다음에는 달라졌을 게다.”

“예. 빠짐없이 살펴보겠습니다.”


해담은 말없이 백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백하는 어린아이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 이어 자신의 품에도 안겼던 아이.

그런 아이가 어느새 장성하여 지금은 빙천술의 대가이며 상산대감이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능금원에는 가보지 못했겠구나.”

“예. 그곳에서 나온 이후에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유품도 별로 없겠지.”

“원래 물건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으니까요.”

백하도 스승 엄장을 생각하자 마음이 쓰라렸다.


“불천수 전투가 끝나고 오랫동안 널 찾아다녔다. 그분과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해담이 어깨를 구부려 탁자에 팔을 얹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널 못 찾은 건 지금의 네가 되기 위한 준비였다고.”


*


불천수 전투가 시작될 때, 피천귀들의 공격으로 많은 천인이 목숨을 잃었다. 황금들의 첫끝마을에 살던 백하의 부모도 소멸하고, 어린 백하는 혼자 남겨졌다.


차사와 피천귀가 부딪치는 힘이 대기를 흔들고 땅을 울렸다. 피 냄새가 섞인 바람도 미친 듯 휘돌았다.


백하는 아직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너진 집과 무결의 고리에 들지 못하고 죽어간 천인들, 그 속에 누워있던 부모님의 모습.


폐허가 된 마을에서 울고 있을 때 한 소녀가 다가왔는데, 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곳에 천인 엄장이 있었다.


첫 번째 대혼란인 숨가림 시기에 태어나 두 번째 대혼란 미틈오름까지 지나온 전설 같은 천인이었다.

다섯 신제를 제외하고 엄장 만큼 오랫동안 천계를 지킨 천인이 없었다.


엄장이 어린 백하를 내려다보았다.

‘널 보려고 이때까지 기다렸나 보다. 가자, 너에게 빙천술을 넘겨줄 테니.’


*


해담은 탁자 모서리를 붙잡고 어깨를 세웠다.

“과거에 붙잡혀 있지 마라. 아무리 애태워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그는 백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앞일을 알 수 없으니 더더욱 힘을 모아야지. 산을 없애지는 못해도 넘을 수는 있으니까.”


“예.”

백하가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반계에 비하면 천계는 약점이 많다. 알고 있느냐?”

“예. 천인의 숫자도 부족하고, 새로 태어나는 천인도 드뭅니다. 하지만 피천귀는 사람에게서 비롯되니 끊임없이 생겨나고, 힘을 빨리 키웁니다.”


“그래.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진 신제들은 싸움에 나설 수가 없으니···.”

해담은 탁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중앙황제 현원을 비롯하여 반계의 남북양존까지 다섯 명의 신제들은 세상을 지탱할 강한 힘을 가졌다.

그것은 각각의 성천이 존재하는 근원이며, 지키는 원동력이지 부딪치는 힘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누구라도 싸움에 나선다면 이쪽 차원은 숨 고를 사이도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하지만 마백북존과 이안남존은 피천귀에게 힘을 나눠주지 않습니까. 인간세를 혼란에 빠뜨려 손에 쥐려는 겁니다. 그들은 신제의 힘을 쓰지 않습니까?”


해담은 한요재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백하에게 눈길을 돌렸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네. 수리마루 정명님만이 아시겠지.”


“천계를 배신한 자들입니다. 신제라는 위치가 부끄러울 겁니다.”

백하가 씩씩거리자 해담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쉽게 분노에 먹히니 사빈이 어려워하는 게야. 널 무서워하지 않더냐? 하하.”

해담은 껄껄 웃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너도 알지 않느냐? 이안남존 이루가 얼마나 막강한 신제인지.”

해담의 물음에 백하는 머뭇거렸다.


안다고 해도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백하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녀는 동방청제가 아니라 이안남존이었으니까.


“세상이 태어날 때 태초의 알이 세 개 있었다. 생명의 알 두 개와 천사의 알 하나.”


하나의 생명의 알에서 중앙황제 현원과 서방백제 영랑, 남방홍제 마눙이 함께 나왔다. 그리고 다른 생명의 알에서 동방청제 이루가 태어났다.


그것은 그녀의 힘이 세 신제의 힘을 합친 것과 같다는 뜻이었다. 두 번이나 대혼란을 겪는 동안에도 이루의 신력이 없었다면 천선계는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마눙의 힘도 마찬가지야. 시실루만 봐도 알 수 있지.”

목이 말라 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해담은 차를 한 잔 따랐다.


천계의 감옥, 시실루에 대해서는 백하도 알고 있었다.

마눙이 시실루를 만들 수 있던 것은 그가 남방홍천이기 때문이었다.


남방홍천에서는 별을 만들고, 재생시키는 일을 하지만, 시간의 겹도 관리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이루는 시간의 층이 흐트러지면 엄청난 환란을 겪기에 남방홍제의 역할이 중요했다.


시실루에서는 괴로운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영천옥보다 참기 힘든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

여기서는 스스로 나와야 하고, 나오는 방법도 혼자 찾아내야 하지만, 아직 나온 이가 없어서 정확히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계에는 세 개의 감옥이 있었다.

설화옥은 중앙황제, 북방흑제, 서방백제가 힘을 모아 만든 곳으로 회향미곡 아래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루가 만든 암연층이었다.

동방청제의 신력으로 만들어져 공간을 아우른다. 현재의 많은 겹과 결이 얽혀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곳은 어둠의 심연으로, 바람도 소리도 닿지 않는 바닥이었다. 어디든 나타나고 어디에도 없는 감옥이었다.


암연층은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 누군가 자신을 희생해 빼내 주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동방청제였던 까닭에 이루는 지금도 현재의 덫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다.


“남북양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겠나? 설화옥을 그저 얼음 동굴이라 부를 정도이니.”

해담이 긴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백하는 대부를 위해 차를 따랐다.

문제는 암연층과 시실루가 아니라 그 힘이 여전히 그들에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층과 현재의 겹을 다루는 힘은 태우님과 금천님께 넘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들은 아직 신제에 오르지 못했어.”


“즉위식을 안 해서입니까?”

백하는 상산대원들이 전해준 소문을 옮겼다.


“허허, 즉위식?”

해담이 피식 웃었다.

“그건 겉치레지. 신제의 힘이 넘어오지 않았으니 즉위식을 해도 소용없네.”


해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 자신들의 신제가 돌아오기를. 아니,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지.”


‘그러니 위사들이 금천을 대리자로 세웠지.’

해담은 차마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남방홍천의 위사들은 일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자리에 앉는 것을 싫어했다.

마눙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으니 구태여 새로운 홍제를 찾으려 애쓸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대위사들 중에서 가장 여리고 힘없는 금천이 대리자가 된 것이다.


동방청천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태우는 여전히 여덟 대능사 중의 하나였다. 대능사 회의를 이끄는 의장이니 임시로 대리자를 맡은 것뿐이다.


그래서 남방홍천에서는 새로운 별이 태어나지 않고, 동방청천에서는 신물이 태어나지 않는다. 오색의 용과 천마, 기린 같은 신물의 수도 많이 줄었다.


얼마 전에도 기린 홍월이 난산으로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태어난 아이도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큰 아이인 기린은 정상이지만, 천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데 여전히 작고 비실거렸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아. 왜 반계가 생겼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럼에도···, 자네와 난, 대명천을 지켜야 하네. 소멸하는 한이 있어도.”

해담이 주먹에 힘을 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대부님. 마지막까지 대명천과 마음숲을 지키겠습니다.”

백하가 일어서서 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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