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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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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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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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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6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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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다른 곳 같은 뜻

DUMMY

삼도천 바닷가는 소란스러우면서 고요했다.


중천으로 들어가는 길은 고함과 비명, 한숨으로 시끄럽지만 마음숲에서 나가는 길은 늘 조용했다.

드나드는 숫자는 비슷하나 인간세로 나가는 혼은 한 걸음 한 걸음 말없이 조심스러웠다.


한얼은 며칠째 삼도천 바닷가를 살피고 다녔다.

드넓은 바다 위에 멈춰서서 떠다니는 덩어리를 살펴보았다.


‘쓸만한 것이 없군.’

그는 혼 찌꺼기를 찾고 있었다.


혼이 삼도천을 건너다 멈칫거리면 미세하게 사념이 떨어지는데 이것이 부유물처럼 엉겨 붙는다.

발을 헛디디거나 허우적대기에 혼 찌꺼기는 많지만, 한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천계와 인간세 어디든 다닐 수 있고, 사빈님을 도울 능력도 담아야 해. 그믐 외출에 따라다니려면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안 되겠지.’

한얼은 바다 위 허공에 떠서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팡이 솔찬와 밧줄 다술도 그의 주변에서 바다 위를 훑었다.

덩어리가 보이면 가서 두드기도 하고, 가장자리를 밀면서 덩어리의 힘을 가늠했다.


“여어, 한얼! 내려갈 때도 여기 있더니 아직도 여기인가?”

남색 두루마기를 입은 천사가 한얼에게 다가왔다.


“아주 여기서 지내나?”

“하하, 찾을 게 있어서요.”


“뭘 잃어버렸나?”

“혼 찌끼로 작은 동료를 만들려고요.”


“동료라···. 자네 대취와 산여와 한 조 아니었나? 다른 차사들은?”

천사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염라부에 갔습니다.”

“설마 자네 농땡이 부리나? 어허!”

으름장을 놓는 소리와는 다르게 천사는 환하게 웃었다.


“자네 정도의 천력이면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나?”

“마고님이 그믐마다 인간세에 나가는데 너무 위험해 보여서요. 중간자라서 그런지 매번 다쳐서 돌아옵니다.”


걱정하는 한얼과 달리 천사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다.


“날지도 못하고 무기도 없으니 도와주려고요.”

“하하하. 한얼, 그새 많이 바뀌었군. 죽어라 수련만 하던 한얼은 어디 갔나?”


“아니, 그게 저···.”

한얼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런 동료라면 성천의 신물이 좋지 않나? 중앙황천에는 해태가 있으니, 한 마리 데려오지.”

“저도 그 생각을 했는데요···.”

한얼이 바닷물을 내려다보았다.

발아래 짙푸른 삼도천이 소리 없이 파도를 일구었다.


다섯 성천마다 신물이 있기는 했다.

중앙황천의 해태, 북방흑천의 현무, 서방백천의 백호, 남방홍천의 주작, 동방청천의 청룡을 비롯해 각 성천마다 기린, 천마, 어룡 같은 여러 신물이 천인과 선인을 도우며 살고 있다.


성천에 속한 신물은 각자의 소임이 있어 함부로 인간세로 나갈 수 없었다.

타고난 힘이 모자란 경우에는 성천을 벗어나 스스로 주인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아직 그런 일은 없었다.


‘내 힘을 보내줄 수 있어야 해.’

한얼은 물끄러미 물비늘을 바라보았다.

성천의 신물은 저마다의 천력과 의지가 있으므로 그의 힘을 전달할 수 없다.


천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신물은 안 되겠구만. 그럼 불천수 가까이 가보게. 삼도천이 돌아 나오는 곳이니 죄다 거기 모인다네.”


“감사힙니다. 바로 불천수로 가봐야겠습니다.”

“잠깐! 설마 덩어리째 가져갈 건 아니지?”


“안됩니까?”

한얼이 눈을 깜빡이자 천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천사는 좀처럼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한얼은 문득 중천의 비뢰수가 생각났다.

비뢰수는 송아지나 망아지 모양이던데, 그보다 더 작아야 하나?


“혼 찌꺼기라도 자네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걸세. 잡념이 배어 모양을 잡기도 어려울 거고. 마고를 돕는다면···.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만들게.”


천사가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지켜준답시고 무시무시한 괴물로 만들지 말고.”


삼도천 건너에서 다른 천사들이 그를 불렀다. 천사가 한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자네가 이리 바뀌니 보기 좋네.”

천사는 휙 돌아서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한얼은 천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북방흑천에서 수련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천력을 키워 사빈의 곁에 당당히 서는 것.’


스승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사빈을 향한 마음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동녘뜰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빈은 그에게 하늘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비록 고개도 못 들고, 제대로 말도 못 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빈은 볼 때마다 잔뜩 움츠린 그를 위로해주었다.

‘괜찮아. 한얼은 한얼이니까. 다른 기회가 있을 거야.’


그녀는 온화하고, 다정해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예사달 할머니가 그러셨어. 이 세상에 중간자는 너랑 나뿐이라고. 우리는 선택받은 존재야.’


“불천수로 가자.”

한얼이 소리치자 지팡이와 밧줄이 휘리릭 날아 그의 손에 다다랐다.


*


상산대 이부 훈련장에서는 백하의 기합이 쩌렁쩌렁 울렸다.

서늘한 아침 기운에 얼음칼의 기운이 더해지니 훈련장의 공기는 서리가 내린 듯 얼어붙었다.


상산대 훈련장은 한요재에도 있지만, 그곳에서는 주로 대원들이 훈련했다. 백하는 모로매 온천 가까이 있는 이부 훈련장을 좋아했다.


빙천술의 위력이 너무 강해 혼알방 가까이에서는 제대로 수련하기 어려웠다. 여기서는 그의 기운을 호수 가운데까지 뻗어낼 수 있었다.


온천 숙소인 소상각과는 호숫가를 끼고 반대편이므로 다른 천인들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돌봄차사인 위화에게는 달랐다.


백하의 빙천술은 소리 없이 빠르게 상대를 제압하는데, 오늘은 얼음칼의 소리가 거칠고 불안했다.


경험 많은 위화에게 그 차이가 안 들릴 리 없었다. 그녀는 다른 차사들보다 훨씬 예민했고 작은 변화도 잘 알아차렸다.


위화는 천천히 날아서 훈련장 끝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 게야?”

그녀는 주름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백하를 바라보았다.


“위화님. 일어나셨어요?”

“뭔가 달라. 평소의 빙천술이 아니야. 뭔 걱정이 이리 많아?”

위화는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걱정은요. 그런 거 없는데요.”

“누굴 속이려고.”

위화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빙천술의 냉기에 몸을 떨다가 손가락을 따닥 부딪쳐 불씨를 피웠다. 불꽃의 장막이 그녀 주위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백하는 들고 있던 얼음칼을 공기 속으로 돌려보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위화님.”


“그래? 아, 사빈은 깨어났어? 아직 사흘 안 지났나?”

“하아.”

백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나흘째인데 아직도 깨지 않았답니다.”

“저런. 이번에는 뭔 고초를 겪었기에. 쯧쯧.”

위화는 혀를 차면서도 백하의 표정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중간자가 마고를 맡는 건 위험합니다. 천력도 부족하고, 무기도 없어요. 사빈님은···. 너무 작고 약합니다.”

백하가 하얀 손을 펼쳤다. 그 안에 사빈이 있기라도 한 듯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상산대감이 쫓아갈 수 없으니 어쩐다···.”

위화는 주름진 손을 비비며 허공의 불꽃을 키웠다.


“해치를 한 마리 구해주는 건 어때? 호위무사 삼으라고.”

그녀는 이내 손을 휘저었다.

“안되지, 그건 아니 되고···.”


“사빈이 언제까지 마고를 맡을까요?”

“나도 모르지. 그 뭐냐, 무슨 꽃이 알려준다던데?”

“어리화 말씀이시군요?”


“응. 어리화.”

위화는 입을 오물거리며 어리화를 몇 번 반복했다.


“아, 가시버시가 되면 어떤가? 마고를 그만둘 수 있으려나?”

위화는 눈초리를 둥글게 내리며 백하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백하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여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바뀌었다.

“예?”

“확 안아주는 거야. 아, 거기 반다강, 거기 좋겠네.”


위화는 숨을 몰아쉬었다. 반짝이는 생각에 흥분한 탓에 손이 떨렸다.


“반다강이 물살도 세고 험하잖나? 생명력이 넘쳐. 그래서 상생농장의 열매가 잘 자라지만, 그만큼 거칠거든. 핑계를 만들어서···.”


말이 길어지니 위화는 숨이 딸렸다.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어갔다.

“자네한테도 얼음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백하가 말없이 굳어있자 위화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싫은가? 그럼··· 새로 온 인도자한테 부탁해야지. 아무래도 사빈을 지켜줄 천인은 필요하니까.”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손으로 눈꼬리를 지그시 눌렀다.

“어휴, 불쌍한 사빈. 중간자가 마고를 하려니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싫은 소리 안 하고 그리 열심히 하는지.”


위화의 눈동자는 백하를 흘끗거리며 바삐 움직였지만 백하는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새로 온 인도자라는 말에 가슴이 화끈거렸다.


숨이 가빠져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손과 발이 제멋대로 떨렸다.


백하가 벌떡 일어섰다.

“위화님, 급한 일이 있어 가보겠습니다.”


“응. 어서 가봐.”

위화는 그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마음숲에서 가장 오래된 차사이지만, 웃음은 꿈꾸는 소녀처럼 해맑았다.


*


“사빈님을 도울 방법요?”

상산대원 차미의 목소리가 한요재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백하는 팔짱을 끼고 고개만 까딱였다. 그는 앞에 앉은 운와와 부루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운와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빈님은 대감을 피하는 것 같던데···.”


“그려. 나 같아도 그럴겨. 다정함이라고는 요맨큼도 읍써.”

부루도 손가락을 집어 보이며 입을 삐죽거렸다.


“확실히 사빈님이 달라지긴 했어요.”

차미는 턱을 긁으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차미는 삼인행의 여자 대원으로 사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 둘이 친하게 지내니.

백하는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어깨를 앞으로 숙였다.

“뭐가 달라졌나?”


“중천 다녀온 다음인지···, 아니, 한얼이 인도자로 오고 나서부턴가? 좀 이상했어요. 뭔가 조심스러워하고, 별것 아닌 일에 놀라기도 하고. 아! 가끔 딴생각에 빠져있을 때도 있어요.”


차미의 말에 운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픈가?”


“상사병이구만.”

부루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한얼 말이여. 잘 생겼잖여, 천력도 강하고. 북방흑천에서도 천사감으로 찍어놨다든디. 황제님도 무척 아끼시고. 이거야말로···.”

부루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차미가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 뭐냐···. 그래도 우리 대감만은 못 하지. 암.”

부루는 차미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마무리했다.


“뭔가 사빈님이 좋아하는 걸 해주죠. 긔니초 어때요? 마고에게는 특효약이라던데.”

차미의 제안에 운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약효가 특이해서 건강한 천인이 먹으면 독이 된다네. 사빈님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숲센장벽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초 말이제?”

부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기 말고, 모심장터 놀러가는 거 어뗘?”

“사빈님이 겨우내떡과 정과수 좋아하잖아요?”

차미는 모심장터의 이루리 거리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겨우내떡···. 달콤하고 쫀득하고 부드러워요. 아! 나란히 거리를 산책하는 거예요.”

차미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쪽으로는 푸른호수가 내려다보이니 경치 좋죠. 영진촌을 가로질러 양쪽으로 저자가 서는데, 냄새도 좋고, 모양도 예쁘고. 맛도···.”


“인도자 숙소가 있는 곳이제? 한얼도 거기 머물지.”

부루는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다가 차미의 날카로운 눈빛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한요재로 초대하시죠? 산책은 무리지만, 다과는 부담 없을 겁니다.”

운와가 말하자 차미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제가! 제가 모심장터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라믄, 나도.”

부루도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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