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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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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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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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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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DUMMY

아날빛숨 일 층에서는 대취와 산여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얼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혼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인도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도자도 중앙황천의 차사이지만, 혼들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상산대원 앞에서는 바짝 긴장해서 굳어버리지만, 인도자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바로잡고 처벌하는 존재가 아니라 길을 이끄는 존재니까.


아날빛숨에 들어서자 강아지 바나는 아래턱을 벌리고 신기한 듯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냄새를 맡느라 코를 벌름거렸다.


산여가 사빈을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사빈님, 언제부터 강아지를 키웠나?”


강아지라는 말에 막 주방으로 들어서던 초연이 뒤돌아보았다. 용희는 벼락처럼 주방에서 뛰어나왔다.

“강아지?”

“강아지라고요?”


바나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개의 형상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사빈의 치맛자락에 닿자 사빈을 올려다보았다.


사빈이 속삭였다.

“괜찮아. 우리 가족이야.”


초연과 용희가 동시에 바나를 안으려다가 서로 어깨가 부딪쳤지만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머, 어머. 귀여워라.”

“강아지는 어디서 찾으셨대요?”


백하의 천력으로 처음보다 털이 더 하얗고 풍성해졌으니 누구라도 쓰다듬고 싶어질 것이다.


처음에는 움찔거리던 바나도 귀를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왕, 나도 모르겠어라.”


쓰다듬는 손길에 익숙해지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꼬리를 살랑거렸다.


“고것 참 이쁘네. 헌데, 요상하구먼.”

“그러게.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대취와 산여가 바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빈은 그들 맞은편에 앉았다.

“왜 그러세요?”


“강아지가 이쁘기는 헌디, 한얼의 기운이랑 대감의 기운이 같이 있구먼.”

“한얼님이 바나를 만들고, 대감이 부족한 천력을 넣어주셨어요.”

“허, 웬일로 그 둘이 힘을 합쳤댜?”


입을 삐죽이던 대취의 표정이 점점 바뀌었다. 싱글거리다가 혼자 큭큭 웃었다.

산여는 그의 생각을 아는지 미소만 지으며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한얼님은요?”

“다훤님을 모시고 다녀올 곳이 있다고. 곧 올 거요.”


산여는 사빈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고갯짓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오?”


대취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산대가 허벌 살벌하던디.”


사빈은 손을 들어 그들 주위로 보이지 않는 결계를 쳤다. 혼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삼키는 벽이었다.


“마음숲에 귀물씨앗이 숨어들었어요.”

“뭐시여? 귀물···?”

“뭐라고?”

대취와 산여가 큰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것 때문에 혼의 모습이 바뀐 것 같아요. 두타가 보았대요.”

“저런···!”

산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괴물로 바뀌면 그 혼은 태어나지 못해. 소멸시키는 방법뿐인가?”

산여는 중얼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정화할 방법이 있을 터인디···. 혼을 소멸시키면 쓰겄나.”

대취가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초연과 용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바나를 쓰다듬느라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까르르 터지는 소리가 결계 안쪽으로 또렷하게 들어왔다.


바나는 옆으로 빙그르르 굴렀다가 공처럼 웅크렸다가 몸을 활짝 폈다. 신이 나는지 깡총거렸다.


산여는 웃음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생은 천인의 능력이 아닐세. 완전히 부숴야 다시 세우지. 파괴는 탄생의 다른 이름이니까.”

“그라제. 파괴력으로 따지면 차사를 따라올 자가 없제. 특히 상산대.”


‘혼을 소멸시킬 수는 없어.’

사빈은 손을 꼭 쥐고 두 인도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인들은 다시 살릴 방법을 알까요? 선계나, 아니면 인간세에 방법이 없을까요?”

“고거는 아무래도···.”

대취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빈님, 피천귀도 정화가 안 된다오. 사람이 피천귀를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걸 받아들인 건 사람의 혼이니.”

산여는 창밖을 보며 돌아앉았다.


사빈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건 씨앗 때문이지, 인간세의 피천귀와는 달라. 씻김을 끝낸 혼이니 정화할 방법이 있을 거야.’


사빈은 손가락 끝을 꾹꾹 눌렀다. 뿌옇게 흐려있던 머릿속에 반짝 빛이 지나갔다.

‘맞아! 중천에서 만난 비뢰수!’


비뢰수를 어떻게 되돌렸더라? 온유주와 수명환 조각.

‘수명환을 만든 숨꼭지가 혼에게서 나왔으니 혼을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온유주를 정화수로 만든다면?’


사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명환은 몰라도 온유주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숲의 혼이라면 자주 마시는 술이니 다른 것이 필요했다.


그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괴물이 된 혼에게 어떻게 다가가지? 그걸 먹여야 하는데?’


괴물이 뭔가를 먹거나 마시지는 않을 것이다. 중천의 비뢰수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는 갈망과 두려움을 삼킬 것이다.


생각이 꽉 막혔다. 무언가 어렴풋이 떠올랐다가 잡으려 하면 순간에 흩어졌다.


사빈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소리의 결계도 풀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상산대원들이 바삐 돌아다니지만, 이렇다 할 소식은 오지 않았다.

마음은 초조하고 다급해도, 혼들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태연한 척 문밖만 내다보았다.


바나는 재롱을 부리다가 지쳤는지 바닥에 엎드려 꼼짝하지 않았다.

아날빛숨에 다른 혼이 들어오자 초연과 용희는 바나를 내버려 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손님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쯤, 또다시 아날빛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상산대인가?’

사빈이 황급히 돌아보았지만, 황금 해태 무늬가 새겨진 검은 옷이 보였다. 한얼이었다.


그녀는 실망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와서 실망했습니까?”

“아니에요. 기다리는 소식이 있어서.”

“상산대가 찾는 것 말씀이지요? 몇 개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몇 개나요? 하나가 아니었어요?”


“들어온 씨앗에 비하면 미미한 숫자입니다.”

한얼은 탁자에 앉아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얼, 다훤님께는 잘 다녀왔나?”

산여가 빈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예. 북방흑천으로 가셨습니다. 잠시 다녀오신다고.”

“다훤 아저씨가 흑천으로 가셨어요? 여기 오래 계실 거라고 하셨는데?”


“천사장님의 호출이 있었거든요.”

한얼이 대답하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바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나는 꼬리를 흔들며 한얼의 발목에 뺨을 부볐다.

“한얼님, 오셨어라? 왕왕!”

“오, 너···. 달라졌구나?”


한얼은 바나를 번쩍 들어 올려 다리와 배, 등을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나갔다.

“강한 천력을 받았구나. 얼음대감도 아주 얼어붙은 건 아니군.”


“왈, 길 잃은 혼도 찾아냈어라. 이제 주인님도 지킬 수 있어라.”

“그래. 네 주인이니까 네가 지켜야지.”

한얼은 바나의 등을 몇 번 쓰다듬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탁자 밑에 길게 엎드렸다. 앞다리에 머리를 얹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상산대감이 천력을 실어줬어요.”

“하하, 저도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얼은 작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씨앗이 그리 많이 들어왔나···.”

대취가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날빛숨 앞을 오가던 상산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곧 그믐이니 사빈님도 조심하십시오.”

한얼의 눈길이 사빈의 얼굴에서 소매로 내려갔다. 소매 끝에 군데군데 흙이 묻어있었다.


사빈도 그제야 소매를 자세히 보았다.

새놀산 둔치에서 묻은 흙이었다. 두타를 위로하느라 흙이 묻은 줄도 몰랐다.


한얼은 그녀의 소매를 잡고 흙을 털었다. 마치 자신의 소매를 털 듯 자연스러웠다.


무심코 앉아있던 사빈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한얼이 인도자로 들어섰을 때도 가슴이 따끔거렸는데, 그때와 비슷했다.


“손이 더러워지겠어요. 제가 할게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 참.”

한얼은 몸을 돌려 산여를 바라보았다.


“위즐증가에 가셔야죠? 다담님이 기다리시던데요?”

“이런! 그놈의 씨앗 때문에 늦어졌군. 실례하겠네.”

산여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보이지 않았다.


“허, 이 친구. 다담에게는 지극정성일세.”

“대취님은 아니십니까?”

한얼이 호탕하게 웃자 대취도 싱글거렸다.


“그럼, 나도 잠시.”

대취는 칠 층의 빈자리로 날아올랐다.

초연과 함께 앉는 자리였다. 때를 놓칠세라 초연도 그곳으로 날아올랐다.


한얼과 사빈, 둘이 남자 한얼이 사빈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혹시 라온잎을 갖고 있습니까?”


사빈은 놀라 손을 탁자 아래로 내려놓았다.

향낭을 만지면 마음이 맑아져 아롱재에 있는 동안은 늘 곁에 두었다. 잠잘 때도 머리맡에 두었다.


‘다른 천인들은 모르던데···?’

사빈이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데 한얼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사빈님께 잘 어울리네요.”

“어떻게 아세요? 라온향을?”


“스승님과 약초를 연구하러 다닌 적 있거든요.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고, 치료의 효과도 있다고 해서 갖고 싶었지만, 못 구했지요.”


“나눠드릴까요?”

“아닙니다. 사빈님께 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얼은 빈 물잔을 흔들다가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이번 그믐에는 어디로 가십니까?”

“그건 저도 잘···. 하지만, 인간세를 돌아봐야 해요. 거기 다음 마고가 있거든요.”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말씀하십시오.”

“고마워요. 중천도 안내해 주고, 바나도 만들어줘서. 이미 넘치게 받았는걸요.”


사빈은 고개를 숙였다.

‘중간자가 또 있다는 것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바람이 휙 지나갔다. 그 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누군가 날아들었다.


“사빈님.”

상산대원의 삼인행 중 하나인 차미였다.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은 심각했다.


이번에는 차미가 손가락을 움직여 탁자 주변에 침묵의 결계를 쳤다. 다른 혼이 들어서 안 되는 일이라면 귀물씨앗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사빈은 일어나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아홉 개 찾았어요. 잡는 과정에서 세 개는 소멸했고요.”

“소멸해요?”


사빈이 눈을 크게 떴다.

‘불쌍하게도. 가엾은 혼이 의미 없이 소멸하다니.’


“여섯 개는 일단 봉인했는데···.”

“남은 혼은 살려야죠. 아직···, 아직 방법은 모르지만.”

사빈은 떨리는 손을 마주 잡았다.


“천기공은 어떤가요?”

“대감과 상산대원이 살피고 있어요. 며칠 걸릴 거예요. 마음숲이 워낙 넓으니까요.”


차미는 손가락을 움직여 결계를 치웠다.

순간, 아날빛숨의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리고···, 예사달님이 찾으세요.”

차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빈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빈아, 혜존각으로 오려무나.’

예사달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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