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781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6.09 09:07
조회
94
추천
2
글자
13쪽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DUMMY

차미가 탁자를 두드렸다.

“사빈님을 다시 초대하시죠.”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나?”

지난번의 다과 초대는 흐지부지 끝났다.

그로서는 충분한 마음의 표시였다. 아무리 빙천술의 대가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안된다니까요. 지난번, 그것은 회의였죠, 그게 무슨 마음의 표현입니까?”

“나도 이상허드라고.”

부루도 옆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꺼내 보이라고. 마음을.”

“어떻게 내보이나? 보이지도 않는 것을.”

백하는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군소리했으나 결국 차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부루와 차미가 나서서 조촐한 다과회를 마련했다. 사빈에게는 차미의 초대로 알렸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부루와 차미가 함께 앉았다. 백하에게 맡겼다가는 또다시 진지한 회의가 될 테니까. 덕분에 사빈도 즐겁게 차를 마셨다.


“그럼,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믐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사빈이 이야기꾼처럼 씩씩하게 말하자 부루와 차미가 환호했다.


마고의 그믐 외출은 상산대 뿐만 아니라 마음숲 차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깃거리였다. 다섯 성천에서 천사와 선사만 인간세에 나가기에 차사들은 인간세를 직접 보지 못했다.


마고가 그믐 외출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무슨 일을 겪는지 소문은 떠돌지만, 사빈에게 직접 듣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공방의 키움차사들이 새로운 유행을 알아야 한다며 앞다투어 찾아가고, 아날빛숨에 드나드는 혼들도 이야기를 좋아하니 여간해서 상산대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얼음대감 백하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좋았고, 흐름에 따라 바뀌는 표정도 좋았다.

표정과 몸짓, 손짓을 더 해 운율까지 넣어 말하니 이야기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한요재 맞이방에서 이야기에 빠지지 않은 이도 있었다. 차미의 계산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백하와 사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생각해 둔 것을 하나씩 되짚었다.

‘대감이 은애하는 것을 차사들 다 아는데 정작 사빈은 모르니. 너무 이상해.’


차미는 차를 마시는 척 사빈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사빈은 기억을 되짚어 이야기를 이어가느라 그런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얼과 친하기는 해도 누이와 동생 같은 느낌이던데···. 그리고, 저 손.’

차미는 사빈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얇은 수건으로 손목을 둘렀다. 소매가 흘러내리면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뭔가 있어. 그게 뭘까?’

차미가 사빈을 관찰하는 동안 이야기는 점점 더 깊어졌다.


부루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려? 그라믄 살아난 거여?”


“예. 그때 녹보산당에서 사병을 이끌고 들이닥쳤는데, 딱!”

사빈이 손을 똑바로 펴서 공기를 갈랐다.


“파소연랑이 깨어난 거죠. 수명환의 기운이 하루 늦게 나타난 거예요.”

“흐메! 그라믄, 그 후계자는?”

“아이, 그게 글쎄, 닷새째 아침이어서 못 보고 돌아왔어요.”


“아까비. 그걸 봤어야 하는디.”

부루는 아쉬워하며 주먹을 흔들었다. 말하는 사빈보다 더 목이 마른지 샛바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군. 듣기 좋소.”

백하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이야기 속의 사빈은 마음숲에서의 마고 사빈과 많이 달랐다.


마음숲에서는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다면, 그믐의 사빈은 쾌활하고 명랑하고 강단 있었다. 그믐 이야기를 할 때가 바로 그런 모습이리라.


백하는 마음이 설레어 고개를 돌렸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나서 사빈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도 들려줄 수 있겠소?”


“예. 당연히 그래야죠.”

사빈의 대답에 백하는 활짝 웃으며 정과수를 따라 주었다.


얼음대감 백하가 그렇게 활짝 웃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건만, 사빈은 물잔을 바라보느라, 차미는 생각에 빠져있느라, 부루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되새기느라 그 진귀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사빈이 겨우내떡을 오물거리는데, 누군가 한요재의 현관을 두드렸다.


“사빈님, 여기 계십니까?”

맞이방 바깥에서 한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얼이 성큼성큼 들어섰다.

여느 때처럼 반듯한 모습으로 해맑게 웃는데, 웬일인지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한요재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탁자와 접시 위로 서리가 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빙천술의 첫 단계였다.


‘대감이 빙천술을?’

사빈은 탁자에 얹었던 손을 재빨리 들어 올렸다.


피천귀를 잡을 때나 역류하는 바닷물을 되돌릴 때 쓰는 술법이었다.

서리는 준비 단계이고, 그가 정말 빙천술을 쓴다면 한요재의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이다.


부루와 차미도 엷은 서리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부루가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얼이구만. 뭔 일이여?”


“담소를 나누고 계셨군요? 잘 되었습니다. 배가 몹시 고팠는데.”

한얼은 백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초대받은 손님처럼 당당하고 여유 있었다.


한얼은 천인이나 차사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친구나 가족을 대하듯 스스럼없었다. 운와나 부루를 대할 때도 큰형을 대하듯 서글서글 눈웃음을 지었다.


백하와 한얼이 말없이 눈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사빈은 눈빛에 담긴 강렬한 힘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부루와 차미의 생각과는 다른 결론이었다.

‘만나서 무척 반가운가 보네?’


“그 강아지는 뭔가?”

백하는 굳은 얼굴을 움직였다.


“아, 사빈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한얼이 강아지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내려선 강아지는 온몸의 털을 부르르 털었다. 생김새가 강아지에 가깝기는 해도 진짜 강아지는 아니었다.


작은 몸뚱어리에 머리는 제법 컸다.

털은 듬성듬성 빠져있고, 볼에 살이 없어 홀쭉했다. 눈은 크고 초롱총롱한데다 귀와 코가 오뚝하여 고양이처럼도 보였다.


“저한테요?”

“중천에서 비뢰수와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위험하게 다니는 줄 몰랐습니다.”


한얼은 마치 자기 잘못인 양 진지하게 말했다.

“사빈님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다른 마고와는 다르니까요.”


한얼이 강아지의 등을 쓰다듬고는 엉덩이를 툭 쳤다.

“바나, 네 주인이시다.”


강아지 바나가 사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사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눈동자 속에 사빈의 모습이 비쳤다.


“와, 너무 귀여워요!”

사빈이 탄성을 질렀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바나는 풀쩍 뛰어올라 사빈의 무릎에 앉았다.

바나를 쓰다듬으니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는 것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주인님? 왕왕, 이제부터 바나가 지켜드릴 거라.”

바나는 사빈의 무릎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았다.

그렇게 앉은 상태로 목을 곧추세웠다.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귀엽다. 사빈님에게 딱 어울려요.”

차미도 환호를 질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바나에게 다가갔다.


부루도 다가가 바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 녀석 이쁘네.”


“혹시 이거 혼 찌꺼기로?”

차미가 한얼을 돌아보았다.


한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믐 외출에 데리고 다니십시오. 위험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겨우내떡을 한입 가득 밀어 넣었다.


한얼이 켁켁거리며 기침하자 백하는 혀를 차면서도 샛바람물을 따라주었다.

“흥. 저것 때문에 삼도천를 헤맸나 보군.”

“예. 생각보다 쓸만한 것이 없어서 한참 찾았습니다.”


“혼 찌꺼기요?”

사빈이 물었지만, 한얼은 폭풍을 흡입하듯 우걱우걱 아무나전을 씹고 있었다.


부루가 자리에 앉으며 대신 대답했다.

“삼도천 건널 때 혼이 떨어뜨리는 거여. 혼 조각이거나, 생각의 잔해지. 마음 한 겹이기도 허고.”


바나를 쓰다듬으며 행복해하는 사빈을 보자 백하가 입맛을 다셨다.

“왜 저 생각을 못 했지?”


“이건 차사가 못 해요. 북방흑천 천사의 힘과 중앙황천 인도자의 능력이 다 있어야죠.”

차미는 바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싱글거렸다.


백하는 그녀의 말에 콧잔등을 구겼다.

손으로 턱을 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음장 같은 그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깃들었다.


백하의 낯빛을 보니 사빈은 왠지 미안해졌다.

‘대감도 강아지를 갖고 싶은가?’

그래도 선물 받은 바나를 줄 수도 없고, 여기서는 강아지를 구할 수가 없는데···.


“그려서 안 왔구만. 대취와 산여만 다니더라고.”

부루의 말에 한얼이 싱글거렸다.

“삼도천이 그렇게 넓은지 몰랐습니다. 그나마 불천수 가까이에서 얻은 겁니다.”


차미도 맞장구쳤다.

“삼도천이 만만한 곳은 아니죠. 불천수는 삼도천이 회귀하는 곳이라 뭐든 고여있어요. 그래서 피천귀들도 좋아하고.”


사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불천수? 다훤 아저씨가 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 너머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 스승님께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한얼은 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폭풍 같던 식사가 끝났다.


“혼 찌꺼기를 모으면 이런 모양이 되나요?”

사빈의 물음에 부루와 차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습이 있기는요. 보이지도 않아요.”

차미가 웃자 한얼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상념에 남은 모습입니다. 혼 찌끼의 힘도 부족하고, 상념이 엉겨 붙어 이런 모습이 되었어요. 그래도 제 몫을 할 겁니다.”

한얼은 못내 아쉬워했다. 털도 듬성듬성하고, 다리가 빈약하여 비틀거리지만,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이 아이도 좋아요. 예쁘고, 귀여워요.”

사빈은 바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턱을 간질여 주었다.

“제가 잘 보살필게요.”


바나가 벌떡 일어나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왈, 제가 주인님을 지키려고 생겼어라. 나를 믿으셔라.”


바나는 탁자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한요재를 두리번거렸다.

“사람 일도 알어라. 삼도천에 버린 기억이 있어라. 마음숲 일도 알어라. 삼도천에 남긴 기억이 있어라.”


‘삼도천에 버리고 간 기억으로 인간세도, 마음숲도 안다고?’

사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인간세에서 중천으로 갈 때랑 마음숲에서 인간세로 갈 때 모두 삼도천을 건너지.’


바나는 백하의 곁을 돌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라. 상산대감이어라. 얼음칼의 명수. 으으.”


바나의 중얼거림에 차미와 부루, 백하까지도 코웃음을 쳤다.


“여기는 마음숲. 하얗고 썰렁하니 한요재.”

바나는 통통 바닥을 차며 걷다가 다시 사빈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더 많은 비밀을 알면 죽을 거라. 왈, 조용히 있어라.”

바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바짝 엎드렸다.


“고 녀석 맹랑허네. 말은 혼자 다 해놓고?”

부루는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차미도 흥흥 콧소리를 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인도할 혼이 있어서요.”

한얼이 일어서자 백하도 일어났다.


“잘 가게. 여기는 걱정 말고.”

“대감이 계신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한얼은 눈웃음을 지었지만, 말에는 힘이 실렸다.


“삼도천을 헤매느라 고생했을 터이니 가서 푹 쉬게.”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빈님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상산대가 있으니 무리하지 말게. 인도자도 중요한 직책 아닌가.”

한얼을 보내는 백하의 인사도 뜨거웠다. 따갑다고 해야 하나.


“감사합니다.”

한얼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지만, 눈웃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바나, 사빈님을 잘 지켜라.”

“왕왕!”

바나는 진짜 강아지처럼 작은 소리로 짖었다.


한얼이 나가자 탁자 위에 다시 엷은 서리가 내려앉았다. 잠시 후에야 서리가 사라졌다.

백하는 굳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숨을 들이마셨다.


“대감, 진정하쇼. 그려도 상산대감을 따를 수 있간디?”

부루는 난처해하며 눈꼬리를 내렸다.


“허참, 대감도. 평소에는 얼음칼 같은 분이 사···.”

차미는 사빈과 눈이 마주치자 말을 멈추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아하하.”


백하가 일어나 사빈에게 다가왔다.

“다음에 다시 초대하겠소. 마고는 자주 쉬어야 하니.”


그때, 한요재 문이 다시 열렸다. 모두의 눈이 문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상산대원 운와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0 그믐_배낭 메고 새벽 산책 23.06.21 71 2 10쪽
59 그믐_짱짱 만화방 23.06.20 71 2 14쪽
58 그믐_하륜 선위의 충고 23.06.20 70 2 12쪽
57 그믐_달숲의 작은 천사 23.06.19 72 2 11쪽
56 그믐_그믐밤의 모임 23.06.18 72 2 13쪽
55 그믐_가온의 손님이 되다 23.06.17 75 2 14쪽
54 그믐_파라다이스 빌라 23.06.16 81 2 11쪽
53 그믐_피천귀 사냥 23.06.15 84 2 13쪽
52 천계_다훤 아저씨 23.06.14 83 2 12쪽
51 천계_차미의 의심 23.06.13 87 2 13쪽
50 천계_예사달의 조언 23.06.12 89 2 13쪽
49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23.06.11 89 2 12쪽
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1 2 11쪽
47 천계_숨은 혼을 찾아서 23.06.10 92 2 11쪽
»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5 2 13쪽
45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4 2 12쪽
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2 2 12쪽
43 천계_공방의 고민거리 23.06.07 92 2 11쪽
42 천계_돋움다로차 23.06.06 100 2 12쪽
41 천계_다른 곳 같은 뜻 23.06.06 101 2 13쪽
40 그믐_라온향낭 23.06.05 99 2 12쪽
39 그믐_반계의 다른 모습 23.06.05 98 2 12쪽
38 그믐_버림받은 영혼 23.06.04 99 2 12쪽
37 그믐_불천수 대나무숲 23.06.03 101 2 13쪽
36 그믐_현재의 겹 23.06.03 103 2 12쪽
35 그믐_그림의 주인 23.06.02 102 2 10쪽
34 그믐_동굴 속의 그림 23.06.02 99 2 12쪽
33 천계_얄리장터의 등불 23.06.01 103 2 13쪽
32 천계_알 수 없는 일들 23.06.01 104 2 12쪽
31 천계_대부와 대자 23.05.31 102 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