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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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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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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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예사달의 조언

DUMMY

위즐증가의 북쪽, 상생농장과 가까운 곳이 선생들이 머무는 그림터였다.


거대한 나무를 가운데 두고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데, 그 나무들이 돌봄차사와 키움차사들의 거처였다.


그림터에서 가장 높고 굵은 나무가 혜존각이다. 초록의 잎과 가지가 그대로 기둥과 벽이 되어 늘 선선하고 싱그러웠다.


겉에서 보면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지만, 내부는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이 많아 공방으로 강의하러 오는 천인이나 선인이 머물기도 한다.


예사달과 다훤도 마음숲에 머무는 동안 혜존각에서 지냈다.


다훤은 다른 천선인처럼 모로매 온천의 소상각에도 방을 얻지만, 예사달이 지내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혜존각 가장 아래층 구석, 고운방이었다.


그동안에도 사빈은 예사달을 자주 찾아갔다. 곁에서 스승을 모실 기회가 흔치 않기에 부지런히 고운방을 드나들었다.


보통은 빛글이나 전언으로 부르는데, 다른 차사를 통해 부르다니 의아했다.

‘벌써 예사당으로 가시려고?’


강아지 바나는 걸음도 가볍게 사빈의 뒤를 따라왔다. 한얼이 부탁한 대로 어디라도 함께 다닐 기세였다.


“주인님을 지킬 거라. 혜존각은 혼들이 못 들어간다더라. 구경해야지라.”

바나는 주인을 지키려 눈을 빛내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구경거리에 솔깃해졌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인을 지킬 것 같던 기세는 예사달을 보자마자 푹 꺾였다.


그는 형체가 없으나 눈에 보이고, 냄새가 없으나 기척을 가진 존재였다. 예사달이 다가가자 바나는 털을 곤두세우고 사빈의 품으로 뛰어올랐다.


“그새 새 친구를 사귀었니?”

예사달은 여전히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빈과 있을 때는 언제든 인자한 미소를 띤 할머니였다. 주름도 깊은 데다 마르고 구부정해서 나이가 많아 보였다.


“한얼이 만들어주었어요. 바나예요.”

사빈은 예사달이 잘 볼 수 있도록 바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호호, 고 녀석, 힘을 많이 얻었구나.”

“왕왕. 예사달님이어라? 주인님의 스승님?”

바나가 두려움을 누르고 맑은소리로 짖었다.


예사달은 주름진 손으로 바나를 쓰다듬었다.

“한얼은?”


“혼을 인도하러 갔어요.”

“혼 찌꺼기를 모으느라 기력을 많이 썼을 텐데. 좀 쉬지 않고.”


“바나를 만드는 일이 많이 힘든가요?”

“됐다. 그래도 백하가 천력을 넣어주었으니 이 아이를 통해 한얼에게 전해졌을 거다.”

예사달은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쿡쿡 작은 소리로 웃었다.


“호호. 백하도 고민 좀 하겠구나. 생각지도 못한 적수가 나타났으니.”

“예? 상산대감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그럼. 어떤 숙맥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지.”

“저런···.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어요.”


사빈은 아날빛숨의 용희를 생각해냈다.

‘대감이 좋아하는 천인이 있나? 그럼 용희는?’


그녀의 생각은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다가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혹시, 그 상대가 용희? 우와, 이보다 좋은 일은 없겠는데.’


그 순간,

따닥! 이마가 화끈거리며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아야!”

사빈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예사달이 쯧쯧 혀를 찼다.

“뭔 생각을 하는 게야?”


예사달은 싱글거리며 대청마루 끝에 앉았다.

차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도 방석이 놓여있었으나 사빈은 예사달 바로 옆에 앉았다.


“할머니, 벌써 가시려는 건 아니죠?”

“왜 아니야. 다녀올 곳이 있어서 인사하려고 불렀지.”


“안 돼요. 여기 오래오래 계세요. 제가 마고 그만둘 때까지. 예?”

사빈은 어린아이처럼 졸라댔다.


‘어떤 문제든 다 풀어주실 거야. 귀물씨앗도, 어리화 때문에 일어날 많은 일도···.’

사빈은 귀물씨앗에 대해 말할 시기를 찾으며 차를 우렸다.


“이계의 요물이 뭔지 알아봐야지. 소문은 근거 없이 마음을 어지럽히니 확실히 해둬야 해. 천인들은 우주의 가장자리까지 못 가니 내가 갈 수밖에.”


“할머니도 위험해요.”

“호호, 날 걱정하는 게냐? 많이 컸구나.”

“할머니이.”

사빈이 코멩멩이 소리를 내자 예사달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궁금해서 그런다. 내게 말을 걸었던 그것인가 해서 말이야. 아니면 다훤이 느꼈다는 이상한 기운일까? 분명 뭔가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했거든.”


예사달은 사빈이 내준 차를 맛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마음숲에 큰일이 생겼더구나.”


“아···. 예.”

사빈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혼이 귀물씨앗에 물들었다고?”

“예. 모습도 피천귀처럼 바뀌고, 다른 혼에게 주문도 걸어요. 인간세가 지옥이라고요.”

두타가 해준 말대로라면 혼의 앞길을 막는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놀랍구나. 피천귀의 힘이 이토록 교묘하다니. 어쩜 그리 사람과 똑같누.”

예사달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입가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하긴···, 사람의 마음에서 태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예사달은 찻잔을 들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찻잔 속 일렁이는 물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주 약한 혼일 게다. 공명이 약하거나, 두려워하는 혼, 의심하는 혼에게나 들어갈 수 있지.”

“영천옥에서 씻김을 끝냈는데, 왜 인간세에만 가면 사람이 바뀔까요? 깨끗한 혼 그대로 살면 좋을 텐데.”

그 이유를 사빈도 알지만, 생각할수록 속상했다.


“혼은 사람을 살게 하는 원천이지, 사람 자체가 아니잖니.”

예사달이 애틋한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려 앉았다.

“사람의 잘못만은 아니지. 실증계는 척박하고 모든 것이 부족하니까. 사람의 몸을 입는 것만도 고통인데, 그 몸으로 살아야 하니 피천귀와 타협하는 편이 더 쉽지 않겠니?”


사빈도 고개를 들어 기둥과 벽을 바라보았다.

싱싱한 초록빛이 물을 듬뿍 머금어 방안에 생기가 가득했다. 푸른 잎과 가지는 촉촉하고 싱그러웠다.


천계에서는 그저 놓아두어도 모든 것이 잘 자랐다.


“해탈하지 않는 이상 무한히 고난을 반복하지. 천인은 이해 못 해. 천사나 선사가 인간세에 머물러도, 천력을 갖고 있으니 사람이 느끼는 고통은 못 느끼거든.”


사빈은 자주 들은 이야기여서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었다.

천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계가 세상의 중심이고, 천인이 가장 위대한 존재이기에 불쌍한 인간세를 돕는다고 말한다.


예사달은 다른 천인과 달랐다. 천인이 아니기에 다를 수 있었다.

중앙황제의 눈이 생명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에 이른 것은 우주에 떠다니는 무수한 생명의 힘이었다.


“피천귀는 정화할 수 없다던데,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인간세의 피천귀 말이냐? 정화할 수 없지만, 통제할 수는 있단다. 누군가 그 일을 하고 있지.”

“누가요?”


예사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차를 마셨다.

붉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와 까랑까랑 노래하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갔다.


“참, 할머니, 예사당에 동자를 들이셨어요?”

“동자라니?”


“현재의 덫에 빠졌을 때 봤어요. 예사당 마루에 어떤 아이가 있었어요. 다훤 아저씨랑 아주 친해 보였어요.”


사빈은 소용돌이 속에서 지나쳤던 예사당을 떠올렸다. 아주 빠르게 지나갔지만, 예사당은 눈에 익어 금방 알아보았다.


“혼자 예사당에 있으면 외로울 거예요. 여기 데려다주시면 제가 보살필게요. 할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사빈도 외로운 시간이 많았다.

동녘뜰 사빈재에서 혼자 할머니를 기다릴 때면 꽃과 나무를 상대로 외로움을 달랬다.

‘아이를 혼자 놔둘 수야 없지. 너무 불쌍하잖아.’


예사달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보았다고?”

“현재의 덫요. 반계에서 만든 거요. 거기 말고도 함정이 많다고 했어요.”


“거기서 또 무엇을 보았니?”

예사달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물었다.


“인간세의 여러 가지 모습이요. 실증계도 보였고, 존재계도 보였어요. 그 벽이 제 생각에 반응했어요.”

회오리 속 수천 개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어떤 것은 기억에 남았고, 어떤 것은 이미 지워졌다.


“그리고···, 마백북존과 이안남존도 보았어요.”

“어떻게 그분들인 줄 알았니?”

“마눙님은···.”

사빈은 눈을 감고 마백북존 마눙을 떠올렸다.


“여리여리하고 키가 컸어요. 머리카락이 길고, 백록색이었어요. 그 주위로 피천귀들이 엎드려있었죠. 아! 가슴에 구멍이 뚫려있었어요.”


사빈의 설명에 예사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나. 마눙님.”


“할머니는 어떻게 아세요? 초상화도 없고 천인들은 그분을 아주 싫어하는데.”

“우주를 떠돌며 세상의 기억을 읽었단다. 우주의 대기는 태초의 사건까지도 기억하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말이다.”


예사달은 오래전 일을 생각하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루님은 어떻드냐?”


“동방청제답게 우람했어요. 지금의 태우님과 비교하면 작은 편이지만. 크고 힘세 보여서 중앙황제님과 비슷했어요.”

“여전히 한쪽 팔이 없지?”

“예.”


이루를 생각하니 사빈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시리고 아팠다. 왼쪽 소매가 펄럭이던 이루의 모습에 이어 예슬과 나윤이 떠올랐다.


“그분들은 두 번째 대혼란에 가슴과 팔을 잃었지. 현원님이 눈을 잃은 것처럼.”

예사달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풀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꽃향기가 밀려들었다.


“그분들의 조각도 살아있으면 좋겠구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라도 말이다.”

“할머니가 못 보는 것도 있어요?”

“호호, 당연하지. 천선인도 그래. 사람이 모르는 것도 보고 듣지만, 한계가 있거든.”


예사달은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됐다. 동자는 내가 알아서 하마. 다움성이 바로 옆인데 뭐가 걱정이니.”


“아, 할머니, 그리고 저, 어리화의 신호 알아들었어요.”

“그거 잘 되었구나. 다음 마고는 어디 있니?”

“어디인지는 모르겠어요. 바람벽에 잠깐 나타났다 지워졌어요. 그래도 인간세 실증계인 건 맞아요.”


예사달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믐마다 인간세로 내려가니.”


“빨리 넘겨주고 할머니랑 동녘뜰에서 지내고 싶어요. 예전처럼요.”

“호호, 생각만 해도 좋구나.”


예사달은 옷자락을 여미며 사빈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지금은 피천귀로 변한 혼을 정화하는 게 먼저지.”


“정화요? 방법이 있어요? 할머니는 아실 줄 알았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사빈이 예사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예에?”

예사달은 사빈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조금만 알려줄까?”

예사달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사빈은 마음이 급해 말은 못 하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네가 갖고 있잖니?”

“예?”


‘어디? 뭘 말하는 거지?’

사빈은 저고리와 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사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예사달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꾸벅꾸벅 졸던 바나도 예사달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왕왕 허공을 향해 짖어댔다.


‘어디 가시는 거야? 이번에는 언제 오시려고?’

사빈은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냐고? 그게 대체 뭐냐고···.’


찻주전자에서 세련수의 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이상하다? 분명 잔별차가 들어있는데?’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주전자에 들은 것은 확실히 잔별차였다.


‘설마 세련수?’

바람을 타고 날아든 꽃향기에 섞여 어렴풋했던 세련수 향기가 점차 엷어졌다.


‘그래. 수명환과 세련수. 그게 좋겠어. 그런데, 어떻게 먹이지?’

뭘 삼키게 하든 우선 혼에 붙어있는 귀물씨앗부터 벗겨야 했다.


‘내가 가진 것?’

사빈은 허리띠에 매달린 꽃수 열쇠며 아리 인형을 살펴보았다. 엷어지던 꽃향기가 점점 강해졌다.


‘가만? 이 향기는?’

밖에서 들어오는 향기가 아니었다. 사빈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향기였다.


귓가에 나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향을 갖고 있으면 귀사님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침입자로 여기면 큰일이잖아요?’


사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라온향이 피천귀의 접근을 막잖아? 그럼, 떨어지게도 할 수 있지.’


일단 귀물씨앗을 벗기면 수명환과 세련수로 정화가 가능할 것이다. 며칠 동안 죽은 듯 잠만 자겠지만.


사빈은 바나를 안아들고 서둘러 아날빛숨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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