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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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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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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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공방의 고민거리

DUMMY

“마고님! 마고님!”

도우미 소린이 요란하게 소리 질렀다.

괄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몸집은 작아도 소리는 굵고 힘찼다.


“상의할 것이 있는디요!”

마음숲에 처음 왔을 때의 소심하고 말수 적은 소린이 아니었다.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위즐증가에서 정인과 함께 지내더니 말투까지 비슷해졌다.


도우미 정인도 소린의 뒤를 따라 주춤주춤 들어섰다. 홀쭉하고 큰 키 때문에 휘청거려 보였다.


“마고님?”

정인도 아날빛숨을 둘러보았다.


그 역시 도우미 혼으로, 위즐증가의 전담 요리사였다. 높고 가느다란 소리에 콧소리가 섞여 그의 목소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탁자를 닦던 용희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웬일? 요리사가 여기까지 뭔 일이야?”


주방 앞에서 찻잎을 손질하던 초연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도우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났나? 정인이 위즐증가 바깥으로 나온 걸 보니, 심각한 일이구만.”


“아니, 뭐, 심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정인은 말을 더듬으며 얼버무렸다.


사빈이 밖으로 나오자 정인은 천천히 두 손을 모으고 손바닥을 비볐다.


“마고님, 이번 장날. 어땠는지, 아시져?”

정인은 말이 느렸다. 마음숲에서 구추 다음으로 말이 느릴 것이다.


그동안 소린의 성정이 바뀐 이유도 거기 있었다. 정인이 워낙 느리고 답답하니 거꾸로 소리가 커지고 말이 빨라졌다.


사빈은 정인과 소린 곁으로 다가갔다.

“이번 장날? 등불도 좋았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왜?”


소린이 가슴을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방에서 내놓은 물건이 안 팔렸다고여!”


정인은 소린의 뒤에서 속삭였다.

“그라믄, 식당에서 쓸 재료, 구할 수 없으요. 저기, 공방이 잘돼야··· 재료가 들어오는디, 반도 못 바꿨지요.”


“수준이 떨어졌대요! 완전히!”

정인과 소린은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소린은 거의 소리 지르듯 말했다.


‘그 정도였나?’

사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 지나실님과 초연님이 말씀하던···.’

두 차사가 너무나 태평하게 얘기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난 장날에는 천사 담아와 함께 다니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다. 대천사 선아까지 모시느라 공방의 물건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용희가 꽃물차를 가지고 나왔다. 꽃물차는 정인이 좋아하는 차로 달콤 상큼한 향이 났다.

“그래도 상생농장의 작물은 잘 나갔는데?”


정인이 체념한 듯 퀭하게 눈을 떴다. 원래 느린 말투가 더 느려졌다.

“농장 것하고, 너나들이 물건만 잘 나갔제.”


그의 넋두리에 소린은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씩씩거렸다.

“그러면! 대명천까지 가야 허요! 모심장터까지! 허지만, 우리는 대명천에 못 드가지여.”


“모심장터···.”

정인이 중얼거렸다. 무엇을 상상하는지 눈빛이 몽롱해졌다.


“지도 겨우내떡 만들고 싶으요. 용희도 새로운 차 만든다카는디, 마음숲 떠나기 전에 뭐 하나 남기고 싶응께.”


정인이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 올 때는 이 순간도 잊고. 내가 만든 것도 다 잊겠지만서두.”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탁자에 모여 앉은 소린도, 용희도 숨을 들이마셨다. 돌봄차사인 초연의 눈꼬리도 슬슬 내려갔다.


용희 역시 새로운 차를 만든다고 이것저것 시험하고 있었다.

상산대감 백하를 위한 일이지만, 계속 실패하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멈추었다.


그 때문에 마음이 스산한데 정인의 말을 들으니 울컥 눈물이 맺혔다.


“마고님이 좋아하는 정과수···. 나도 할 수 있는디.”

정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꾹꾹 눌렀다.


한동안 침울해 있더니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려면···! 재료가 있어야 허요. 워찌 허느냐. 물건을 많이 팔아야 재료를 넉넉히 구한다 이거요.”


그는 빠르게 말을 마치고 숨을 헥헥 몰아 쉬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야? 왜 갑자기 얘기가 거기로 빠져?”

용희가 어이없는 얼굴로 나오려다 만 눈물을 닦았다.


사빈은 정인의 손을 토닥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도울 방법은 있을 것이다.

“내가 알아볼게.”


‘공방에 가봐야겠어. 다른 선생님들도 알고 있을 거야.’

위즐증가 도우미가 찾아올 정도라면 키움차사들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고샅공방의 주전부리는 잘 되었을 테니, 보듬과 소소, 검새공방만 둘러보면 되겠지.


돌봄차사 초연이 정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인이 이렇게 말 많은 건 처음 보네. 그래서 위즐증가에 다담만 남겨놓고 왔구나?”


“우리가 가야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

소린이 대꾸하자 정인이 그녀의 팔을 툭 쳤다.


“그런 야그는···. 쉬잇!”

정인이 눈을 질끈 감자 소린은 재빨리 입술을 오므렸다.


“알아봐 주셔요. 이러면··· 어려워여.”

엿듣는 귀가 없는데도 정인은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알았어요. 이따 위즐증가로 갈게요.”

그제야 정인과 소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빈은 용희에게 물통을 건네주었다.

“난 소소공방에 가볼게. 돋움샘에 다녀와 줘. 돋움다로차를 만들 거야.”


“어머, 정말요? 새로운 차라면 기꺼이 나서야죠.”

용희는 곧바로 바래강으로 날아갔다.


*


소소공방은 아날빛숨에서 놀뫼마당만 건너면 닿는 가까운 거리였다.


마음숲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이즈막벌만으로도 장터가 넉넉했다. 소문을 타고 손님이 많아지면서 이즈막광장이 좁아졌다.


오래전 마고 예님이 이즈막벌의 남쪽, 개울에 둘러싸인 섬을 놀뫼마당으로 만들었다.


반다강과 바래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샛강이 되고 개울이 되어 마음숲 여기저기를 흐르다가 놀뫼마당까지 들어온다. 이곳에서 서로 섞이며 다시 흩어졌다.


개울 위에는 여러 모양의 다리가 놓여있었다. 다리를 바라보느라 사빈의 걸음이 차츰 느려졌다.


공방의 수련생이 만든 것으로 새로운 혼이 올 때마다 조각이 섬세해지고 유려해져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다리만 구경해도 며칠은 걸릴 것이다.


사빈이 마고가 되고 지금까지 솜씨 좋은 혼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솜씨가 좋았던 것은 아니나 대가 끊어지지 않았다.

공방의 물건이 수준이 떨어졌다는, 그런 말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놀뫼마당의 동남쪽 다리 앞을 지나가는데 누군가 부리나케 다가왔다.

“마고님! 마고님!”


소소공방에서 수련하는 이사묵이었다. 마음숲에 들어온 지 꽤 되지만, 최근에 공방에 나오기 시작했다.


“마고님 찾으러 가던 길이었는데···. 선생님이 오시랍니다.”

“목예 선생님이?”

“예. 선생님들이 소소공방에 모여 계세요.”


‘마침 잘 되었어. 다 같이 모여 있다니.’

키움차사들이 모였다면 분명 그 일 때문이리라. 말 없는 정인을 그토록 떠들게 한 바로 그 일.


사빈은 사뿐히 날아 이즈막광장으로 들어섰지만, 이사묵은 느릿느릿 걸으며 툴툴거렸다. 입술을 우물거려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투덜거림이었다.


사빈은 이사묵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선생님들이 무슨 일로 모이셨어요?”


“그야 뻔하죠. 이번 장날에 장사가 안된 거죠. 지난번에 비하면 반도 안 팔렸으니까요. 아닌가? 반의반인가.”


이사묵은 입술을 내밀고 푸르르 떨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사묵이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숙련자들이 다 떠났다고요. 소소공방만 그런 것이 아니고요, 검새공방도 그래요. 산돌이 떠나고는 제대로 된 작품이 안 나온다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산돌 같은 혼은 아주 특이하니까.

‘때가 안 맞았어. 숙련자들이 하나라도 남으면 좋으련만. 솜씨 좋은 혼이 한꺼번에 나갔으니.’


사빈이 공방거리를 향해 돌아서자 이사묵이 소리쳤다.

“그만둘 거예요. 이런 일!”


사빈은 멈춰서서 이사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조각을 그만두려고?”


그녀는 이사묵이 조각한 나무 인형을 본 적 있었다. 이제 배우기 시작해서 서툰 것이지, 조각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소소공방에서는 나무 조각 말고도 가구와 농기구, 악기, 종이까지 만들었다.

이사묵은 그런 다양한 일에 호기심도 많았고, 하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마음숲에 오자마자 시작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쉽게 그만두지 못할 텐데?’

사빈은 그를 향해 돌아섰다.


공방에는 조금 늦어도 상관없었다.

선생들이 모두 모였다면, 고샅공방의 요선이 있을 테고 지금쯤 간식을 먹느라 바쁠 것이다.


지금은 여기, 힘들어하는 혼이 먼저였다.


“다른 혼들은 다 놀고먹어요. 그냥 쉬다 간다고요. 나도 그럴 거예요.”

“그래요? 이사묵이 원하면 그래도 괜찮아요.”


“에?”

이사묵은 눈을 껌뻑이며 사빈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그래도 된다고요?”

“마음숲에는 정해진 게 없어요. 해야 하는 것도 없고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아요.”


“그치만, 목예 선생님은···.”

“선생님은 이사묵의 재능이 아까워서 그러시죠.”

사빈은 이사묵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내가 봐도 그래요. 이사묵은 재능이 있어요. 아직 나오지 않아서 그렇죠. 사실, 처음부터 잘하는 혼은 없거든요.”

이사묵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소소공방 앞에 도착하자 사빈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공방 앞에 진열된 작품을 보고 나니 왜 물건이 안 팔렸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딘가 엉성하고, 힘이 없었다. 마음숲에서 작품을 보는 기준은 인간세와 달랐다. 정교하고 짜임새 있는 것을 찾지 않는다.


정성이 얼마나 들어갔는지가 더 중요했다.

울퉁불퉁하고 투박하더라도 마음이 담기면 힘을 낸다. 혼들이 뿜어내는 믿음, 정성, 소망이 천인들에게 좋은 기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사묵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가볼게요. 지금은 공방에 가고 싶지 않아서요.”


“알았어요. 쉬면서 잘 생각해봐요.”

사빈은 이사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진열된 물건을 보며 이번에는 마음껏 한숨을 내쉬었다.


창가에 앉아있던 목예가 사빈을 알아보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소소공방의 스승으로 나무를 다루는 데는 중앙황천에서 가장 뛰어난 차사였다.


“사빈! 기다리고 있었어.”

목예는 다짜고짜 사빈의 손을 잡아끌었다.


응접실에 마음숲의 키움차사 네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샅공방의 요선, 보듬공방의 지나실, 검새공방의 석보, 그리고 소소공방의 목예까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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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천계_예사달의 조언 23.06.12 88 2 13쪽
49 천계_귀물씨앗이 들어오다 23.06.11 89 2 12쪽
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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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천계_새로운 동료 바나 23.06.09 94 2 13쪽
45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4 2 12쪽
44 천계_마음숲 키움차사들 23.06.08 92 2 12쪽
» 천계_공방의 고민거리 23.06.07 92 2 11쪽
42 천계_돋움다로차 23.06.06 100 2 12쪽
41 천계_다른 곳 같은 뜻 23.06.06 100 2 13쪽
40 그믐_라온향낭 23.06.05 99 2 12쪽
39 그믐_반계의 다른 모습 23.06.05 98 2 12쪽
38 그믐_버림받은 영혼 23.06.04 99 2 12쪽
37 그믐_불천수 대나무숲 23.06.03 101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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