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X또 1등 당첨
그가 침을 놓고 대기실로 나오니, 선 회장이 막 가려는 참이었다.
“회장님. 가시려고요?”
“가지, 뭐. 한의원이 코딱지만 해서 볼 것도 없는데, 뭐.”
선 회장은 자신을 정중하게 대접하지 않자 삐져서 그렇게 툭 뱉고는 한의원을 나가려했다.
그런데 선 회장의 운전기사가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잠깐만요. 기사님. 발을 다치셨나요?”
“예. 조금 전에 오른 쪽 발목을 약간 삐끗했습니다.”
“아! 지금 그 상태로는 운전하기 힘드실 텐데요? 오른쪽 발이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야 하잖아요?“
“괜찮아. 보니까 심한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예. 참을 만 합니다.”
“아. 위험해서 안 됩니다. 회장님 모시는 기사 분이 그러시면 큰일 나죠. 제가 침 놔 드릴 테니 치료받고 가세요.”
“그래. 그렇게 하지 뭐. 이삼십 분이면 되겠지 뭐.”
“아유, 아닙니다. 회장님. 저 때문에 회장님이 기다리시다니요. 그건 안 될 입니다.”
“그러다 사고 나면?”
선 회장이 나무라자 기사도 할 말이 없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시죠. 두 시간 만요.”
그는 환자 예약 스케줄을 확인한 뒤 그렇게 말했다.
“뭐? 두 시간을 여기서 기다리라고? 정 기사 치료 끝날 때까지?”
“기사님은 두 시간 기다렸다가 치료 받고, 회장님은 세 시간 기다리셔야 되겠는데요? 진찰하고 치료하고, 그러면 대충 한 시간 정도는 걸리거든요.”
“나보고 여기서 세 시간을 기다리라고?”
“원래는 예약해야되는데, 그래도 회장님 기사 분이라서 편의를 봐드리는 겁니다.”
“헐!”
“싫으시면 택시타고 먼저 가시던가요? 요 앞에 한 오 분만 걸어서 나가시면 지금 시간에는 택시 잡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내가 내 차 놔두고 택시를 왜 타?”
두 시간 후.
그는 정 기사와 마주 앉았다.
정규동. 30세, 남자.
그는 정기사의 오른쪽 발목은 대충 살펴보고 이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런 다음 진맥도 했다.
진맥하면서 양 손바닥도 살펴보았다.
손금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차트에 입력된 정 기사의 주민등록번호도 몇 번이나 보았다.
“발목 상태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네요. 오늘 하루만 치료해도 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기사님 태어난 난 시(時)를 아시나요?”
“예. 인시(寅時“03시∼05시까지)라고 들었습니다.”
“인시요? 새벽에 나셨네요?”
“예.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이 ‘너 낳고 나니까 날이 훤하게 밝아오더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으면 아버님은 건강하시고요?”
“아뇨. 아버님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가물가물 한 걸요.”
“그러면 어머님 혼자 기사님 키우셨네요.”
“예. 고생만 하시다가 재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기사님은 지금 어디 사십니까?”
“저는 신림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뇨. 제 말은 아파트나 빌라나. 뭐 그런 걸 여쭤보는 겁니다.”
“아 예. 원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님. 복권 사 보신 적 있으세요?”
“예? 복권이요?”
“예. X또 복권이나 스포츠 복권이나, 뭐, 그런 거요?”
“아 예. 예전에는 자주 샀죠. 몇 년 동안은 매주 샀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놈은 복권도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많이 샀는데도 500 원짜리 서너 번 당첨 됐나? 하도 안 되니까 재미없어서 안 산지 몇 년 됐네요. 그런데 갑자기 복권은 왜?”
“오랜만에 복권 사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이번 주만요. 아니면 다음 주 한 번 정도 더 사보시던가요. 매주 사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예? 원장님. 저 복권 당첨될 운인가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심심풀이삼아 한 번 사 보시라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원장님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기사는 마치 이미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직업을 바꾸시는 건 어떨까요?”
“왜요?”
“운전은 기사님께 잘 맞는 일이 아닙니다. 웬만하면 다른 일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대중교통 이용하시고요. 만일 나중에 돈을 많이 버셔서 차를 살 정도가 되더라도 가급적이면 기사를 두십시오. 본인이 운전은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특히 올해는요.”
“원장님. 혹시 제 사주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아까 태어난 시도 물으시는 것 보니까.”
“저는 그런 거 볼 줄 모릅니다. 아무튼 제 말 허투루 듣지 마시고요.”
“아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기사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 침을 놔 드릴 테니 침구실로 들어가시죠.”
정 기사에게 침을 놓은 후, 그는 선 회장과 진료실에서 마주 앉았다.
“회장님. 오래 기다리셔서 힘드시죠?”
“힘들긴!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막 쑤시는 게, 이런 기분 오래 만에 느껴보니까 신선한 게 아주 좋은데!”
“다행입니다. 회장님. 머지않아 정 기사님이 그만 두겠다고 할지 모릅니다.”
“왜?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게 회장님한테도 좋고, 정 기사님한테도 좋습니다. 그러니 혹시 그만 두겠다면 잡지 마시라고요.”
“아니, 무슨 소리야? 저, 친구 운전 잘해. 난 마음에 들어서 몇 년 더 시킬까 생각 중이었는데.”
“회장님하고 안 맞습니다.”
“궁합이 안 맞나? 아! 남자끼리는 궁합 그런 거 안 따지나?”
“자세한 건 말씀 드리기 그렇고, 정 기사가 그만 두겠다면 그냥 ‘그동안 수고 많았네,’ 라는 말씀만 하시고 잡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선 회장은 여전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
며칠 후 선 회장의 전화가 왔다.
-이보시게. 허 원장. 한 가지 물어봄세.-
-말씀 하십시오. 회장님.-
-혹시 자네가 정 기사한테 복권 사라고 한 적 있나?-
-예. 며칠 전에 회장님하고 같이 한의원에 오셨을 때요.-
-맞네. 소문이 맞구먼. 아니, 그 친구가 X또 복권 1등에 당첨 됐다는 소문이 있더니 오늘 기사를 그만 두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러라고 하셨어요? 안 잡으셨죠?-
-안 잡았지. 잡지 마라며?-
-아! 잘 하셨네요. 정말 잘 하셨습니다. 회장님.-
-아니. 정 기사한테는 복권사라고 귀띔해주면서 나한테는 왜 안 해줘?-
-아아! 회장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이러니까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말이 있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농담일세. 아니 그나저나 정 기사가 복권에 당첨될 줄은 어떻게 알았어?-
-그건 그냥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안 거지, 별 거 아닙니다.-
-에이! 아니면서. 알았으면서. 이보시게, 허 원장. 그러지 말고.-
-회장님. 저 진료해야합니다. 지금 대기실에서 환자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알았어. 그러면 정 기사가 그만 둘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회장니∼이임. 저, 지금 바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아아∼.-
-끊지 마. 끊지 마. 그것만 말해달라고.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그는 당장이라도 전화를 끊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의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허 원장. 내 말 듣고 있나? 전화 끊은 거야?-
-듣고 있습니다, 회장님.-
-좋아. 그러면 며칠 내로 우리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알았지?-
-회장님. 안 바쁘세요?-
-응. 안 바빠. 사람들은 내가 무지하게 바쁜 줄 아는데, 우리 회사에서 내가 제일 안 바빠. 자네, 시간 비워 놔.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
며칠 후.
선 회장이 한의원으로 오더니 그를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말이 데리고 간 거지 거의 납치나 다름없었다.
바뀐 기사가 운전하는 차는 고급 갈비집 앞에 섰다.
두 사람은 갈빗집 특실로 안내되었다.
불판 위의 갈비가 자글자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 이 집 갈비 좋아하는데, 자넨 어떤가 모르겠네. 자, 많이 드시게.”
선 회장은 잘 익은 고기 몇 점을 그의 앞에 내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오! 맛있네요. 정말.”
“이 집 잘해. 맛있어. 비싸서 그렇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맛만 조금 보겠습니다.”
“에헤이! 그런 뜻 아니란 게 알면서 왜 투정을 부리고 그러나?”
선 회장은 아주 우호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고기 드시고 내가 묻는 말에 다 대답해야 하네. 만일 안 하면 이 갈비 값 자네가 다 내게. 난 한 푼도 안 낼 거야!”
“아! 치사합니다, 정말. 이까짓 거 얼마나 된다고요!”
“그만큼 궁금하다는 말 아닌가? 궁금해서 밤에 잠이 안 올 지경이야. 다 말하게.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 기사. 오늘 교통사고 났어. 지금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대.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나 봐.”
“아아! 어떡해? 내가 웬만하면 운전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는데. 그래서 회장님 운전기사도 그만두라고 했던 거거든요. 말 안 듣고 기어코 일을 저질렀네요.”
“자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정 기사가 교통사고 날 줄 어떻게 알았냐고?”
“회장님께 그 말씀 드리기 전에 분명하게 해 둘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저는 관상가도 아니고, 사주를 보는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한의사일 뿐입니다. 다만 관상이나 사주를 보는 게 병을 진단하는데 도움이 될 때가 있기 때문에 공부를 조금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런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알지. 계속하시게.”
“처음엔 발목을 치료하려고 제 진료실에서 정 기사와 마주 앉았는데, 그의 관상과 손금과 정 기사의 현실이 잘 맞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안 맞던가?”
“관상에서는 얼굴을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눈썹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까지를 상정(上停)이라하여, 주로 초년 운을 봅니다. 그런데 정 기사의 초년 운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마가 넓고 반듯한데다 윤기가 있고요.”
“그래? 난 그렇게 자주 봐도 무심결에 봐서 그런 생각은 안 했는데. 그래서?”
선 회장은 귀를 쫑긋 세웠다.
“관상학적으로 보면 그는 지금쯤 청년 사업가나, 스포츠 스타, 아니면 연예인으로 꽤 큰 부를 얻어야 하거든요. 그게 아니면 부모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 받거 나요. 물론 관상이라는 게 100% 맞는 건 아니지만요.”
“그렇겠지.”
“그런데 정기사는 어느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잖아요. 나이 서른이면 초년의 끝물인데, 부모님은 두 분 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하고, 원룸에 살고 있다면 말이죠.”
“음. 그렇군.”
“그런데 손금을 보니 생명선과 감정선 사이에 별 모양의 손금이 나 있었습니다. 양 손에 다요.”
“양 손 다?”
“예. 양 손에 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렇다면 적중률이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겠구먼?”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 갑자기 큰 행운이 찾아온다고 보는 거거든요. 특히 금전적으로요.”
“아! 알겠네. 그래서 X또 복권을 사라고 한 거구먼?”
“뿐만 아니라 사주에도 올해 재물 운이 크게 들어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회장님의 운전기사 하는 사람이 큰 재물 운이 들어올 일이 뭐가 있을까요? 회장님이 월급을 열배쯤 올려주시면 모를까요?”
“음, 그렇군. 자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네.”
선 회장은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우더니 말했다.
“그래서 복권을 사라고 한 건 이해가 되네. 그런데 내가 정말 궁금한 거는 바로 이건데 말이야. 정 기사가 그만 두겠다면 말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은 왜 한 건가?”
“아, 그거요? 그건 아주 특이한 경웁니다.”
그는 남은 갈비 한 점을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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