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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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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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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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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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6)

DUMMY

웅녀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아주 먼 옛날 자신의 탄생을 추억했다.

아주 먼 옛날, 한반도의 주인이 가려지지 않았을 시절. 그녀는 보잘것없는 암곰이었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풀과 고기를 뜯고, 겁 없이 산을 오르는 나약한 인간을 학살했다.

그러던 중 암곰은 금수답지 않은 고뇌를 되뇌었다.


‘나는 왜 이곳에서 일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렇게 사는 게 생의 정답일까.’

‘조금 더 유의미한 삶을 사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번뇌를 거듭한 지 얼마가 지났을까.

텅 비고 아무 의미 없던 하늘이 열리며 천지가 개벽했다.

개벽한 하늘에서 고고이 걸음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숭숭한 하늘을 우러러 암곰은 처음으로 자신의 동물으로서 가지는 본능에 거부했다.


‘인간이 되고 싶다.’


기이한 일이었다.

암곰은 이 설산에 찾아오는 인간이란 인간은 전부 학살했다. 암곰은 그들에 비해서 확연히 우월한 존재였다. 그랬기에 암곰은 인간을 경멸했고, 오시했다. 허나 어째서.

자신이 동경하는 이가 인간과 같은 팔과 다리, 인체 구조를 가졌기 때문일까. 그의 선망의 대상은 인간이 되었다.

마침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선택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암곰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알아챘다.

자신이 바라고 원해오던 선망의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암곰의 옆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은 암범을 마주했다.

그러자 자신의 선망의 대상이 입을 열었다.


[내 너희의 자격을 시험하겠다. 이 쑥과 마늘만을 식사로 삼으며 저기 해가 들지 않는 그늘지고, 축축하고, 서늘한 곳에서 100일을 버티면 내가 너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그 말에 암범과 암곰은 서로 마늘과 쑥을 한 움큼 그러쥐고는 동굴로 입장했다. 동굴의 문은 특별한 주술이라도 걸린 듯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동굴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칠흑의 장소로 변모시켰다.


하루. 너무도 쉬웠다.

이틀. 여전히 좋았다.

열흘. 아직 할 만했다.

스무날. 인간이 되기 위한 욕망을 서서히 드러냈다.

달포가 지나자 범은 고통스러운 고행을 견디지 못 하고 바깥으로 향했다. 범이 바깥으로 나가려 하자 문은 마법처럼 열렸다가 곰이 나오지 않는 것을 파악 후 재차 닫혔다.

아흔아홉 번째 날. 곰은 첫째날보다 무척이나 수척해지고 지친 모습이었다. 인간이 되는 것에 왜 그리 목맸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침내 100일이 지나던 시점.

곰은 날짜 개념을 전부 잊고 이제 몇 장(壯) 남지 않은 시들어 말라 버린 쑥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참으로 갸륵하구나. 내 100일의 시련을 견딘 너를 인간으로 하고 내 첩으로 삼겠다.]


거의 생명을 잃어가던 곰은 신의 몇 마디에 벌떡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달려갔다.

결국 그렇게 곰은 인간이 되었고, 그녀가 선망하던 신, 환웅은 웅녀와 혼인해 아이를 출산하고, 그것이 단군왕검이 이 한반도에 하늘을 연 계기가 되었다. (開天節)


***


[라고 알고 있겠지.]


웅녀의 회상을 범이 막아섰다.


[뭘 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러나.]

[역사는 당연하고 설화나 신화마저 승자들의 입맛에 맞춰 가공되는 사회라니. 너무 부조리하지 않나.]


범이 울분을 토로했다. 아무래도 이찬과 세상이 생각하는 단군신화와 범의 기억과는 차별화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성공한 설화를 얻고 싶었으면 네가 나와의 결투에서 최소 무승부는 가져갔어야 했다.]


웅녀가 범을 향해 일소를 보냈다.


[변변찮은 이름도 없는 마당에 주제넘게 설화라니. 가당키나 한가.]


그때 결투에서 승리한 암곰은 환웅으로부터 '웅녀'라고 하는 고유의 신명을 받았다. 반면 결투에서 처참히 패배한 암범은 마땅히 불릴 이름 없이 오직 범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렇게 평범한 암범은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저 깊은 산속에서 시신조차 행방불명되며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다시 죽음에서 생환한 것은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이후였다.


[허억!]


산속에서 시신 채로 부활한 암범은 더듬더듬 앞발로 제 몸을 만졌다.


'살았다.'


살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살아났다고 말하는 편이 더 타당했다. 그렇게 살아난 암범은 어째서인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암범이 먼저 깨달은 것은 자신의 존재 양식의 변화였다.


숨을 쉬어 호흡기에 산소를 공급하고, 동물을 잡아먹어 단백질을 보충한다. 물을 마셔 갈증을 해소하고 심장이 피를 공급해 신체 부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러한 포유 동물의 생존 방식을 크게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암범은 이러한 위화감 속에서 다른 위화감을 발견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


암범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자신은 물을 마시지 않고, 단백질을 보충하지 않았다.

종국에는 숨조차 쉬지 않으며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다시 깨어난 자신은 여전히 숨을 쉬지 않았고, 갈증이 물을 불러오지 않았으며,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고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증가한 자신의 지능으로부터 암범은 많은 모의실험을 거듭했다.


그렇게 그녀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의 염원으로 자신은 부활했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언젠가 자신을 숭상했던 인간일 수도, 또는 자신이 언젠가 죽인 인간 후손의 저주일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부활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어떤 미지의 존재가 내린 시련일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았다는 것이었고, 암범은 그 사실에 미쳐 날뛸 듯 좋았다. 그때, 그녀의 앞으로 어떤 종이 권자본이 하나 날아왔다. 권자본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설산에 파묻혔고, 암범은 자신의 두툼한 앞발을 이용해 그 말린 권자본을 펼쳐보였다.

그것의 내용을 확인한 암범은 복잡미묘한 자신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허나 대개 나쁜 것은 좋은 것보다 과하게 부풀린다.

그곳에는 자신의 패배가 너무나도 명확히 기록된 설화이자 신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저술되어 있었다.

이것이 어디에서 제작되었고, 어디에서부터 날아왔는지는 더 이상 암범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패배가 이 한반도 역사에 너무도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이었고, 암범은 이 사실에 분노했다.


[너는 설화를 날조했다.]

[하지만 그건 이제 진실이 되었지.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었어.]


반박하는 범을 향해 웅녀가 여전히 조소를 머금었다. 범은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웅녀에게 고정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의식이 깃든 촌장의 지팡이 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본디 그 설화는 나의 것이었다.]


웅녀가 말했고.


[아니, 그건 처음부터 나와 내 가족들의 거였다.]


이어 범이 반박했다.

범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앞 발톱과도 같이 여기는 촌장의 지팡이를 웅녀에게 휘둘렀다. 웅녀는 가볍게 그 일격을 막아냈으나 진(眞) 공격은 겨우 지팡이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이다!]


범의 신호에 맞춰 이찬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훌쩍 웅녀의 위로 도약한 이찬은 웅녀를 넘어 그녀의 뒤에 있는 금서관으로 내달렸다. 촌장의 모습을 한 범이 금서관을 향해 지팡이를 던지자 이찬이 그것을 받아들어 금서관의 위에 가로로 박아넣었다. 그러자 금서관의 돌문이 찬찬히 열리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찬은 생각을 거듭할 새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 시각 웅녀는 기겁했다.

절대 이찬을 금서관으로 보내서는 안 되었다. 그곳에는 전 우주를 위협했던 극악무도의 행동자가 행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웅녀는 자신과 맞대던 범을 뿌리치고 금서관을 부술 기세로 달려갔다. 하지만 너무도 늦은 후였다. 범이 가쁜 웅녀보다 빠르게 금서관의 앞을 차지했고, 웅녀를 막아섰다.


[나를 막지 마라! 저 녀석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내 앞을 막는 것이냐!]


범은 코웃음쳤다.

이찬의 목표는 관념의 멸망이다. 이찬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긴 시간 전 한 번 경험해 본 범은 느긋하게 촌장의 몸으로 뒷짐을 졌다.


[너는 내 뒤로 지나갈 수 없다.]

[네가 뭔데 그걸 결정하느냐.]


웅녀의 그릇에서 가공할 상상력이 찰랑찰랑 내비치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상상력을 온전히 담기에 그녀의 그릇은 너무도 작았다.

범은 너무도 나약했다. 그릇은 당장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웠고, 그 그릇에 담긴 물체마저 썩어갈 듯했다.

웅녀와 비교하기에 범은 너무나도 약했다. 웅녀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는 순간 자신은 필히 죽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범은 웅녀와 마지막 결투를 벌였다. 끝에 끝까지 가면, 분명 자신의 진실된 후손은 마침내 제 목표를 이루고 말 테니까.

그러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이찬의 발판 중 하나가 되었다.


***


이찬이 금서관의 내부로 진입했다. 지팡이가 툭 하고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금서관의 문이 닫혔다. 아무래도 범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한 배려인 듯 보였다.


탁!


금서관의 입구를 지나자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이찬은 그 계단을 밟았다.

오랜 기간 관리가 되지 않은 듯 한 계단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계단은 올라가는 것이 우려될 만큼 무량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이찬은 재빠르게 달려 계단의 끝으로 향했다.

그 끝에 도달한 순간 이찬은 자신이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들어왔음을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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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범 (3) 24.08.25 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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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범 (1) 24.08.21 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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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대멸종 (8) 24.07.31 9 0 9쪽
136 대멸종 (7) 24.07.28 1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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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대멸종 (5) 24.07.24 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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