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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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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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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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15)

DUMMY

이찬의 높고 광활한 시야에 만목수참한 참화가 드러났다.

바람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당도한 이찬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감각되는 상상력의 무질서 속에서 이찬은 그것을 정리했다. 분류하고, 나눴다.

남은 것은 정돈된 기류였다.


탓!


이찬의 뒤로 호아가 착지했다. 이찬은 절대 호아를 봐 주며 움직이지 않았다. 전투에 쓸 상상력은 유지하되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호아는 그런 이찬의 속력을 가뿐히 따라잡았다.


“헉, 허억··· ···.”


하지만 세월과 경험의 한계는 결코 무시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찬은 호아를 슬쩍 일별하고 정면으로 달렸다.

호아가 그런 이찬을 보고 그를 쫓기 위해 발돋움을 하려는 순간 그의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넌 날 따라오지 마. 대신 네가 느끼기에 네 상상력이랑 제일 비슷한 상상력을 따라가. 거기서 전투가 일어나면 걔를 도와.]


호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감았다. 이찬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이찬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묘한 상상력이 발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격인 범의 격과 유사한 상상력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호아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밑··· ···.”


상상력이 감지되자 호아가 양손을 감싸 쥐고 아래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아앙!


폭탄이 떨어진 것만큼의 폭음이 일며 바닥에 큰 구멍이 생겨났다. 호아는 그 틈으로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뛰어들었다. 바닥의 아래로 착지한 호아는 주변을 살폈다. 동굴 같은 형태와 선선한 공기. 호아에게 느껴지는 묘한 기름 냄새와 쇠 냄새.

호아는 자신의 후각을 애써 차단하고 범람하는 상상력의 파도로 향했다. 그는 상상력의 파도로 향하는 도중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동굴로 보이는 긴 구멍 속에서 발견된 철로(鐵路).

철로라는 것을 처음 본 그는 홀린 듯이 그것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무작정, 홀린 듯 철로를 따라가기 시작한 호아는 철로의 끝에서 거대한 물체를 발견했다. 호아는 그것을 보자마자 긴장 상태에 돌입했고, 그것은 두 눈에 안광을 들이며 금방이라도 호아를 잡아먹을 것처럼 보였다.

그가 긴장하자 호아의 머리에서 귀가 돋아나기 시작했고, 엉덩이에서는 꼬리가 솟아났으며 눈이 점점 야생의 그것으로 변했다.


“으으··· ···.”


두려움은 긴장으로 변모하여 호아 자신을 위협했다. 호아가 눈에 불을 킨 괴물을 향해 달려가 손톱으로 긁으려는 순간.


퍼어엉!


그 괴물이 굉음과 함께 터지며 주변을 불로 적셨다. 호아가 당황하며 뒤로 훌쩍 물러나자 이상한 광경이 드러났다.

상상력의 위치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잠시 호기심이라는 본능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것이나 그가 명령받은 것은 전투를 도우라는 것이었다. 호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전투의 주체가 나타나 있었다.

호아는 그 전투의 양상을 분석하지도 않고 우선적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아!”


포효와 함께 내질러진 주먹이 어떤 것에 닿았다.


***


“아무래도 걔 혼자는 마신을 상대하긴 어렵겠지. 아무리 큰 부상을 입었어도 마신은 마신이니까.”


이찬은 주연에게 발라크를 잡으라는 것을 역할로 부여했다. 분명 무리한 명령인 것은 맞았다. 잠재력이야 어찌됐든 잠재력. 그러니까 잠재하고 있는 영역이고, 그것이 빙산의 일각이라 할지라도 겨우 일각으로 마신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찬이 그 명령에 조금 후회하고 있을 때쯤 나타난 것이 호아였다.

호아는 전직 주신급 성주의 주민이었고,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마을 내에서 촉망받는 주민이었다. 촌장과의 대화 중 화두가 됐던 내용은 어쩌면 호아가 처음으로 이 마을 밖을 나서는 주민이 됐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기본적으로 마을의 주민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DMZ 밖을 나가지 못했다. 그들의 존재가 나라의 귀에 들어간다면 마을의 주민은 물론 남과 북의 경계 또한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그 시선을 뚫는다고 해도 문제는 성주의 압박에 있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DMZ 내부에 포진된 물리적 결계를 뚫을 수 없었다. 사회적 시선을 뚫는다면 물리적인 결계에. 물리적은 결계를 뚫는다면 사회적인 관심에.

두 가지의 시련이 그들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허나 호아는 달랐다. 날 때부터 다른 이들과 다른 격, 상상력 운용에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만약 이러한 존재가 한국에서 나왔다면 아마 SNS에 다음과 같은 키워드와 함께 소개됐을 것이다.


슈퍼스타.


호아는 슈퍼스타 기질을 타고난 주민이었고, 그 때문에 약간의 성장제가 가미된다면 분명 범의 주민을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때문인가.”


그런 주민과 촌장의 꿈은 이찬의 등장으로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잠시 마을에서 있었던 마지막 일을 상기했다.


***


문득 촌장의 죽은 몸에 잔류한 범의 상상력을 끌어모아 그녀의 의식을 유지시켰다.


[용케도 해냈군.]


“안타깝게도 실패했죠.”


서로의 처지를 대변하며 이찬과 이름 없는 범은 서로를 이해했다.


[후손이여. 부탁이 하나 있네.]


“말씀하시죠.”


이찬은 이젠 손바닥의 크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신급 성주를 자신의 양 손바닥에 올렸다. 한반도의 시작을 연 성주에게 하는 마지막 예우(禮遇)였다. 이름 없는 범은 천천히 네 발로 서 물었다.


[내 주민의 멸족을 막아 주겠는가.]


주민의 멸족은 성주의 입장에서 곧 죽음을 의미했다.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야기는 잊히고, 기억되지 않고, 상상되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성주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는 뜻이 된다. 기억되지 않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야기와 함께 잊어진다. 이찬은 그런 범의 부탁이 자신의 존속을 위한 알량한 처절함으로 보였다.


“그런 부탁은··· ···.”


하지만 이찬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범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후손은 멸족을 막아 달라는 부탁이 달갑지 않을 것이네. 객인의 입장에서 보기에 내 영속을 지켜 달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겠지. 하지만 내 의중은 그게 아니네. 그저 저 아이가. 가족과 친구를 잃은 저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네.]


이찬은 여전히 남은 불신을 극한까지 활용해 그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말로 이찬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저 아이가 바치는 상상력으로는 내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네. 알고 있지 않은가. 부탁하네. 저 아이를 살려주게.]


이찬은 결국 범의 부탁을 수용했다.

이찬이 범을 신단수의 뿌리에 올렸다. 그리곤 신에게 화답하는 의미로 단 한 번의 절을 행했다. 범은 그 모습을 보더니 우수를 한껏 담은 눈으로 이찬을 바라보았다. 이내 이찬이 몸을 돌려 호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범은 이찬을 일별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풍영했다.


[춘우세부적(春雨細不滴)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 설진남계창(雪盡南溪漲) 초아다소생(草芽多小生).]


정몽주-춘흥(春興)


[나도 아직 삶을 갈망하누나··· ···.]


범의 형상이 흩어지며 지구의 상상력으로 흩어져 동화되려 했다. 정당한 수순이었다.

잊힌 존재의 상상력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 흩어지기 마련. 그러니까 이질(異質)에서 동질(同質)로. 돌연변이에서 당연한 사연의 흐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상상력을 기저에 두고 피어난 화(花)가 작은 범의 형상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막대했다. 길을 가던 이찬은 그 광경을 슬쩍 훑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존재에게 마음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고, 이찬은 그렇게 가치관을 확립해 나갔다.

그때, 흩어지던 상상력이 일제히 자석처럼 이찬에게 끌려갔다. 상상력들은 이찬의 팔과 다리. 몸통과 머리 등등 부위 가리지 않고 이찬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이찬은 그 상황을 모르는 듯 호아를 설득해 마을 밖으로 나섰다. 범이 잊혔기 때문일까, 물리적 결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으윽··· ···.]


범은 눈을 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상상력을 전부 소모했고, 이젠 자신의 성지를 유지할 상상력도, 제 존재를 유지할 상상력도, 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 소멸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떴다.

자신이 눈을 감은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범은 비슷한 상황을 일전에 겪은 적 있었다. 한반도에서 단군 신화가 성행하며 수명을 다해 사망했던 범이 다시 살아난 일이었다.


[내가 왜 살아 있지?]


나지막이 범이 독백했고, 그 독백에 답을 주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


[이제 세 번째일진대 아직도 조건을 잘 모르겠군.]


초월적인 신언이 범에게 꽂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신언의 주인을 마주했다.


[반갑네. 소멸한 폐위 성주여.]


방위를 수호하는 오룡 중 하나, 서방을 수호하는 용, 백룡이 한반도의 폐위된 주신급 성주를 맞이했다.


작가의말

금일은 연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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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대멸종 (16) 24.09.11 6 0 10쪽
» 대멸종 (15) 24.09.11 6 0 9쪽
154 대멸종 (14) 24.09.08 8 0 10쪽
153 범 (8) 24.09.06 4 0 11쪽
152 범 (7) 24.09.04 5 0 10쪽
151 범 (6) 24.09.01 6 0 10쪽
150 범 (5) 24.08.30 8 0 10쪽
149 범 (4) 24.08.28 9 0 10쪽
148 범 (3) 24.08.25 8 0 10쪽
147 범 (2) 24.08.23 8 0 10쪽
146 범 (1) 24.08.21 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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