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연재수 :
159 회
조회수 :
7,842
추천수 :
30
글자수 :
723,372

작성
24.09.06 18:00
조회
4
추천
0
글자
11쪽

범 (8)

DUMMY

이찬은 자신의 감각을 한층 끌어올렸다.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미지의 공간에서 부상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계획에 메울 수 없는 큰 차질이 생긴다. 이찬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기 싫었다.

설령 눈앞에 있는 이 거머리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이찬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경계를 늦추지 않을 것이었다.


[저는 워쳐. 금서관의 사서입니다.]


"자세히 말해."


[크흠. 꽤나 까칠하시군요. 저는 전대 행동자께서 후대의 행동자에게 남긴 유산입니다. 천 년에 버금가는 인고의 시간을 견딘 끝에 이찬 님께서 이곳으로 와 주신 것이죠,]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야."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워쳐입니다. 이명은 '감시하는 자'죠. 저는 행동자의 향방을 감시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여기엔 내가 원하는 정보가 있나?"


[물론입니다. 이찬 님께서 원하시는 정보는 뭐든 있지요. 사서인 저를 통해 책을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한테 감사받으려고 하는 일 아니야. 내가 찾는 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네. 안내해."


[원하지 않는 정보도 있을 테지만.]


"뭐라고?"


[아닙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찬과 워쳐가 느지막한 속도로 금서관의 내부를 걸었다. 이찬은 워쳐에게 속도를 빠르게 할 것을 종용하려 했지만 혹여나 워쳐의 심기를 건드려 이것이 작지 않은 싸움으로 번진다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방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이찬은 느리지만 안전한 길을 택했다.

이찬은 그 사이 워쳐에게 궁금증을 풀었다.


"이 앞 긴 복도에 함정이 있던데. 네 짓인가?"


그러자 이찬의 앞을 걷던 워쳐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둔탁한 머리를.


[저는 관리자이자 사서일 뿐, 이곳을 만드신 건 전대 행동자이자 제 창조주인 필리브크랩트 님입니다.]


"그럼, 함정에 상상력을 넣어 놓은 것 또한 전대 행동자?"


[그렇습니다. 전대 행동자께서는 이러한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장치를 이 장소 여러 곳에 설치해 두셨습니다.]


"그 상상력. 어중이떠중이의 것이 아니야. 유지하는 데만 해도 막대한 비용이 들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함정에 담긴 상상력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찬은 문득 ‘감시하는 자’의 능력의 한계가 궁금해졌다. 이찬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워쳐에게 질문을 하나 건넸다.


"바깥에 일어나는 일도 아냐?"


[제 눈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워쳐가 이찬을 향해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가진 하나의 눈을 번뜩 빛냈다. 그것은 가히 세상을 꿰뚫어 보는 천리안, 더 나아가 만리안의 역할도 겸하는 듯했다. 이찬은 애써 당황하지 않았고, 워쳐는 다시 한번 이찬을 안내했다.


"금서관은 얼마나 넓지?"


[규모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거라면, 저도 모릅니다.]


"뭐? 사서가 도서관의 크기를 모른다고."


[사실 이러한 형태의 공간은 전대 행동자 말고도 많은 행동자가 제작하였습니다. 임의이자 가상의 공간이죠. 꼭 도서관뿐만 아니라 의회, 학교 등 많은 장소가 있었습니다. 필리브크랩트께선 도서관의 형태로 이 장소를 꾸민 것이죠.]


"성지 같은 건가?"


[비슷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지는 시전자인 성주의 상상력에 근거하여 그 크기와 재현도가 비례하지만 이곳은 입장하는 존재의 상상력에 따라 크기가 비례합니다.]


그 말은 곧, 이찬의 상상력이 이찬이 열람할 수 있는 책의 수를 증축한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었다.


[저도 이런 것은 처음 보는군요. 이 도서관이 이토록 넓었다니.]


이찬은 워쳐의 칭찬이 묘하게 의문과 호기심을 동반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곳입니다. 이곳에 아마 이찬께서 원하시는 정보가 있을 겁니다.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워쳐가 이찬을 안내하곤 뒤를 돌아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이찬은 워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검을 쥐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워쳐의 형상이 저 멀리 어둠에 갇혀 보이지 않았다.

이찬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자신의 앞에 나열된 책장을 보며 이찬은 전대 행동자인 필리브크랩트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서 어떤 정보든 모든 것을 빼 나갈 생각을 하는 이찬이었기에 그는 망설임없이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책을 꺼내 손에 장착하듯 들었다.


『행동자』


이찬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분명 이곳에 할애할 시간은 정말 많지 않다. 길게 잡아야 삼십 분. 하지만 이찬은 묘한 안정감을 주는 이 공간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 기시감을 선사하는 책이라니, 어떤 인간이 이런 공간을 사사로운 용도로 쓰지 않을 수 있던가.


“응?”


이찬이 책의 뒷표지를 보자 의구심을 드러냈다. 분명 이전 풍백의 서재에서 보았던 책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개정판 표시.

개정판이란 기존에 있던 책의 내용을 보완하여 재출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건 복간된 책이거나.


“직접 이곳에서 개정을 했다는 건가?”


이찬은 책을 팽개쳐 두고 다른 책을 집었다.


『관념화에 관하여』


관념화.

이찬이 새까맣게 잊고 있던 법칙이었다.

《관념》의 존재를 몰랐던 이들이 이찬, 즉 행동자에 의해 《관념》을 인식했다면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지금까지 이찬에 의해 ‘관념화’된 인간은 가스페르뿐이었다. 허나 이제 이런 추억과 감성팔이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이찬은 바로 다음 책을 집었다.


『’대멸종’에 대비하는 법』


이찬은 그 책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넘겼다. 한 치의 움직임도, 시간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당신이 몇 대 행동자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다음일 수도, 나로부터 몇십 번은 떨어진 후대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이토록 유심하게 들여다보는 이유는 전자든 후자든 같은 입장일 거라 확신한다.

나는 신이 아니다, 저 《관념》의 성주도, 당신들이 그토록 바라는 선구자도 아니다.


이찬은 따분하게 몇 페이지를 통으로 건너뛰었다. 단순히 쓸데없는 정보가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페이지 건너뛰기는 이 책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이찬이 놀란 점은 통으로 건너뛴 페이지와 이전의 페이지가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방금 우리 후대가 책을 몇 페이지 건너뛴 것 같은데. 나도 내 TMI에는 관심이 없으니 넘어가자고.


이찬이 흠칫하며 다음 페이지를 향했다.


아마 이 내용이 우리 후대가 이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일단 대멸종을 막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대멸종이 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대멸종.

아마 후대가 알고 있는 대멸종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리라 짐작한다. 보통 대멸종이란··· ···, 아 알았어. 더 말 안 할게.

내가 겪은 대멸종은, 겨우 종족의 멸망 따위가 아니다. 사회, 체계, 규칙의 붕괴. 아마 《관념》의 고지식하고 무식하게 강한 쓰레기들은 행동자 하나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워 먹을 것이다. 네가 사는 집은 물론 동네, 나라, 어지간히 잡고 싶으면 행성 전체를 뒤흔들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관념》의 상상력을 견뎌본 적 없는 행성은 과부화에 걸릴 것이고, 아마 자신이 가진 최흉의 프로토콜을 작동할 거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대멸종이다. 이 대멸종을 막지 못한다면 아마 후대의 행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흔적만을 남긴 채 사멸할 것이다.


이찬은 빠르고 정확하게 내용을 읽어 나갔고, 완독한 책은 자신의 옆에 가지런히 쌓아 두었다.


『성지와 성지화』


이어 이찬은 성지에 관한 책을 펼쳤다.


성지.

아마 당신이 신이고 성주라면 분명 자신의 성지를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뭐? 성주가 아니라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성지는 성주가 자신만의 세계를 관념에 구현해 놓은 것으로 이 성지의 주인인 성주는 성지에서 무한에 가까운 상상력을 가지고 완연한 본신의 힘을 발현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성지가 아닌 곳에서 발현하는 것이 바로 ‘성지화’다.

성지화를 발현하게 되면 성주를 기준하여 일정한 반경으로 자신의 성지가 구체화된다. 성주가 아니어도 성지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행동자라면 가능하다. 행동자··· ···. 내가 그리 좋아하는 이름은 아니다, 행동자는 결코 행성 간을 이동하는 것에만 능력이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뭐 아무튼 자신이 성주처럼 성지를 발현해 성주와 맞서고 싶다면 응원한다.

응? 성지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알려줘야 하지 않냐고?


마치 이찬의 마음을 꿰뚫은 듯 책의 저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 낯선 이야기 속에서 이찬은 질문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몰라.

성지라는 건 원래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는 거야. 방법 알아서 따라하면 그게 네 성지냐? 내 성지지.


이찬은 머리를 짚으며 책을 옆으로 쌓았다.

이외에도 대여섯 권의 책이 이찬의 옆에 차곡차곡 쌓였고, 이찬은 그 책을 가지고 다시 워쳐에게로 향했다.


“책 빌릴 수 있지?”


워쳐는 입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기관의 한 쪽을 올렸다.


[물론입니다.]


이찬은 책을 가지고 워쳐를 지나쳐 앞으로 향했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입구가 점점 좁아지는 형태였기에 이찬은 책을 바깥으로 던져 놓고 어깨를 비집어 나가는 데 성공했다.

워쳐가 멀어지는 이찬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진정한 고행길의 시작이로다··· ···.]


***


이찬은 바깥으로 나와 자신이 던진 책을 한데 모았다.


쿵!

쿵!

쿵!


바깥에서 넓은 보폭의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찬이 기감을 집중해 격과 상상력을 느끼니, 그것은 웅녀였다.

치열한 혈투 끝에 범이 패배한 듯했다.

이찬은 불안에 휩싸였다. 이미 범은 패했고, 이찬은 당장 저것과 맞댈 힘이 없다.

그가 뒤를 돌아 워쳐를 마주했지만 이미 워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위기 속에서 이찬은 기지를 발휘했다.

눈앞에 놓인 샛노란 색의 버튼을 발견했고, 이찬은 몸을 이끌어 노란 버튼을 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이찬의 눈에 복도로 진입한 웅녀가 보였다. 그녀는 이미 범과의 사투에서 거의 넝마가 되어 있었다.


[네 이놈, 드디어 잡았다. 내가 널 잡고 새로운 설화를 쌓겠··· ···.]


웅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복도의 사방면에 깔린 상상력 담긴 가시가 웅녀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캉!


웅녀가 당황하며 팔을 뻗어 막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찬에게 다가오는 순간순간마다 송곳에 노출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丁)에도 불구하고 주신의 위엄은 녹록지 않은 것인가 이찬과의 거리가 채 얼마 남지 않은 순간.

마지막 송곳이 길게 뻗친 웅녀의 팔과 그로부터 이어진 몸뚱어리를 통째로 으깼다.

주신급 성주의 최상급 그릇은 그렇게 파괴되고 말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미지의 편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미지의 편린> 업로드 날짜는 매주 일, 수, 금 18시입니다. 23.12.03 30 0 -
159 대멸종 (19) 24.09.18 3 0 10쪽
158 대멸종 (18) 24.09.15 4 0 10쪽
157 대멸종 (17) 24.09.13 5 0 11쪽
156 대멸종 (16) 24.09.11 6 0 10쪽
155 대멸종 (15) 24.09.11 6 0 9쪽
154 대멸종 (14) 24.09.08 8 0 10쪽
» 범 (8) 24.09.06 5 0 11쪽
152 범 (7) 24.09.04 5 0 10쪽
151 범 (6) 24.09.01 6 0 10쪽
150 범 (5) 24.08.30 8 0 10쪽
149 범 (4) 24.08.28 9 0 10쪽
148 범 (3) 24.08.25 8 0 10쪽
147 범 (2) 24.08.23 8 0 10쪽
146 범 (1) 24.08.21 9 0 10쪽
145 대멸종 (13) 24.08.18 8 0 10쪽
144 대멸종 (12) 24.08.16 12 0 9쪽
143 대멸종 (11) 24.08.14 7 0 10쪽
142 대멸종 (10) 24.08.11 9 0 10쪽
141 도룡지기 (3) 24.08.09 8 0 10쪽
140 도룡지기 (2) 24.08.07 8 0 10쪽
139 도룡지기 (1) 24.08.04 8 0 10쪽
138 대멸종 (9) 24.08.02 9 0 10쪽
137 대멸종 (8) 24.07.31 7 0 9쪽
136 대멸종 (7) 24.07.28 10 0 10쪽
135 대멸종 (6) 24.07.26 12 0 11쪽
134 대멸종 (5) 24.07.24 8 0 10쪽
133 대멸종 (4) 24.07.21 7 0 10쪽
132 대멸종 (3) 24.07.19 8 0 9쪽
131 대멸종 (2) 24.07.17 10 0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