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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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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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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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7)

DUMMY

이찬이 먼지를 파헤치며 금서관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서관을 깊게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먼지는 배가 되어 늘어났고 설상가상 먼지로 인해 호흡도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관리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임시방편으로 이찬은 풍백의 격을 발현해 아주 얕은 바람으로 제 주위에 포진한 먼지를 밀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생명체의 손길을 하나도 타지 않은 복도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앞은 어두운 내부와 먼지 때문에 마치 안대로 자신의 눈을 가린 것인 양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강한 바람으로 먼지를 날려 버릴까 생각해 보았지만 어차피 날아간 먼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되려 정신만 사나워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복도는 계단만큼이나 길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찬은 복도에서 함부로 내달릴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뭔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쿵!


저 먼 위에서 단단한 두 물체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범과 웅녀가 혈투를 벌이고 있음을 암시했다. 순간 이찬은 웅녀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했다.

이찬이 속도를 높이자 겉에 둘린 바람으로 이루어진 장막이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발현되었다. 그러자 벽면에 붙어 있던 두터운 먼지층이 한 번에 밝게 걷혔다. 이찬은 왼쪽 걷힌 벽면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먼지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한 요인이었다.

먼지 걷힌 벽면에는 굵고 뾰족한 가시가 수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찬은 당황하여 바람을 발현해 자신이 지나온 뒤쪽과 자신이 지나갈 앞쪽, 거기에 더해 반대편 즉 오른쪽까지 일시적으로 먼지를 걷었다. 모두 하나같이 굵고 뾰족한 가시가 있었다. 아니, 가시라는 나약한 단어 따위로 치부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것은 송곳이었다.

저것에 찔리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송곳이 수십, 수백개가 나열되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격이 담겨 있어. 그것도 잘 벼려진··· ···.’


아마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망타진하듯 차례차례 찔린다면 상대가 누구든지 짓이기고 으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찬은 괜스레 소름이 돋아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송곳이 있는 것을 못 봤을 때는 별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복도가 지금은 너무도 위험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는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옮겼고, 그럼에도 복도는 끝을 보이지 않았다. 이찬은 더욱 불안해져 걸음을 재차 빨리했고, 마침내 복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복도의 끝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난데없는 백색의 불빛 때문이었다.

이토록 어둡고 칙칙한 공간에 백색의 조명이라니.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찬은 그런 것 따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빠르게 이 소름 돋는 복도를 빠져나기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허억!”


거친 숨을 단 한 번 몰아쉬며 이찬은 복도를 빠져나왔다. 복도를 빠져나와 이찬은 숙인 고개를 들며 방안의 정경을 목도했다.

정경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바로 정경이고, 절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과 차례대로 빨간색. 검은색. 녹색으로 깔 맞춤되어 있는 책들의 나열.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목재 책상과 의자. 백색 조명과 나무의 갈색으로 칠해진 방에서 이찬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렇게 방안을 여유로이 둘러보던 이찬은 순간 복도의 옆에 위치한 작은 버튼을 마주했다. 그것은 흰빛과 갈색이 감도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노란색이었고, 이찬은 그것을 눌러 보려다 알지 못하는 것을 건드리면 좋은 꼴을 못 본다는 생각에 당장 폈던 손가락을 도로 굽혔다.


“말끔하네. 복도랑은 다르게.”


이찬은 깔끔한 방의 모습에 경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복도는 먼지에 층이 쌓여 벽에 드러난 송곳도 보이지 않았으나 서재와 같은 방은 먼지 불가침 조약이라도 맺은 것인지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구석진 모퉁이에서도 먼지 하나 없었다.

이찬은 뒤를 돌아 복도와 방이 맞닿는 경계선을 바라보았다. 정말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먼지는 방 바깥을 웃돌 뿐 절대 내부로 침투하지는 않았다.


“··· ···시간이 없어.”


이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서 책을 읽고 전대 행동자가 남긴 묘리를 깨우쳐야 했다. 시간이 영 부족하다면 재빨리 책만 챙겨서 가는 도중 읽어야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깥에는 이찬이 나서면 안 되는 규모의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고, 아무렴 그것은 《관념》에 ‘잊힌 신화의 라이벌이 벌이는 재대결’과 같은 유치한 제목으로 생중계되고 있을 확률이 자자했다.


“읽고 가야겠네.”


이찬은 책장의 가장 위 책인 검은색 책등을 집어 표지를 넘겼다.

이찬의 바쁜 마음 때문일까. 책은 한 장 한 장이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점점 그것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윽고는 책을 집어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지탱하고는 엄지로 책 다발을 밀어냈다.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책이 순식간에 넘어갔다. 이찬은 당황한 얼굴로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곤 두 번째 검정 책을 집어 같은 방식으로 다발을 넘겼다.

이찬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책장의 중앙에 위치한 붉은빛 표지의 책을 넘겼다. 허나 이찬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그의 가까운 발치에 그가 첫 번째로 펼친 책이 무방비하게 펼쳐 있었다. 그곳에는.

정말 놀라울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책은 정말로 그저 백지인 채 허망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뿐일까. 첫 번째로 펼쳤던 책은 물론 두 번째 검정 책, 세 번째 붉은 표지의 책 마저도 전부 백지였다.

그렇게 세 면의 책장 가운데 모든 책장에 위치한 책을 전부 펼쳐보고 나서야 이찬은 생각을 정리했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말 한마디 없이 고뇌하는 모습에서 착잡함과 심란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알고 있다. 겨우 이 한 책장에만 장난질을 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걸. 이는 전대 행동자인 필리브크랩트가 이찬에게 내리는 시련이었다.

재빠르게 이찬은 제 머리를 굴렸다. 아직 그는 전대 행동자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아는 것이라곤 그가 《관념》의 너머로 향한 몇 안 되는 존재라는 것과 그가 지속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뿐.

이찬은 그러한 자신을 질책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언이 무색하게도 이찬은 아무 힘도 가지지 못했다.


“하··· ···시발.”


결국 이찬은 무력감에 욕지거리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는 전대미문의 습격이 일어났고, 이찬은 이곳에 앉아 착잡하게 빈 책장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곳에서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거리에서는 한때 신화의 주역이었던 자들이 혈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부상당하고, 또 사망했다.

그럼에도 이찬은 영리했다. 언젠가 TV프로그램을 시청한 기억이 어째서일까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것은 TV의 한 방탈출 프로그램이었다.

한 장소에 갇힌 사내들은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탈출구인 문을 흔들고, 그곳에 위치한 책상과 의자, 서랍을 뒤졌다. 그렇게 해결책을 찾지 못한 그들이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건드린 것은 책장의 한 책이었다. 단서를 모아 그 책을 꾹 누르자 책장이 뒤로 밀리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찬은 그것에서 번뜩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혹시··· ···.”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자신이 헤쳐 놓은 책들을 전부 순서대로 정리했다. 이찬은 그제서야 이 빈 책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하나같이 공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검정색이란 미지의 공포를 부른다.

동시에 붉은색은 동물의 피를 연상케 하는 공포를 야기한다. 또한 녹색은 과거부터 비인간을 상징해온 유구한 공포를 가진 색이었다.

이찬은 그 세 책 중 다섯 칸의 책장에서부터 세 번째 책장, 또한 한 칸에 20개의 책이 나열되어 있는 곳에서 열 번째 책.

중앙의 중앙에 있는 책을 하나씩 집어 세 책을 들었다. 그리고는 세 책장의 가운데 위치한 책을 뽑아 딱 세 권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었다.

순서대로 검정, 빨강, 초록의 책이 삽입되었고, 방 안은 마치 암호의 해답을 푼 자신을 환영하는 듯 통로를 만들었다.

이찬은 조심스럽게 건너를 밟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찬은 자신이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통로였다.

성인 남성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폭을 가진 통로는 점점 넓어지더니 이내 널찍한 길이 되었다.


“여긴··· ···.”


이찬은 생각과는 다른 장관이 펼쳐졌다. 기껏해야 더 넓은 책장일 줄로만 알았던 이 미지의 공간은 생각보다 더욱 광활했다.

단순한 서재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도서관. 도서관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었다.


[이곳에 누군가 들어온 것은 오랜만인데.]


이찬이 번뜩 놀라 반사적으로 기도를 소환해 쥐었다.


[누구시죠?]


“그러는 넌··· ···.”


이찬의 앞으로 기이한 형상이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거머리 같았다. 그것도 아주 흉포하고 추악한. 그런 거머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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