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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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정훈한
작품등록일 :
2023.06.02 10:11
최근연재일 :
2024.01.03 18:00
연재수 :
1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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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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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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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03. 낯선 실험실 Ⅱ

DUMMY

#103. 낯선 실험실 Ⅱ


고통스러웠다. 피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통증이 멈추지 않았다. 직원들 시험대에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나의 상황이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움직이지 마라.”


직원 중 하나가 귀찮다는 듯 내 팔을 잡더니 알 수 없는 액체를 피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붓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움직이지 마!”


그가 뿌린 액체는 고통을 배로 증가시켰다. 붉은색 액체가 팔을 타고 땅으로 흐르는데, 이게 저 액체인지 아니면 내 몸에서 나오는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직원들은 그 액체가 마르자 상처 위에 바로 밴드 같은 것을 붙여주었다. 그걸 붙였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석님 끝났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저 젊은 친구가 이제 슬슬 ‘적응’을 하는 것 같군 안 그래?”


수석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네. 앞으로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그의 말을 너무나 끔찍했다. 앞으로도 이 고통스러운 일을 매일,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데려가서 세척하고 점심 먹이도록 해. 피시험체 팔은 상처가 덧나면 안 되니까 밀봉하고.”


“알겠습니다.”


수석의 지시에 직원들은 내 팔을 꼼꼼히 닦은 뒤 비닐 같은 것을 덮었다. 그러더니 결박을 풀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듯 내게 손짓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직원 중 하나가 다가와 다시 내게 안내를 건네주었고, 나는 다시 그 안대를 받아 쓴 뒤, 이제는 익숙한 냄새가 나는 세척장으로 이동했다.


“아까처럼 똑같이 한다. 옷 넣고, 벽에 붙어.”


나는 다시 한번 수치심을 느끼며 옷을 벗어 소독함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벽에 붙어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았다. 그래도 아까 한번 이미 해서인지, 아니면 지금 내 팔에 상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줄기가 전처럼 엄청 강하지는 않았다.


“이봐, 수압이 왜 이렇게 약해?”


그러자 직원 하나가 세척기 작동을 멈추더니 옆에 있는 다른 직원에게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까 다른 피시험체 세척하는데 체형이 작아서 수압을 조금 낮춘 거 같은데?”


“여성이었나 보네 이렇게까지 수압을 낮춘 거 보면.”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계를 조작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갇힌, 나 같은 사람들 중에 여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세척을 당하는 것 같았다. 남자인 나도 이 모든 상황이 수치스러운데, 여자들은 얼마나 이 상황이 지옥 같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퐈아아아아]


“으윽!”


아까보다 확실히 강력하게 물줄기가 내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 힘이 너무 강력해서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세척 과정이 끝나자 그들은 다시 내게 가루형 소독제를 뿌려댔다. 나는 이제는 거의 반쯤 포기한 상태로 고개를 떨구고 그들이 내게 안대를 건네주기를 기다렸다.


“좋아, 이동한다.”


직원이 예상대로 내게 안대를 건네주었고, 나는 안대를 동여맨 뒤, 아까처럼 줄을 잡고 직원들의 뒤를 뒤따라 어딘가로 이동했다. 감은 눈을 통해 붉은 먼지들이 옹기종기 떠다니는 것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나는 이곳이 내가 갇혀있는 방이 있는 복도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저 떠다니는 먼지 덩어리들이 나와 같이 갇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일정한 간격으로 복도를 중심으로 떠다니는 붉은 먼지의 집합들, 이전에 내 몸에서 보였던 것처럼 저 사람들 몸에도 붉은 먼지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끼이익]


검은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오며 직원이 내 안대를 벗겨주었다. 그는 발로 나를 거의 걷어차듯이 방으로 밀어 넣었고, 몸에 붙어있던 소독제 가루들이 조금씩 몸에서 떨어져 내리며 지면에 있는 붉은 먼지들에 닿았다. 그러자 붉은 먼지들이 순식간에 방바닥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점심이니까 대기해라.”


푸른 옷의 직원들은 검은 철문을 굳게 잠근 뒤 어디론가 발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이전처럼 붉은 먼지들로 시간을 때우려 했지만, 내 몸에 묻은 소독 가루 때문인지 닿는 족족 먼지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소독제가 닿으면 사라지는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붉은 먼지들은 소독제가 닿으면 사라지는 것이 거의 분명해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이 붉은 먼지들이 단순히 내게 보이는 환상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확실히 존재하는 무언가이며, 동시에 소독제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소독제가 쓰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많이, 그리고 특히 이곳에서 쓰이는 소독제라면 결국 바이러스를 줄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 눈에 보이는 이 붉은 먼지들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었다.


“균(菌)··· 같은 건가?”


학교에서 감염병 심화 시간에 배운 내용이 있었다. 바이러스와 그 균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으며,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고 있는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런 균이 지금 내 눈에 보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앞서 겪은 모든 일들이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나는 그저 평범한··· 아니 그냥 ‘보균자’다. 그런 내가 갑자기 바이러스 균을 보고 느낄 수가 있다는 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졌다. 그렇다고 이걸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덮어놓고 살자니 그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보이기 시작하는 이것들에 대해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것을 진짜라고 확인해 준다면, 그렇다면 왠지 이 말도 되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유진이, 민수 아저씨, 재익이, 태리 전임님, 하다 못해 준호 씨도 이젠 내 곁에 없었다.


[끼익]


“점심 먹어라. 식사 후에 오후 시험에 협조해야 할 테니까 그런 줄 알고.”


푸른 가운을 입은 직원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밥과 국, 그리고 뭘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젤리 같은 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이 젤리 같이 생긴 건 뭐죠?”


내가 막 방을 나서려는 직원에게 정체불명의 젤리를 가리키며 묻자, 그는 마스크 속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백질이다. 오후에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 테니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그 말과 함께 그는 검은 철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보기만 해도 맛이 없어 보이는 식판 위 음식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 숟갈씩 떠먹기 시작했다.


“으윽···”


밥은 뭘 섞은 건지 흙 맛이 났고, 국은 건더기 하나 없는 소금물 같았다. 그 옆에 있는 정체불명의 젤리는 쓴맛이 났는데 도대체 뭘로 만든 건지 몰라도 하나같이 얼굴이 찡그려지는 맛이었다. 아침에 준 수프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 음식들에 비교하면 그것은 양반이었다.


그렇게 괴로운 식사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식판을 대충 집어다가 자기가 끌고 온 카트에 넣더니 옆에 있는 동료에게 나를 데려가라는 듯 눈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푸른 가운을 입은 다른 직원이 나와 내게 안대를 건네주었다.


나는 다시 그렇게 안대를 받아 들고 그가 이끄는 밧줄을 따라 둥둥 떠다니는 붉은 먼지··· 아니 균들의 집합들을 바라보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낯선 실험실로 향했다.


“점심은 맛이 있었나?”


실험실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안대를 벗겼고, 그러자마자 가까이에서 내가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수석이 보였다. 그런 그의 옆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각종 실험 도구··· 아니 장비들이 있었다. 칼, 가위, 망치, 날카로워 보이는 집게와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것들이 한가득 카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직 적응이 안 되나? 점심은 맛이 있었냐니까?”


수석이 나에게 되묻자 내 옆에 있던 직원들이 빨리 대답하라는 듯 내 등을 떠밀었다.


“별로였습니다. 매립지에서 먹던 주먹밥보다··· 그것보다 별로였어요.”


“하하하하.”


나의 대답에 수석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항상 조용조용 말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맛없는 밥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뭐, 개인 취향이니 그건 넘어가도록 하고,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준비해.”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옆에 있던 직원들이 나를 시험대 쪽으로 떠밀었다. 시험대 앞에 서는 순간 오전에 있었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떠올랐고, 그렇게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는 게 싫었는지, 직원들은 나를 노려보며 얼른 누우라는 듯 재촉했다.


“후···”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시험대에 올라 누웠다. 그러자 직원들은 쏜살같이 내 팔다리를 결박했다. 팔과 다리에 압박이 느껴지면서 다시 한번 머리 위의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순간 시야가 사라지더니 이윽고 아까처럼 수석의 기분 나쁜 미소가 나를 맞아주었다.


“이번엔 좀 다른 부위들을 여러 각도에서 채취해 보려 해. 조금 따끔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의 말이 끝나자 직원들이 내 팔다리를 힘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공포심에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서너 명이 누르는 힘을 내가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수석은 장갑을 끼더니 카트 위의 여러 도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쓸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가 저항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게 좋겠군.”


수석은 마스크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띠며 카트 위에서 아까보다 더 길고 예리해 보이는 칼을 꺼내 들었다. 머리 위의 조명이 칼날에 반사되며 그 서늘함이 당장이라도 내 몸을 난도질할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내가 수석에게 소리치자 수석은 시끄럽다는 듯 귀를 막더니 직원들에게 눈짓을 해 재갈을 가져오게 했다.


“그만해!”


그는 재갈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이번에는 내 허벅지에 칼을 가져다 대고 채취를 시작했다. 차갑고, 뜨거운, 그 미친듯한 고통이 허벅지에서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으아아아아!”


나는 고통에 지배당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수석이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고통이 배가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붉은 균들이 실험실 공중에 떠서 부유하는 것이 보였다. 세로로 길게 늘어서서 있는 모습이, 마치 내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붉은 균들은 내가 스스로 만든 어둠 속에서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물린 재갈에 비명을 지르며 속으로 외쳤다. 제발 누군가 나를 도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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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130. 회의 : 에필로그 24.01.03 28 1 10쪽
129 #129. 지옥 Ⅱ 24.01.02 22 1 18쪽
128 #128. 지옥 Ⅰ 23.12.29 17 1 12쪽
127 #127. 터널 Ⅱ 23.12.28 24 1 12쪽
126 #126. 터널 Ⅰ 23.12.27 21 1 12쪽
125 #125. 시험대 Ⅱ 23.12.26 20 1 12쪽
124 #124. 시험대 Ⅰ 23.12.22 20 1 12쪽
123 #123. 낯익은 기억 Ⅲ 23.12.21 19 1 12쪽
122 #122. 낯익은 기억 Ⅱ 23.12.20 18 1 12쪽
121 #121. 낯익은 기억 Ⅰ 23.12.19 16 1 12쪽
120 #120. 마지막 탈출로 Ⅲ 23.12.15 20 1 12쪽
119 #119. 마지막 탈출로 Ⅱ 23.12.14 17 1 12쪽
118 #118. 마지막 탈출로 Ⅰ 23.12.13 15 1 13쪽
117 #117. 돌멩이 23.12.12 20 1 12쪽
116 #116. 계획 Ⅲ 23.12.08 25 1 12쪽
115 #115. 계획 Ⅱ 23.12.07 18 1 12쪽
114 #114. 계획 Ⅰ 23.12.06 19 1 12쪽
113 #113. 운동장 Ⅲ 23.12.05 20 1 12쪽
112 #112. 운동장 Ⅱ 23.12.01 23 1 12쪽
111 #111. 운동장 Ⅰ 23.11.30 20 1 12쪽
110 #110. 푸른 가운 Ⅲ 23.11.29 19 1 12쪽
109 #109. 푸른 가운 Ⅱ 23.11.28 17 1 12쪽
108 #108. 푸른 가운 Ⅰ 23.11.24 18 1 12쪽
107 #107. 재회 Ⅲ 23.11.23 16 1 12쪽
106 #106. 재회 Ⅱ 23.11.22 18 1 12쪽
105 #105. 재회 Ⅰ 23.11.21 17 1 12쪽
104 #104. 낯선 실험실 Ⅲ 23.11.17 20 1 12쪽
» #103. 낯선 실험실 Ⅱ 23.11.16 18 1 12쪽
102 #102. 낯선 실험실 Ⅰ 23.11.15 20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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