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균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SF

완결

정훈한
작품등록일 :
2023.06.02 10:11
최근연재일 :
2024.01.03 18:00
연재수 :
130 회
조회수 :
5,143
추천수 :
136
글자수 :
659,494

작성
23.12.12 18:00
조회
20
추천
1
글자
12쪽

#117. 돌멩이

DUMMY

#117. 돌멩이


무슨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그날 바로 알아차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날부터 체력 유지 시간과 운동장 사용이 잠정 중단됐다. 처음에는, 구역질 나는 연기를 하느라 지쳐있었는데 차나리 이런 일이 생겨서 다행인가 싶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모르겠지만, 첫날 운동장에 발을 디뎠을 때 보균자 무리에게 두들겨 맞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구의 보균자가 그런 나를 도와주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바람 새는 듯 한 소리가 들리더니 그 거인을 비롯, 나를 때리던 놈들과 나까지 맥없이 쓰러지게 됐다. 아마도 경험상 치안대에서 유사시 사용하는 마취제가 아닐까 싶었는데, 직접 맞아보니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눈동자만 간신히 굴릴 수 있는 그런 상태가 됐었다.


그러다 꿈인지 뭔지, 해밀 그 녀석이 나타났다. 그 역겨운 얼굴로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녀석을 보자마자 바로 목덜미를 뜯던, 눈을 찌르든 무슨 짓이든 해서라도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고 눈만 미친 듯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분노에 부들부들 떨릴 때쯤, 푸른 가운을 입은 직원들이 와서 하나씩 들 것 같은 것에 우리를 옮겼고, 나는 그렇게 무기력하게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그다음 날, 운동장에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나를 도와줬던 거구의 보균자가 찾아와서 먼저 말을 걸어줬다. 그리고 그 옆에 해밀 그 녀석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물어뜯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거구의 보균자, 이제는 민수 아저씨라 부르는 양반이 해밀 녀석을 아끼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투복도, 아무런 장비도 없는 나에게 거인과 같은 민수를 상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와 해밀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짧은 그 순간, 나는 일단은 녀석들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일단 가까워지고, 가까워져서,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질 때쯤, 그때 죽여 버리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판단이 선나는, 나 자신을 지성우 선임의 이름을 따 ‘성우’라고 소개하고, 녀석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말도 섞기 싫은 보균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공감하는 것은 역겹고 힘들었다. 특히 민수가 농담이라도 하면서 ‘허허’ 웃음소리를 낼 때면, 그에 맞춰서 웃어주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래도 그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었다. 민수는 물론 해밀이 녀석도 나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풀어진 듯 한 모습이었고, 둘이 떨어지는 틈만 만들면 됐다. 일단 민수가 해밀이 새끼에게서 떨어지고 나면 그 틈에 해밀의 뒷덜미에 열심히 갈고 또 간 돌멩이를 꽂아 넣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잃을 게 있어서 누군가를 죽이는데 에 조금이라도 망설였겠지만, 여기서 당하는 고문 아닌 고문, 자유와 희망 없는 삶, 무시, 학대, 비하 등등 수많은 뭣 같은 것들로 가득 찬 삶은 꾸역꾸역 바퀴벌레 마냥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차나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고, 그래도 해밀이 그 새끼는 저승길동무로 무조건 데리고 갈 것이었다.


나는 방 안에서 몰래 들여온 돌멩이, 내가 열심히 갈고 또 갈았던 그 돌멩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처음엔 잠시 보균자들 장단을 맞춰주는 연기를 쉬어가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체력 유지 시간의 잠정 중단은 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체력 유지 시간은 다시 재개되지 않았다.


‘미치겠네···’


잠정 중단 기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에는 불안감만 쌓여갔다. 무슨 일이 터졌던 건 분명한데, 그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거기에 해밀이 새끼가 연관돼 있는 건 아닌지가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 새끼가 뭔가 저질러서 검사소 직원들이 녀석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내 남은 인생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살아간단 말인가.


해밀, 그 새끼가 죽었을 상상을 하니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돌멩이를 쥔 손에서 피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녀석이 벽에다 글씨를 새긴다고 뒷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 목구녕에 예리하게 갈아낸 이 돌멩이를 꽂아 넣는 걸 참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내 손이 아닌 다른 사람 손에 죽는다? 그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탁 탁 탁 탁]


‘뭐지?’


밖에서 누군가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거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돌아다니는 것들인데 저렇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니 어딘가 의아했다.


“··· 쪽으로 가! 빨리!”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도 얼핏 들려오는 듯했다. 복도에서 저렇게 소리를 치는 적은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는 철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를 썼다.


직원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소리치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 등등이 희미하게 철문 너머로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지?’


모르긴 몰라도 긴급상황 임에는 확실해 보였다. 내 방뿐만 아니라 옆의 다른 방 보균자들이 소리치는 듯한 소리도 희미하게 들리는 걸 보니 복도를 감시하는 직원도 평소와 달리 없는 모양이었다.


[철컹]


혹시나 싶은 마음에 건드려본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철컹거리는 쇳소리만 내며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냥 어디서 미친놈하나 제압이라도 하러 가는 건가?’

나는 철문에 기대어 서서 계속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려 애를 썼다. 여전히 누군가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었고, 직원들이 소리치는 듯한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지만,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삐잉]


그때였다.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내가 기대어 서있던 철문이 미끄러지듯 열렸다.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한 나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나는 검은 철문들이 나란히 늘어서있는 복도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문이 열린 곳은 내 방뿐만이 아니었다. 복도의 모든 검은 철문들이 열려있었고, 반쯤은 넋이 나간 표정의 보균자들이 복도로 하나씩 나오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뭔 상관이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탈출··· 탈출하자!”


“어차피 죽을 거면 탈출하다 죽겠어!”


익숙한 얼굴의 보균자들, 그리고 나를 짓밟았던 불량배들, 그리고 평소에 잘 보지 못했던 보균자들 등··· 수 십의 보균자들이 복도로 뛰쳐나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난히 덩치가 큰 민수도 있었다.


“민수 아저씨!”


내가 그에게 크게 소리치자, 민수는 뒤돌아서며 밝은 표정으로 나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헉,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진 모르겠지만. 우선 빨리 해밀이랑 유진이를 찾아서 여길 벗어나자.”


“해밀이랑 유진이··· 알겠어요!”


마음 같아선 그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해밀이 새끼를 찾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완력으로는 도저히 그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선은 그의 말대로 그 둘을 찾고 나서 녀석을 죽일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위이이이이이잉!]


“젠장할··· 이제 여기 모든 직원들이 다 달려들겠는데?”


“빨리 움직여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제 이곳에 치안대원이든 뭐든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에게 있어서 다시 잡히는 것은 문제가 안 됐다. 다만 그전에 해밀 그 녀석을 어떻게든 죽여버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됐다.


나와 민수는 방 하나하나를 다 확인하며 녀석을 찾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방은 텅텅 비어있었고, 혹여 누가 있는 방에는 겁먹은 보균자들이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거나 하는 것뿐이었다.


‘한심한 것들.’


나는 그런 놈들을 보며 속으로 욕을 한 뒤, 다시 해밀을 찾아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멈춰! 피시험체들 경고한다. 당장 멈춰!”


복도의 끝까지 다 확인한 후, 다른 층으로 민수와 이동하려는데 어느새 직원들이 내려와 미처 이동하지 못한 보균자들을 진압봉과 방패로 두들겨 패면서 막고 있었다. 몇몇 직원들은 손에 마취 총 같은 것도 들고 조준까지 하고 있었다.


“이런··· 어쩌죠?”


내가 민수를 올려다보며 묻자, 민수는 무언가 결심한 듯 비장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우 너는 가서 해밀이와 유진이를 찾아봐. 여기는 내가 길을 내고 최대한 막아볼 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대신에 반드시 둘을 찾아서 탈출해야 해.”


“네 아저씨!”


나는 일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 한 뒤, 마치 거대한 황소처럼 달려 나가는 민수를 방패 삼아 앞으로 향했다. 직원들은 진압봉 등을 가지고 앞선 보균자들을 진압하다가 달려오는 민수를 보더니 뒷걸음을 치는 한편, 마취 총을 든 직원은 연신 방아쇠를 당겨 댔다. 우리에겐 다행스럽게도 그 마취총은 민수에게 닿기도 전에 앞서 부딪힌 다른 보균자들에게 막히고 있었다.


“다들 비켜!!”


민수의 거대한 몸이 달려온 속력과 함께 보균자들과 직원들에게 부딪히자, 마치 누군가 쌓아 놓은 장난감 병정들이 손바닥에 날아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직원들과 몇몇 보균자들이 뒤로 고꾸라졌다. 실로 놀라운 광경에 나는 잠시 말을 잊었고, 민수는 직원들 손에 든 진압봉과 방패를 내게 던져주며 말했다.


“어서 가! 이게 도움이 될 거다! 곧 따라가마!”


나는 그가 던진 진압봉과 방패를 손에 꽉 뒨 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압봉과 방패라니···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물건들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거기다 민수가 내게 직접 건네주다니, 이만한 코미디가 어디 있는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죽이라고 본인 손으로 무기를 던져준 게 아닌가?


“크읍, 걱정 마세요!!”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민수에게 말한 뒤, ‘2급 일반-B’라고 적힌 위층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래층에서는 민수가 직원들과 씨름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보균자들과 친해지는 연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역겨운 일이었지만, 막상 해놓고 보니 효과는 꽤나 좋은 것 같았다.


“넌 뭐야?!”


위층으로 올라가던 와중에 계단 중간에서 직원 하나가 나를 막아섰다. 그도 진압봉과 방패를 들고 서 있었고, 그가 입은 푸른 가운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꺼져!”


나는 소리치며 그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가 방패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고, 나는 능숙하게 그의 방패를 잡아끌어 계단 밑으로 그를 던져버렸다. 그리곤 바로 그의 옆으로 뛰어내려 가 방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강하게 내려쳤다.


“으악!”


그의 손에서 방패가 떨어졌고, 나는 뒤이어 곧바로 녀석의 머리를 진압봉으로 때렸다. 둔탁한 소리가 나며 녀석의 귀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이 장비들로 나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


나는 꿈틀거리는 녀석의 머리를 발로 밟으며 한 마디 남긴 뒤, 해밀을 찾아 혼란이 가득한 위층 복도로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아비규환 속으로.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보균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그동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4.01.04 16 0 -
130 #130. 회의 : 에필로그 24.01.03 28 1 10쪽
129 #129. 지옥 Ⅱ 24.01.02 22 1 18쪽
128 #128. 지옥 Ⅰ 23.12.29 17 1 12쪽
127 #127. 터널 Ⅱ 23.12.28 24 1 12쪽
126 #126. 터널 Ⅰ 23.12.27 21 1 12쪽
125 #125. 시험대 Ⅱ 23.12.26 20 1 12쪽
124 #124. 시험대 Ⅰ 23.12.22 20 1 12쪽
123 #123. 낯익은 기억 Ⅲ 23.12.21 19 1 12쪽
122 #122. 낯익은 기억 Ⅱ 23.12.20 18 1 12쪽
121 #121. 낯익은 기억 Ⅰ 23.12.19 16 1 12쪽
120 #120. 마지막 탈출로 Ⅲ 23.12.15 21 1 12쪽
119 #119. 마지막 탈출로 Ⅱ 23.12.14 17 1 12쪽
118 #118. 마지막 탈출로 Ⅰ 23.12.13 15 1 13쪽
» #117. 돌멩이 23.12.12 21 1 12쪽
116 #116. 계획 Ⅲ 23.12.08 25 1 12쪽
115 #115. 계획 Ⅱ 23.12.07 18 1 12쪽
114 #114. 계획 Ⅰ 23.12.06 19 1 12쪽
113 #113. 운동장 Ⅲ 23.12.05 20 1 12쪽
112 #112. 운동장 Ⅱ 23.12.01 23 1 12쪽
111 #111. 운동장 Ⅰ 23.11.30 20 1 12쪽
110 #110. 푸른 가운 Ⅲ 23.11.29 19 1 12쪽
109 #109. 푸른 가운 Ⅱ 23.11.28 17 1 12쪽
108 #108. 푸른 가운 Ⅰ 23.11.24 18 1 12쪽
107 #107. 재회 Ⅲ 23.11.23 16 1 12쪽
106 #106. 재회 Ⅱ 23.11.22 18 1 12쪽
105 #105. 재회 Ⅰ 23.11.21 17 1 12쪽
104 #104. 낯선 실험실 Ⅲ 23.11.17 20 1 12쪽
103 #103. 낯선 실험실 Ⅱ 23.11.16 18 1 12쪽
102 #102. 낯선 실험실 Ⅰ 23.11.15 20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