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
이 땅 위에 믿을 사람은 오직 나 하나. 나에게 다가오지 마.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냥 그렇게 이해해.
"미지씨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상무의 눈이 붉다. 슬픈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가 나를 10년 전으로 데려간다.
따뜻한 미소. 선명한 음성. 하얀 피부. 큰 키. 서 은 우다.
"혹시 성함이 서.은.우이신지요?"
"응. 나 서은우야. 나 알아보겠어? 미지야?"
"나쁜 놈."
이 한마디만 뱉은 채 서은우와 함께 있었던 공간을 정신없이 빠져나온다.
"미지야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줘."
서은우가 다급하게 쫓아온다. 다행히 내가 내린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보다도 못한 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울먹이는 서은우의 얼굴이 점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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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을 놓고 걷는다.
문자 하나 남기고 냉정하게 떠난 그. 그가 사라지고 난 후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는데. 얼마나 절망적이었는데. 그 이후 겉만 화려했지 텅 빈 마음으로 지옥 같았던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는 걸, 그는 아마 모를 거다.
근데 이제 와서 내 앞에 나타나? 나쁜 놈.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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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이번 광고 계약 건 취소하면 안 돼요?"
"차배우, 아니 차미지, 미쳤어? 위약금이 얼마인데. 취소하면 넌 이 바닥에서 아웃이야. 돈도 다 떨어진 걸로 아는데 뭔 자신감이야?"
돈... 그래 돈이 문제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돈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존재인지.
근데. 내가 왜 서은우 이 나쁜 놈 때문에 광고를 포기해야 해? 됐어. 더럽고 아니 꼬아도 광고 꼭 찍고 만다. 겨우 이런 걸로 그놈 땜에 한 번 더 무너질 수는 없지.
"대표님, 제가 잠깐 미쳤나봐요. 오랜만에 광고 찍어서 힘들어서 그랬어요."
"그치? 이번 광고 발판 삼아서 여론 좀 살펴보고 복귀 각도 잡아 보자. 재기 해야지. 응?"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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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침대 위에서 꼼짝 않고 누워 있다. 복잡한 머리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자는 동안 서은우라는 존재를 잊어보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 아주 잠시 동안만 감춰두었던 상처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머릿속을 흔들고 있다.
"누나, 많이 힘들었어요? 촬영 갔다 와서 하루 종일 누워있네요."
결국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상처는 결국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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