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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동자
작품등록일 :
2023.12.26 23:13
최근연재일 :
2024.09.2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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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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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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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어쩐지 기분 좋은 날

DUMMY

과도한 흥분은 꼭 사람을 기쁜 일이든 최악의 날이든 기분의 도를 넘게 만들었고, 결국 실수하게 했다.


이런 날에는 오히려 술은 더 조심하고, 얌전히 집에 들어가야 했었는데.


뒤늦게 후회해도 이미 질러버린 키스를 도로 물릴 순 없었다.


***


소미는 아슬하게 1년을 채 채우지 못한 채로 다니던 첫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제 의지가 아닌 일로 날아가 버린 퇴직급은 아까웠지만, 끽해야 한 달에서 길면 두달 정도 쉬겠지 싶었다.


하지만 취업 공백은 무려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졌고, 그 시간동안 모아뒀던 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백수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조금씩 갉아 먹던 적금마저 다 탕진했을 때를 떠올리자면 지금도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어찌나 서러웠는지.


자의든 타의든 견딜 수 없어서 나온 곳이라지만, 당장 현실적으로 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쉬움이 더 몰려왔다.


‘딱 이 주만 더 다녔어야 했나. 그래도 퇴직금 받으면 한 달 월급은 나왔을 텐데.’


이제는 해도 소용없을 아쉬운 생각들이 가끔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이런 불경기에 얌전히 다닐 것이지. 왜 잘 다니던 회사는 생각도 없이 때려치웠어!”


“엄마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재취업까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는 한 번씩 그녀의 가슴을 헤집어 자존감을 깎아 먹고는 했었다.


틈만 나면 반복되는 엄마의 고지식한 잔소리 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었다.


이제 서울 생활 정리하고 내려와서 부모님 가게나 돕다 시집이나 가든가 하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를 소리를 들을 때는 정신이 다 아찔해져 왔었다.


언젠가 한 번은 아빠가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시니 내려와 보라던 엄마의 말에 오랜만에 시골집에도 내려갔었다.


매우 정정하신 아버지가 그런 소미를 맞이해주셨다.


“엄마는 어떻게 아빠 건강 문제를 놓고 거짓말을 할 수 있어?”


“아빠가 건강하면 다행인 거지. 지금 아빠 안 아프다고 엄마한테 따지는 거니? 너! 그보다 일단 너 여기 앉아봐라.”


“왜 또? 무슨 말 하려고.”


“저기, 너 옆집에 민영이네 엄마 알지? 그 집에 아는 사람이 아들 하나가 있는데, 사업도 하고 집도 괜찮게 잘 사는데 일만 하느라 아직 장가를 못 갔다더라?”


아, 이거였네.


엄마가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녀를 불러들인 진짜 이유.


“그렇게 괜찮으면 그 집 딸 민영이나 소개해 주라고 해. 잘 살면 뭐? 그냥 아무나 만나서 결혼해? 나 아직 26살이야.”


“그게 어떻게 나무나야? 나는 네 나이 때 이미 결혼해서 너 낳고 잘살고 있잖아.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자빠져 다닐 나이인 줄 아니?”


“오빠 있잖아. 오빠나 먼저 장가가라고 해.”


“네 오빠는 남자고. 남자는 나이 좀 있어도 괜찮아.”


또 한바탕 엄마와 딸의 끝나지 않는 집안 여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아빠는 은근슬쩍 마실 나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하셨다.


이웃집 민영인지 민지인지 하는 동갑내기의 엄마가 괜찮은 선 자리 하나를 잡아 왔다고 하더라.


완도에 미역 공장인지 다시마 공장인지를 다섯 개쯤 갖고 있다나.


저 해조류 공장들 좋다고 쳐도, 아직 꽃다운 26살 딸에게 결혼 압박이라니.


소미는 엄마에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시대착오적 소리를 하고 있냐고.


“지금 딸 갖고 장사해?”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런 건데 장사라니! 막말로 네가 지금 팔릴 게 나이밖에 더 있어? 꼴랑 백수가.”


소미가 펄펄 날뛰었지만, 엄마 역시 지지 않았다.


저놈에 계집애는 누굴 닮아 말을 저리 싹수없게 하냐며 펄펄 같이 날뛰었다.


“너 그렇게 멋대로 살려면 엄마가 해준 보증금부터 내놓고 나가! 그렇게 놀러 다니라고 서울에 집 얻어줬어?”


마침내 엄마의 필살기가 나왔다.


“취업이나 제대로 하던가. 제대로 다니던 직장 때려치운다고 할 때부터 내 속이 아주 뒤집혔다!”


강제로 서울원룸의 보증금을 다시 내놓으라 할 때는 한 없이 쭈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건 그녀였으니.


“엄마는 돈으로 협박하더라? 한 번 줬으면 땡이지 꼭 돈 가지고 치사하게 굴어야겠어? 엄마는 내가 왜 관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 갖다 붙이면 그게 다 이유지.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우리 때는 들어가면 그냥 나 죽었네 하고 다녔어.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 그럼 회사가 놀이터처럼 마냥 신날 줄 알았어?”


치사하게 굴지 말라며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진짜로 그 돈을 회수해간다고 나오면 길바닥에 나앉거나, 엄마 말대로 시골집으로 들어와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속상해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분을 삭이며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반찬 가져가!”


“아, 안 먹어!”


그렇게 필요 없다며 빈손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올라탔는데, 마실 나간다고 하던 아빠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소미야 엄마도 다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 다 알지? 아빠가 네 통장에 용돈 조금 보냈다. 기죽지 말고 서울에서 맛있는 것도 사서 먹고. 우리 소미공주 화이팅!]


“나도 다 알지······.”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그래. 돌아가면 꼭 한 달 내로 재취업하고 만다.”


스스로 비굴해짐을 격하게 느끼며 이를 악물고 재취업에 영혼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제는 서럽던 시절도 끝 드디어 안녕이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다행히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소미는 무사히 재취업에 성공해냈다.


소미의 회사는 소규모의 작은 게임회사였지만, 특유의 자유롭고 친숙한 분위기가 있었다.


젊은 나이대의 사람들이 많았지만, 업계에서는 제법 유능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회사라 규모 대비 성공적으로 런칭 한 게임도 제법 있었다.


사업도 제법 탄탄한 곳이라 사고를 치거나 직접 관두지 않는 한은 다시 실직자 신세가 되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전의 회사도 소미가 온전히 자의로 퇴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입사한 회사에서 수습 기간이 끝나기까지 또 3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무사히 정직원이 되었고, 조금이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연봉 인상까지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설래는 날이었다.


‘수습 기간에 잘릴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동안 쌓였던 설움들을 다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고지식한 엄마는 그럼에도 여전히 전화통을 붙들고 우려 섞인 말들을 쏟아냈지만.


[너는 멀쩡한 회사를 들어가야지. 급하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 또 관두겠다는 소리나 하려고.]


게임을 잘 모르는 엄마에게는 우리 회사에서 나온 거라며 스마트폰에 고스톱 게임을 깔아드렸다.


그리고 동네 분들 나눠 드리라고 회사에서 나온 캐시 쿠폰도 몇 장 쥐여 드리고.


엄마는 그것을 시골 아주머니들에게 뿌린 덕분에 이제는 모이면 현실 고스톱 대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고 했다.


[오늘 내가 1억 벌었다.]


게임 캐시로 허세를 부리신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기인이 되었다며 싸우던 것도 잊고 좋아하셨다.


‘언제는 뭐 하는 회사냐 하더니. 그래도 이 맛에 돈 벌고 회사 다니는 거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엄마의 문자를 보며 그래도 저리 좋아하시는 것을 보니 소미의 어깨가 제법 으쓱해졌다.


사실 이 많은 것 중에서도 진짜 그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따로 있었다.


뒷목을 잡게 했던 무능한 꼰대 상사나, 능글맞게 껄떡대는 변태 같은 악질 상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대부분의 동료 직원들도 생각하는 상식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뜩이나 이전 회사에서 사람 관계의 문제로 호되게 맘고생을 했던 터였다.


덕분에 쫓겨나듯 퇴사까지 해야만 했던 사연이 있었던지라 소미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상식적임’이 한 단어가 왜 자신에게는 그렇게 판타지 같은 말이 되어야 했었는지.


‘잘 견뎠어. 칭찬해 윤소미. 앞으로 회사에서는 일이나 열심히 하는 거야.’


그렇게 문제가 되었던 모든 것들이 해결됐다.


오늘의 그녀는 기분이 좋다 못해 들뜨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날이었다.


달뜬 마음으로 오전 업무를 확인하려는 소미의 컴퓨터에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소미씨 정직원 진급 축하해! 오늘부터 정식으로 우리 팀으로 배치받을 거야. 하진석 팀장님 알지? 앞으로 잘 부탁해.]


맞은편 건너 자리에 앉아있는 이미연 대리였다.


입사 초기 때부터 소미의 사수를 맡아서 수습일 동안 끼고 가르쳐왔던 고마운 선배였다.


[고맙습니다, 미연대리님. 다 대리님이 챙겨주시고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


‘좋아. 이 정도면 제법 싹싹했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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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 갈증은 한잔으로 NEW 5시간 전 1 0 9쪽
14 14. 입이 방정2 24.09.20 2 0 9쪽
13 13. 입이 방정 24.09.18 3 0 9쪽
12 12. 하찮은 인간 24.09.16 3 0 9쪽
11 11. 거울 효과 24.09.15 4 0 9쪽
10 10. 착각 24.01.09 16 0 9쪽
9 09. 가시방석 24.01.08 14 0 9쪽
8 08. 동상이몽 24.01.05 12 0 9쪽
7 07. 어린애 24.01.04 12 0 9쪽
6 06. 제 발 저리는 도둑 24.01.03 18 0 9쪽
5 05. 짐승같은 여자 23.12.30 20 0 9쪽
4 04. 진상이라면 이 정도는 23.12.28 14 0 9쪽
3 03. 오늘의 진상 23.12.27 12 0 9쪽
2 02. 안전 귀가 23.12.27 11 0 9쪽
» 01. 어쩐지 기분 좋은 날 23.12.26 20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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