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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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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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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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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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DUMMY

부자 간의 감격적인 의기투합은,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깨졌다. 가문의 규율을 지키는 율법당 무사들이 대거 몰려왔다.


─영위각 부각주를 구금하라. 그는 사사로운 결투를 벌여 가문의 중요 구성원을 해하였다.


한대명은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되었다.


비무 신청과 승낙이 있었기에 절차상 하자는 없었다. 허나 상대가 사공자의 외숙부이자, 삼부인의 남동생이었다. 괘씸죄는 필연적이었다.


무자비한 손속으로 꼬투리 잡혔다. 가문 내 분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이었다.


이후 한소백은 지하 뇌옥으로 찾아가, 임시로 구금된 부친을 면회하였다.


“한시가 바쁜 와중에 괜한 소동을 일으켜 미안하구나. 앞으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다소 쉰 듯한 목소리였다. 곧이어 얼굴을 숙였다. 한소백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전 더 이상 아이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의도를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설명은 필요 없겠구나.”


서로의 진심을 알기에 행동의 의미도 헤아릴 수 있었다. 한소백은 평이한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절세고수의 무위(武威)는 마음과 연관되어 있지요. 아버지께서는 제 가슴속에 남아있는 응어리를 풀어주시려 한 것 아니었습니까.”


깊은 통찰력이 전후 사정을 꿰뚫었다. 한대명은 나직이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성급했다. 내 개인적인 감정도 얽혀서 벌인 일이지.”

“저를 위해 하신 행동인데 탓할 리가 있겠습니까. 덕분에 제 심마도 해소되었고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다.”


쑥스러운 듯 목소리가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독설가라고 불리는 한대명은, 아직 진솔한 감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다.


“곧 징계 회의가 열리겠지. 삼부인의 발언권이 큰 만큼, 괘씸죄로 가중 처벌이 될 수 있을 게다. 오래 구속될 수 있지. 그 전에 먼저 말해둘 게 있단다.”


한대명은 물었다.


“넌 미래를 아니, 우리 한씨세가가 종교 세력을 배후로 두고 있다는 건 당연히 알겠지. 그리 큰 비밀도 아니니.”

“예. 지금도 가문 내에서 암암리에 떠도는 이야기잖아요. 회귀 전에는 교주도 만나봤고요.”


한소백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검신교(劍神敎).


검을 숭앙하는 종교 집단.

한씨세가는 그 암중 세력의 구성원이자, 양지의 자금줄이기도 했다.


“뭐 육십여 년 전, 진정한 검신(劍神)에게 깡그리 궤멸당했지만 말이다. 다행히 관계성을 들키지 않았던 한씨세가는 그의 징치를 피할 수 있었지.”

“검을 궁구하는 자들이 검의 신에게 버림받다니, 우스운 일이었죠.”

“물론 긴 시간 동안 검신교는 회복했을 거다. 내 권한으로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한씨세가는 검신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상념에 빠져있던 한소백은 말문을 뗐다.


“한씨세가의 멸문지화는 검신교와 관련 있겠지요. 무려 십이혼 중 셋이 모일 정도로 아주 중대한 비밀이.”

“검혼(劍魂). 아마 그것이 중심에 있을 거다. 검신교가 지닌 힘의 근간이니.”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럼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하겠구나.”


두터운 기막이 소리가 빠져나가는 걸 막고 있었다. 한대명은 제 아들을 보며 강직하게 말했다.


“가문을 규합하여 멸문지화를 막아낼 힘을 길러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검신교의 지원을 얻고, 중대한 비밀을 알아내야겠지.”


듣고 있던 한소백은 고개를 좌측으로 살짝 기울였다.


“저희 가족끼리만 한씨세가를 빠져나가는 수도 있겠지만···.”


두 눈이 마주쳤다.

누가 부자가 아니랄까 봐, 미묘한 미소가 입가에 똑같이 걸렸다. 천성이 호기로운 자들이었다.


“설마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 가정을 짓밟은 원수에게 겁먹진 않겠지.”

“칼잡이가 칼에 찔렸는데. 칼침을 먹여주지 못할 망정 감히 도망치겠습니까, 아버지.”


칼잡이들이 씨익 웃으며, 복수의 칼을 손질했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면회를 마친 한소백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작년 축제에서 내가 사공자에게 망신을 제대로 줬으니까,삼부인은 날 고깝게 여길 거야. 힘을 써서 아버지의 징계를 크게 만들겠지.’


현장에 함께 있었던 만큼, 한소백도 참고인으로 불러갈 것이다. 그때 어떤 식으로 부친을 변호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한씨가주는 못 죽여. 힘을 기를 때까지 무력 행사나 협박은 자제해야 해.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최대한 고개 숙여서 빌어야겠지.’


기껏 부자지간이 화목을 되찾았는데, 떨어지는 일은 사절이었다. 뒤숭숭한 마음에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처소로 돌아갈 때였다. 익숙한 얼굴이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소백아, 무슨 일이야. 아버지는 왜 율법당에 끌려가신 거고. 일성이를 산송장으로 만들었다는 게 사실이야?”

“···형님.”


한대명의 장남, 한유백이었다. 여섯 살 위로 형이었다.


그는 한씨세가 검극대(劍極隊)의 대원으로, 임무 때문에 지난 열흘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리운 모습에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장남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와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할 순 없다. 아우야, 미안하다. 이 형은 복수심에 미쳐 널 잠시 챙기지 못할 것 같다. 곧 돌아오마.


돌연 화산파에 나타난 한유백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약속은 최악의 형태로 지켜졌다. 부패한 시신을 부둥켜안은 때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복수, 해야겠지?’


차가운 분노가 이글거렸다.

마음을 다잡은 한소백은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형님. 아버지는 저희를 사랑하셨습니다. 단지 애정 표현이 서툴렀을 뿐입니다.”

“음, 그래?”


의아하게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가족이 가족을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확고에 찬 믿음을 형님은 이미 지녔다. 그 대단한 마음가짐에 한소백은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입술을 한번 깨물고, 정방을 올곧이 바라봤다.


“직계는 방계를 뛰어넘어선 안 된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근거로 아버지께서 사공자의 외숙부에게 혼쭐을 내줬습니다.”

“좋은 일이네.”

“그리고, 검으로 천하를 논하라. 저희에게 그리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래?”


한유백은 싱글벙글한 미소를 내내 짓고 있었다. 그의 눈썹이 즐겁게 구부정해졌다.


“그럼 이제 시원하게 난장판 벌여볼까. 내게 재수없게 굴던 놈들이 많거든. 핏줄이 더 진한 게 상전인가. 육시랄 놈들이.”

“건투를 빌겠습니다.”

“아우야, 너도.”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허리춤에 찬 칼자루 위로 손가락이 올라갔다. 손이 근질거린다는 듯 그 자세를 유지한 채, 한유백은 바람처럼 떠났다.



* * *



징계 회의가 열렸다.

한대명은 영위각 부각주로, 비교적 고위직에 오른 이였다. 거기다가 한씨가주의 처가, 은월상단의 차남을 건드렸으니 중요한 회의안이었다.


“한대명이라. 육대조(六代祖)까지 올라가야 했나. 피가 옅은 방계로군. 그래도 자질은 범상치 않았지. 그의 두 아들마저도.”

“처신을 잘하던 친구인데 어쩌다가 그랬을까요. 뭐, 오만한 기질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나 봅니다. 둘째 아들도 사고를 쳤으니···.”

“어허, 그 이야기는 자제하도록. 삼부인도 계신다.”


은퇴한 원로를 비롯해 여러 요직 인사들이 모였다. 한씨세가의 주축이 되는 두 무력단주는 참석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영위각 부각주의 차남이 참고인으로 왔소. 이미 전후사정은 파악했지만, 긴히 할 얘기가 있다더군. 이 아이의 진술을 한번 들어봅시다.”


형식뿐인 절차였다. 회의에 모인 이들 모두 별 반응이 없었다.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임했다.


“존경하는 가문의 주축 여러분. 저는 한대명의 차남, 한소백이라고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몇몇 이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우선, 제 아버지께 선처를 간청드립니다. 금휘검객에게 위해를 가한 사안에는, 중대한 사유가 있었습니다.”

“중대한 사유라? 몇 달 간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중상을 입힌 것에 뭐 대단한 이유가 따로 있었나.”


웬 목소리가 헐뜯듯 빈정거렸다.


한씨가주의 삼부인이었다. 그는 사공자의 모친이며, 윤일성의 손위 누이였다.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아버지는 부정(父情), 즉 부친으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금휘검객에게 비무를 청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불상사가 벌여졌고요.”

“부친의 도리? 불상사? 하잘것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더 들어볼 것도 없겠군요. 회의는 이쯤에서 무르시지요.”


삼부인이 탁상을 거칠게 때리며 일어서려는 때였다. 돌연 한소백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장내를 휘어잡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모두 이목을 빼앗겼다.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긋한 소년의 표정이었다. 헌데 웬 위화감이 들어, 강제로 귀 기울이게 되었다.


“금휘검객은 그간 은밀하게 패악질을 일삼았습니다. 외숙부라는 직위를 앞세워, 조카에게 저를 괴롭히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는 검련성제에서 있었던 제 승리가 원인이었습니다. 그 일이 언짢았던 것이지요.”

“그런 터무니없는···.”

“또한, 그는 지속적인 견제와 시비로 한 부자지간을 망쳤습니다. 아비 앞에서 자식을 모욕하고, 자식 앞에서 아비를 욕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으로서 어찌 이를 가만히 두고만 보겠습니까. 그 후회를 바로잡기 위한 결과가 이것입니다.”


한소백은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목울대가 파르르 떨리며, 감정이 고조되었다.

안면 근육이 정밀하게 통제되며, 서글픈 표정을 짓게 했다. 일부는 진심이기도 했다.


“이곳에 계신 분들 다수가, 슬하에 자제 분들을 두신 걸로 압니다. 부모로서 자식의 수모를 견디기란, 얼마나 힘드고 마음 아픈 일인지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인정(人情)에 호소합니다.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감정적인 동요가 일었다. 회의실 내부가 술렁거렸고, 저마다 의견을 조금씩 내비쳤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나라도 화가 났을 거다. 그자도 좀 심했어.”

“다들 웃기는군. 은근한 견제에 관한 소문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비웃기기도 했다.

감정을 자극하는 말에 마냥 호의적이진 않았다. 애당초 마음이 흔들려도 현실은 냉혹했다.


“지극한 효성은 기특하나,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구나. 얘야, 직계와 방계는 핏줄에 격이 달라. 네 하찮은 반항은 반발심을 부르며 결국 탄압받길 마련이란다.”


가문의 전체적인 살림살이를 맡은 대총관이었다.

그녀는 보드라운 어투와 다르게 촌철살인으로 지적했다.


그러자 삼부인도 호응하듯 노개했다.


“대총관이 말이 옳다. 감히 내 아들에게 망신을 준 것만으로도 죄가 크다. 헌데 공적인 자리에서 말을 가소롭게 내뱉다니, 너무 기어올랐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방계가 유능할 순 있다.

허나 가문의 주역은 결국 직계다. 그들의 체통을 지켜야 한다.


다소 윤리적인 비난을 받을 수 있더라도, 직계는 방계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성향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무림세가를 가든 암묵적인 불문율이었다.


‘경지를 잃은 나한테 언제든 짓밟힐 것들이, 같잖게 구네. 이딴 짓거리 집어치울까.’


분노가 다소 올라왔다.


이내 한소백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생의 경험만으로 일대일 전투는 충분히 이길 순 있다. 허나 집단의 힘은 강력했다.


부족한 내공과 연약한 육체로는 아직 강호 독보할 능력이 없었다.


“방계라면 주제를 파악하거라. 네 발언이 직계를 능멸하고 가문의 위계를 흐트린다는 사실을 아느냐!”


꾹꾹 참아누른다.

한소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멸문지화까지 삼 년. 그전까지 가문을 휘어잡아야 해. 복수에만 도구로 이용하면 되는 거야. 뭐, 그래도 정 안 되면 버려야지···.’


체념이 굴종을 불렀다. 잠시면 됐다.

검마의 본성을 억눌러라. 가족과 복수를 위해, 와신상담하거라.


아직 잔재한 살의가 가라앉을 때였다.


“정작 직계는 조용한데, 다들 비약이 심하군.”


좌중을 압도하는 중저음의 목소리. 살갗이 짓눌러지며, 갑작스러운 출현에 모두가 경혹했다.


───!


회의실 상석. 분명 빈자리였다. 그러나 어느새 홀연히 채워졌다. 은밀한 기척은 거짓말처럼 없어지고, 고압적인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중에 다른 직계가 있던가.”


절대적인 예기(銳氣)를 전신에 두른 자다. 다소의 간격을 두고 있음에도, 무형의 절삭력에 베일 것만 같았다.


고매한 칼잡이는, 스스로 칼날을 빚는다.


“···가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누군가의 말에는 경외가 담겼다. 측근일 텐데도 좌불안석으로 보였다.


당연했다. 살벌한 기운이 대기 중으로 흉흉히 번지는 광경. 절세고수는 호흡만으로도 전율을 불렀다.


노회한 소년이 속으로 생각했다.


‘오랜만이군.’


한씨가주, 한군악(韓君岳).


천하제일가를 논할 수 있는 가문의 주인. 진실된 경지는,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검객이다.


세간의 이목을 속인 채, 황야에 누워 꿈틀거리는 용이기도 했다. 별밤을 가른 그의 칼질이 아직도 선명해, 존재하지 않는 상처를 들쑤셨다.


“줄곧 들었다. 인륜을 논했나? 한대명의 자제가 한 말은 합당하다. 무림세가는 한 핏줄로 묶여 있는 법. 선 넘은 방종을 좌시할 순 없다.”

“···여보! 지금 당신의 아이와 처남이 무슨 꼴을 당했는-”


삼부인의 반발은 즉각 묵살되었다.


“부인. 이곳은 공적인 자리이며, 나는 가문의 수장이오. 내게 존중을 표하시오.”


냉담한 시선이 삼부인을 무심하게 훑었다. 침묵은 곧장이었다.


‘됐다.’


한소백은 쾌거에 속으로 환호성을 터트렸다. 한씨가주의 지지가 참으로 달가웠다.


다만 한씨가주는 야속했다. 슬쩍 눈이 마주칠 때, 무미한 눈동자에 웃음이 그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허나 그와 별개로, 가문의 기강이 해이해질 수 있다. 일관적이지 않고 자비로운 대처는 위화감만 조성할 뿐이지. 따라서 처벌은 불가피하다.”


한씨가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련 없이 떠나려는 모양새였다.


쾅!


바닥에 격한 충돌이 일었다. 한소백은 핏물을 흘리며 배복(拜伏)에서 고개를 들었다.


“···부디 선처를 해주십시오. 처벌의 수위 이전에, 제 아버지의 사랑에 보은하고 싶은 따름입니다. 다시는 방계로서 직계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한씨가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한소백이 순간 꿈틀거렸다. 모든 걸 간파하는 듯한 눈동자에 잠시 동요했다.


우웅─


이내 전신을 감싸는 웬 기운에 몸이 일으켜졌다.

실로 고등한 허공섭물.

타인을 수족처럼 부리듯 몹시 자연스러웠다.


“네 진심을 꾸밈없이 고하라. 그것만이 날 설득하리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한소백은 고개를 치켜 주위를 쭉 둘러봤다.


한때 칼을 들었겠으나 이젠 물러나, 정쟁에 빠진 이들이 원숭이처럼 모였다. 저 가소로운 꼴을 보자니 가슴이 동했다. 가식적인 예의범절이 깨지듯 일렁거렸다. 억눌렀던 검마의 야성이 서서히 깨어나며, 깊은 살심이 튀어나왔다.


전부 같잖아졌다. 무언가 끊긴다. 첫마디는 신경질적으로 툭 내뱉었다.


“직계가 전부 죽으면.”


시린 음성이, 끝내 말을 완성했다.


“방계가 적통입니다.”


파격적인 발언에 모두 경악했으나, 입술은 달싹거리지 않았다.


“······.”


경내에 고즈넉한 정적이 흘렀다.


소년에게 이목이 쏠렸다. 하나 같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깨진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가 그저 공포스러웠다.


소년이 마저 말을 이었다.


“무익한 견제는 관두십시오. 저희는 진성 칼잡이지 않습니까. 칼 한 자루면 족한데, 어찌 피의 농도를 따집니까. 그저 본 가의 영달을 함께 누리면 될 텐데 말이죠.”


위압적인 목소리가 차분하게 번졌다. 역시나 누구도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고작 지학(志學: 15살)에 불과한 소년에게 모든 어른이 겁을 먹은 것이다.


짝, 짝.


유일하게 한 존재만이, 그늘 속에서 갈채했다.


“이 중에서 칼잡이는 너 하나뿐이로군.”


경의를 표하듯 한씨가주가 흡족히 말했다.

무게감 있는 인정이었다.


“후계자로서 실로 적격한 재목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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