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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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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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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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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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DUMMY

검날에 묻은 피가 밤그늘 아래에서 부끄럽게 물결쳤다. 한때 별빛을 담겠다던 포부는, 미숙한 복수심에 매몰되며 미몽처럼 일그러졌다.


‘미친 칼잡이여, 무고한 영혼들이 네 목을 원한다. 죽음으로 광증에서 벗어나라.’


세상이 어슴푸레 꺼지고, 환한 빛무리가 도래하기까지 삽시간이었다. 맹랑한 수치심은 다행히 잊히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을 이번 생에서는 바로잡아야 한다.


“회귀? 참 풍부한 망상이구나. 근래 몇 번이고 반항하더니 이젠 완전히 실성하였느냐.”


거짓은 고하지 않는다. 혼자 끙끙대기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편에게 털어놓는 게 옳았다. 허나 그리운 부친은 여전하셨다.


한대명.


한씨세가 총관부 재화원 휘하.

영위각(營爲閣) 부각주.


그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았다.


‘이해타산에 능하며 냉철한 심장을 지녔고, 출세를 위해 언제든 비굴해질 수 있는 정치가.’


석년에는 유망한 검객이었지만 이제는 칼을 놓고 가문 내 정쟁에 끼어들었다. 주워듣기로는 미약한 심마를 입어 무위를 일부 상실했다고.


가정에 소홀한 지는 오래다. 혹자는 자식마저 팔아먹는 독친(毒親)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지난 과거가 떠오른다.


─사공자를 쓰러트리다니. 이번 축제는 가문의 직계를 빛내기 위한 자리란 걸 모르느냐. 참으로 우둔하구나. 알량한 재능을 인정받겠다고 아비의 영달을 막을 셈이냐.


회귀 전 부친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


매년 한씨세가에서 벌이는 별빛과 검의 축제, 검련성제(劍連星祭)에서 사공자에게 승리를 얻어낸 것이 작년이었다.


축제 직후, 한대명은 크게 꾸짖었다. 노여움 가득한 눈빛과 멸시의 말이 몇 차례고 쏟아졌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한마디가 있었다.


─방계는 직계를 뛰어넘어선 안 된다.


그 따끔한 경고는 어린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었다.


출신에 대한 태생적인 열등감과 차별, 애틋한 온정은커녕 부친께 외면받는다는 서러움.


항상 주눅 든 채 살았고, 검의 재능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했다. 이전부터 밉보인 와중에 그 사건이 가문 내 소외의 계기마저 되었다.


그나마 하나뿐인 형이 챙겨주었으나,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넌 검을 쥔 원숭이다. 검의 명가에서 너 같은 둔재가 태어난 것을 수치로 여겨라.


검집으로 사공자를 후려팼다. 뇌옥에 갇히고 가혹한 체벌이 이루어졌다. 자유의 몸이 된 날, 더 이상 가문에 정나미가 없었다.


─네 잘못을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

─방계가 직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면, 저는 방계를 그만두겠습니다.


부친에게 당당히 외쳤다.


─한 명의 떳떳한 검객으로서, 조만간 제 이름을 천하에 떨칠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부각주’.


뒤돌아 뛰는 그날이 부친과의 마지막이었다.

내심 붙잡길 바랐지만, 부친은 허울뿐인 정성조차 없었다.


소년의 오기만 더욱 커졌다. 머뭇거림은 사라지고 숨이 가빠지도록 달렸다. 그러다가 탁 트인 들판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가죽신을 벗어 던진 채, 맨발로 들판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한 거리를 주파한 광채가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때였다. 전경에 담긴 빛깔처럼 소년의 눈빛도 반짝거렸다.


그래, 칼에 별빛을 담자.

천하 모든 칼잡이가 선망하는 지고의 경지에 올라가 보자.


별밤 아래에서 꿈을 키우고, 별을 관중 삼아 당당히 선언했다. 그러자 소년의 앞날에 응원을 보내듯, 그날따라 별은 유난스럽게 빛났다.


한대명의 차남, 한소백이 칼잡이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허나 현실은 가혹했다.


뒷배 없는 강호초출의 앞날은 뻔하디뻔했다. 어설프게 가꾸어진 재능은, 떡잎을 짓밟으려는 무뢰배에게 훌륭한 표적이었다.


산적을 수 차례 조우하고, 영악한 낭인을 만났다. 객잔에서 칼부림을 벌이고 중소방파에 쫓기기까지 했다. 끝내는 진목교(眞目敎)에 납치되어 제물이 될 뻔했다.


그들의 광신적인 악의는 수라장을 겪은 한소백이 질겁할 정도였다. 깜깜한 비동 안에서 갇힌 채, 흐느낄 때였다.


안대로 눈을 가린 또래가 재잘거렸다.


─저기 저 아이는 제갈가의 직계예요. 가문에게 버림받아 정처 없이 떠돈 종착지가 여기인 셈이죠. 가족이란 건 우연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 법. 같잖은 기대는 접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거예요.


부친의 구원을 바랐지만, 거짓말 같은 기적 따윈 정말로 없었다. 스스로 칼질하여 사교(邪敎)의 지부에서 탈출할 뿐.


아들을 찾지 않는 부친이 원망스러웠다.

한소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터진 상흔 사이로 핏물은 주룩 흐르고, 눈동자는 흐리멍덩했다. 비정한 강호가 초출에게 주는 처참한 패배였다.


어떻게 한씨세가의 장원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는데 웬 피비린내가 코를 심하게 자극했다. 정신이 확 깨워진다.


불현듯 시야에 잡히는 조잡한 무덤. 그 위로 꽂힌 칼. 한둘이 아니다.


시선이 휙 돌아갔다.

불길이 한차례 지나간 듯, 휘황했을 전각의 군집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사무친 죽음의 냄새가 도처에 아직껏 깔렸다.


─한씨세가는 이제 끝났다. 주력 고수 층 대부분이 몰살됐으니 멸문지화도 조만간이겠군. 네 아비의 무덤은 저기 있다.


대규모 습격이었다. 가문 하나를 없애기 위해 무려 십이혼(十二昏) 중 셋이 연합했다.

팔대세가의 반열로 조만간 오를 거라 평 받았던 한씨세가는, 여지없는 철저한 압살에 몰락하고 말았다. 끝내 멸문지화를 당하는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이야기였다.


그토록 출세를 갈망하던 한대명은, 그 노력이 우습게도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자식까지 팔아 세운 공훈이지 않았습니까. 보상은 고사하고, 덧없이 무너졌네요. 그 대단하신 직계도 한계가 여기까지인데 그보다 못한 방계는 오죽했을까요, 아버지.


한소백은 부친의 무덤 앞에서 보란 듯이 비웃었다. 입가에 씨익 호선을 그렸는데 부자연스러운 모양새였다.


통쾌함은 없었다. 어쩌면 은연중에 있을지도 몰랐다. 참으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현실감 없는 불쾌감이 자조적으로 전신을 짓눌렀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 장남 한유백은 그 광경을 씁쓸하게 지켜봤다. 서글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생아, 보여줄 게 있단다. 아버지를 원망하더라도 마냥 최악으로 기억해선 안 돼.


집무실로 향했다. 업무에 미친 성향을 보여주듯 온갖 문건과 서류가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한소백의 형은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뒀던, 보내지 못한 편지를 다시금 꺼냈다.


[고매하신, 화산 백연(白演) 진인 친전(親展). 흠모를 담아.]


만세무강하셨습니까, 진인(眞人). 일전에 신세 지었던 한씨문중 한대명이라고 합니다. 소란스러운 시기이니 그간 노고가 많으셨을 거라 짐작됩니다. 이리 인사드리는 건, 염치 불고하고 진인께 청탁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슬하에 자랑스러운 아들을 둘이나 두었습니다. 장남은 의롭고 속이 깊어, 훗날 좋은 협객으로 거듭날 듯싶습니다. 차남은 천부적으로 검을 타고났습니다. 다만 오연한 성정 탓에 늘 분쟁에 시달릴까 걱정될 따름입니다.


진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질투를 얻는 재능은 단명을 부릅니다. 하물며 무림세가는 종문처럼 올바르지 못하고 잇속을 중시합니다. 혹자는 핏줄로 묶이기에 끈끈한 결속력으로 뭉친다지만, 글쎄요. 적통이냐 방계친이냐 하는 명확한 우열만큼 뚜렷한 차별이 어딨겠습니까. 어중간한 천재였다면 가문에서 풍족한 지원을 받았겠으나, 소백이는 저조차 등골이 섬뜩할 정도의 자질을 지녔습니다. 무자비한 견제는 필연적이지요.


저는 소백이가 대견합니다. 남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립니다. 다만 강호에서는 힘을 얻기 전까지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 재능을 꽃피우기까지 시간을 벌여줘야겠죠.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로 느껴집니다.


방계는 직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저는 매몰찬 말로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기를 완전히 죽였습니다.


제 천성이 워낙 날카로워 혹독한 말이 버릇이 된 까닭입니다. 잘못된 훈육법이란 걸 아는데도 아이들의 앞에선 엄격한 아비가 되고 맙니다. 전부 제 부덕이지요. 부모로서 실격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불찰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이 아이를 귀파에서 잠시 맡아주십시오. 견부호자(犬父虎子)라는 성어가 있다면 제 아들을 부르는 것일 겁니다. 못난 저는 그동안 가문의 암투에서 살아남아 높은 지위를 얻겠습니다. 그리고 아들 앞에서 떳떳하게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진인. 부모 노릇도 못 하는 미련한 놈이 이리 간청드립니다.


[미진한 인간 말종, 한(韓) 아무개 올림.]


······


시야가 방울방울 혼탁해졌다.


한소백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흐느끼다가,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누구를 탓할지 갈피를 못 잡은 채 비애를 토로했다.


─아버지는 표현이 서투르셨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행과 고집스러운 사고방식은 잘못이 없는 건 아니야.

─······.

─하지만 이제라도 알아야 해.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그저 진솔한 대화가 부족해, 오해가 커졌을 뿐이야.


자식을 위한 미숙한 애정과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진심을 감추었다. 뒤늦게 화해하고 싶어도 차가운 시신으로 재회할 뿐이다.


심란한 자괴에 빠졌다.

한소백은 더 이상 부친을 탓하지 않았다.


이후, 편지를 들고 화산파에 찾아갔다. 입문은 쉽게 허락되었다. 다만 버거운 나날이 연속되었다.


정파이기에 올곧은 성정을 지녀야 했다. 복수를 위해 갈고 닦는 칼은 허락되지 않았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끝없는 참선을 강요당했다. 언짢았으나 효력이 있었는지 다소 감정이 누그러졌다. 화산에서 만난 인연은 상냥하였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은 얼마 못 갔다.

형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복수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한소백은 스스로 파문했다.


그리고 새로운 스승을 만났다. 그는 고명한 마두이자, 흑도의 칼이었다. 정종무공은 잊고 불순한 마공을 사사하였다.


익힌 심법으로 처음 색채를 발현할 때, 한소백은 잠시 당혹스러워했다.


불경할 정도로 거무죽죽한 진기.


그러자 스승은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칼을 쥐고 직접 검강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성취가 빠른 대신 불안정한 길을 걸었으니 별수 있나. 시커먼 검강, 보편적인 마공의 색채가 깃든 거다. 색깔이 뭐 어떤가, 우리 같은 밑바닥 인생들에게 딱 어울리지 않나.


복수는 급급한데 느리게 흐르는 세월은 야속했다. 그래서 힘을 탐해, 선택을 내렸다. 마공이란 부작용이 몹시 컸다. 뜻하지 않은 자취에 무림공적의 이름마저 자연스럽게 얻었다.


검마(劍魔), 혹은 검무혼(劍武魂).


미쳐버린 복수귀의 탄생이었다. 그의 눈먼 칼질에 피아식별은 없었다.


전장 위 미친 검의 마귀.

칼의 본질에 취했다. 오직 살육. 전투가 시작되면 늘 마성에 잡아먹혀, 친히 생사를 관장하는 사신이 되었다.


정(正)과 사(邪). 양면 어느 위에 속하지 않고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한소백은 외로운 삶 속에 목적 없이 떠돌았다.


의식이 간헐적으로 끊기다가, 정신을 차리면 짙은 혈향이 온몸을 적셨다. 씻을 수 없는 영원한 불결. 그를 우군으로 대하던 자들도 슬슬 불순한 계획을 세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칼질에 표적이 되기 전, 먼저 선공한다. 검마를 도구로 대하던 위정자들은 그렇게 처분을 결정했다.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허나 백도 무림에서는 최악의 판단이었다.


열두 암흑이 지나도 낮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불과 얼음이 강호를 뒤덮고, 최후로 천하에 종말을 고하듯 짙은 허무가 몰려왔다.


그 마지막 전장에 한소백은 기꺼이 참전하였다. 모든 게 꿈결만 같았다.


터벅터벅, 털썩.


허허로웠던 들판은 철과 피로 물들었다. 죽음이 깃든 대지 위로 칼을 꽂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익숙한 인영이 지평선에서부터 걸어왔다. 그는 검마의 처형인이었다.


─죄인. 네 쓸모는 다했다. 임시 동맹은 여기까지다. 덕분에 평화를 지켰으나, 응당한 죗값은 아직 남았다. 이제 네 목을 수거하겠다. 유언은 있는가.


메마른 입술이 오랜만에 달싹거렸다.

꽂힌 칼을 뽑았다.


─누군가 말하더군. 별은 인간의 삶이라고. 빛은 반짝이는 족적이고. 우리는 저기 위에 걸려 인생을 기록하고 싶어, 별빛에 매혹되는 거야. 그중에서 검객이 가장 목맨다고 했어.


한때 별빛에 이끌려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이젠 부끄러워, 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별빛을 담을 자격이 없는 자.

별빛을 감히, 마주할 자격조차 없는 건가.


요사스러운 기운이 불길하게 흘렀다. 순백의 맑은 광채는 어디 가고, 흙탕물처럼 탁하게 내리 앉는다. 안구에 스며든 핏물 탓인지 때론 적색으로 비치기도 했다.


저주를 퍼붓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 없었다. 천체는 사시사철 변함없다. 아마 삿되고 오염된 건 미천한 칼잡이의 마음이리라.


점차 흐트러지던 빛은 이젠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세상은 까맣게 변했다.


─마치 별이 죽은 밤하늘 같군.


몹시 서러워, 품에 칼을 힘껏 끌어안았다.

시커먼 검강이 너울거리며 살갗이 타들어 갔다. 칼은 그저 응답 없이 게걸스럽게 빛을 빨아 들어댔다.


낮은 날숨이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마공 때문에 별빛이 흐릿하다. 별빛으로 마무리해주겠는가.


처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수 이전에 전우로서 기꺼이 존중해주지.


기억은 생생했다. 칼에 흰빛이 집약되었다.

처형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메아리쳤다.


─미친 칼잡이여, 무고한 영혼들이 네 목을 원한다. 죽음으로 광증에서 벗어나라.


넋을 기리는 담담한 외침.

그 안에는 검마를 향한 동정도 스며들어 있었다.


별빛을 갈망하던 한소백은 별빛을 품지 못한 채, 대신 덩어리진 회한을 품으며, 타인의 별빛에 최후를 맞이하리라.


눈을 감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한소백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내게 안식은 있을까.


처형인은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흑빛이어도 네 칼에는 분명 별빛이 담겼다.


편히 쉬거라.


마지막에 보았던 별하늘은, 칼에 담긴 별빛인지, 최후에 허락된 진짜 별빛인지, 아직도 구별이 안 되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낮이 아니라 밤이어서 다행이다.


짧은 회상이 끝마쳐졌다.

미친 칼잡이의 넋두리는 여기까지다.


비이성적인 후회의 연속. 그 이면에는 들끓던 광기가 있었다. 이제는 가라앉았다. 정신은 맑고 이성은 차분하다.


만성적인 마공의 부작용에서 벗어난 것이다.


죄책감, 회한, 미련······


지난 교훈은 새로운 밑바탕이 되어, 뚜렷한 의지를 여럿 낳았다. 단어를 다짐처럼 읊는다.


성숙한 인격, 굳센 의지, 명철한 판단력.


검마는 죽었다. 대신 한 소년이 시간을 뒤로 달렸다. 옛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정신을 무장한 채.


가정의 파국도, 멸문지화도 없다.

잃어버린 화목을 되찾는다.

원수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한다.


그 첫 시작은 이 순간이었다.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서 생동했다.

이전 생이 소통의 부재로 오해를 빚었다면, 이번 생은 솔직한 진심으로 갈등을 지우겠노라.


당연히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이마에 주름이 생기며 아버지, 한대명은 짜증을 토했다.


“바쁜 와중에 시답잖은 이야기로 아비를 화나게 하는구나. 상단전이 다치기라도 하였느냐. 진심으로 네가 걱정되는구나.”


하지만 한소백은 피식 웃었다.


언어란 이리도 잔혹했다. 날 선 목소리 뒤에 은은한 걱정이 서렸다. 어찌 알아볼 수 있는가. 하물며 미성숙한 아이의 시선으로 인지하기란 어려웠다.


“거짓은 고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기에 솔직하게 토로할 뿐입니다.”

“망상과 허언. 지금 네 말이 지닌 무게감이다. 내가 믿을 것 같으냐.”


대답은 즉각 없었다. 구차한 설명만으로 설득은 불가능했다.


스릉─


대신 느릿한 발검이 청명한 울림을 퍼트렸다. 못마땅한 듯 한대명이 눈썹을 구부러트렸다.


“검객이 삶을 논하는데 거창할 게 있겠습니까. 날붙이 너머의 진동이면 충분하죠. 자, 아버지께 검을 청합니다.”


올곧은 칼끝이 부친을 겨누었다.


“이 검이 미덥지 않은 망상을 증명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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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격전 24.08.31 467 6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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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래도··· 24.08.29 448 9 16쪽
30 강호는 잔혹하다 24.08.29 446 6 12쪽
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66 7 17쪽
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5 9 16쪽
26 혈령탄 24.08.24 499 8 13쪽
25 가르침 (2) 24.08.23 560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61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69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21 깨달음 24.08.19 651 11 14쪽
20 살생부 (2) 24.08.18 673 12 12쪽
19 살생부 24.08.17 663 1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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