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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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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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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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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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

DUMMY

난데없는 파란이 한씨세가를 들쑤셨다.


식솔의 징계를 논하는 자리가, 새로운 소가주 후보의 출현으로 바뀌었다. 무려 한씨가주가 내뱉은 발언이었기에 무게감이 엄중했다.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겠지. 하지만···.’


한소백은 절대자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심중의 야성을 단번에 꿰차다니, 실로 대단한 안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한씨가주. 만만치 않은 자다. 그는 방계와 상관없이 훌륭한 후계자를 원하는 건가. 혹은 내 존재로 타 소가주 후보에게 경쟁심을 부추기던지.’


시기가 다소 일렀으나 썩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십이혼의 습격은 삼 년 후. 시간이 촉박했기에 충분한 힘을 기를 순 없었다. 가문에 영향력을 높여, 습격을 대비해야 했다.


‘아버지도 징계가 근신으로 끝나서 다행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을 때였다.


“네 기백은 검의 자질 이상으로 매우 위협적이었지. 앞으로 올 파장이 두렵지 않니.”


웬 여인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한소백은 고개를 돌려 손님을 맞이했다.


대총관 위지연.


젊은 나이에 가문의 대소사를 맡는 위치까지 오른 자. 심지어 한씨 성을 달지도 않았다. 직감적으로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검신교에서 파견한 감시자. 아마 맞겠지. 그 전제하에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니까.’


대총관은 슬그머니 다가왔다. 묵직하고 낮은 음성이 소년을 품평하듯 흘러나왔다.


“군계일학, 낭중지추. 너를 일컫는 말이란다. 네가 너무 나댔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따금 튀어나오는 별종이지요. 가주님의 발언은 과분한 칭찬에 불과합니다. 저는 야심이 없거든요. 그저 가문의 영예에 이바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한소백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총관은 간지러운 웃음을 흘렸다.


“좋든 싫든, 동질의 집단에서 이질성은 배척받는단다. 하물며 너그러운 종문(宗門)이면 모를까, 이권에 충실한 무림세가는 오죽할지. 넌 이미 가문의 정쟁에 휘말렸단다.”

“뭐 각오는 했습니다.”

“명심해라. 가주의 흥미가 너를 언제까지 보호해줄지. 절세고수의 변덕은 늘 종잡을 수 없거든. 어쩌면 넌 시련을 극복하며 스스로 증명해야 할지도 몰라.”


제 할 말만 마친 대총관은 유유히 떠났다. 한소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경고가 분명했다.

잠깐의 노련미도 어중이떠중이의 것이 아니었다. 과연 검신교로부터 수완을 인정받은 자인 건가.


‘협력하거나, 대립하거나. 가문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결국 저자를 상대해야겠군.’


단순히 목을 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과감한 폭력 행사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껄끄러운 정치 싸움. 일단은 천천히 다음 수를 옮겨야 했다.



* * *



한소백은 잘 가꾸어진 화원을 지나, 커다란 건물로 향했다. 넓은 연무장에서 뭉근한 땀내가 기합과 함께 들려왔다.


연삭전(硏削殿). 광물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름처럼 새파란 애송이들이 수련에 열중했다. 이곳은 신규 무사를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가문의 방계든, 외부에서 영입된 자든 모두 이곳을 거친다.


수습검주, 평검주, 명검주.


가문 내 무사의 위계도다. 이 위로 대주급이나 기타 직책을 맡은 자들도 있지만, 저 등급이 기본적이었다.


그러니 연삭전에서 수련하는 이들은 모두 수습검주. 역시나 한소백도 수습검주 신분이었다.


‘훈련받아야 해서 행동에 제약이 있지. 일단은 평검주로 올라야 한다.’


실전에 투입받을 만한 수준이라고 인정만 받으면 되기에, 승급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평검주가 되고 싶다고? 그럼 일단 담당 교관에게 수료를 받아야 할 거야. 그 후에는 평검주 승단 시험을 봐야 하지.”


지나가던 가문 무사가 일러준 말이었다.


한소백은 즉각 연삭전으로 향했으나,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 나이를 먹고 애송이들과 부대낀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누구신가. 방계 제일의 천재가 아니신가. 그러니 내 수업이 얼마나 흥미 없었겠어. 마음대로 빼먹고 말이야.”


갓 서른을 넘긴 듯한 외모. 사내가 능청스럽게 비아냥거렸다.


“오랜만입니다, 교관님.”

“인사성은 참 밝군. 속 편하나 봐, 교육생.”


담당 교관 백무영.


정말로 오랜만에 봐서 한소백은 몹시 반가웠다. 다만 미운털은 이미 박힌 듯했다.


회귀 후 며칠 동안, 한소백은 훈련에 무단으로 불참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정돈하기 위해서였지만, 속사정을 모를 교관은 언짢은 게 당연했다.


“뭐, 자체 수련할 거면 계속할 것이지 무슨 일로 왔나.”

“교관님께 수료를 받고자 왔습니다.”

“수료라. 멋대로 수련에 빠졌으면서 수료를 바란다고? 너무 뻔뻔스러운 것 아닌가. 그거 온전히 내 재량인데 말이지.”


시시콜콜한 실랑이는 불필요했다.

한소백은 막힘 없이 말했다.


“이전에 말씀하셨죠. 저는 가르칠 게 없다고. 수료를 원한다면 바로 해줄 테니, 얼른 위로 꺼지라고. 그 제의를 제가 거절했던 걸로 압니다만.”

“기억력도 좋군. 그래, 원한다면 들어주마. 단, 내게 밉보였으니 수료 자격이 조금 까탈스러워질 거다.”

“당장 시험 보겠습니다.”

“지금? 빠르고 좋군.”


백 교관이 손짓하자 다른 교육생들이 뒤로 물러났다. 연무장의 중앙이 텅 비며, 비무대가 만들어졌다.


“내 몸에 생채기라도 내보거라. 그럼 널 인정해주마.”

“알겠습니다.”


한소백은 팔을 받쳐, 칼을 쥐었다. 첨예한 기수식에 교관이 잠시 놀랐다.


“오거라.”


칼이 단번에 미간을 노렸다.


카앙!


지근거리에서 큰 충격파가 터졌다. 다급히 비낀 고개. 동시에 수직으로 칼날을 세워 겨우 막아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교관의 머리칼이 가닥가닥 흐트러졌다.


‘초장부터 살초를? 무자비하군.’


거침없는 출수로 요행을 바란 게 분명했다.

소년의 엉큼한 생각에 교관은 나직이 웃었다.


손목의 각도, 발의 자세, 찰나의 시선.


풋내기의 의도는 뻔히 읽힌다.

교관은 여유롭게 판단했다.


‘이다음은 목인가.’


가볍게 쥔 손으로 칼날의 위치를 옮긴다. 명약관화한 타격점을 선점하여 공격을 막아낸다. 수습 칼잡이는 교관의 손바닥 위에 있을 뿐이다.


그래야 했다.


스스슥.


발길이 지면 위를 매끄럽게 지났다. 그것만으로도 공세의 방향이 단번에 바뀐다. 이내 사선으로 그어진 칼질이 옆구리를 노려왔다.


캉!


‘우연인가? 내가 읽지 못했다고?’


교관은 눈을 부릅떴다.


단순한 검로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표홀한 발재간이 투로의 다양성을 불러왔다. 능수능란한 변초에 뻔한 줄 알았던 예측은 뒤틀렸다.


‘아니, 의도한 변검이란 말인가.’


교관은 뒤늦게야 상대방을 진지하게 살폈다.


방향 전환이 자유로운 자세. 땅을 디딘 발바닥이 무척 가벼웠고, 은은한 공력 파동은 산들바람과 같았다.


그리고 칼자루를 쥔 손은 온몸과 이어져, 끝없이 변화를 준비했다. 저러니 칼날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정밀하게 통제할 수밖에.


저건 경험의 영역인가, 타고난 감각인가.


무궁무진(無窮無盡).


그 단어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소름 끼치는 검의 궤적은 변화의 일말에 불과했다. 진정으로 무수한 가능성은 소년의 잠재력에 있었다.


‘검의 귀재라는 평가만으로 담을 수 없다. 주책맞게 욕심이 생기는군···.’


내공력이 승부욕과 함께 들끓으며, 팔다리의 기혈을 질주했다. 삽시간에 고강해진 기세. 교관이 대련으로써 진중하게 임하려는 때였다.


탁.


납검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찬물을 끼얹는 행동에 교관이 미간을 좁혔다.


“뺨에 핏물. 닦으시지요.”


한소백이 손짓했다. 무심결에 손으로 얼굴을 만지니 얕은 물기가 느껴졌다.


“하, 오만한 태도에 걸맞은 실력이란 말인가.”


교관이 패배를 순순히 인정했다.


장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의례적으로 겪는 행사라지만, 무지렁이의 눈으로도 이상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교관으로서 손속을 두긴 했으나, 이전의 수료생들보다 훨씬 까다롭고 적극적인 비무였다. 백무영이 진심을 조금 담은 것도, 고작 교육생이 이겨낸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방계 제일의 천재··· 아니, 가문의 정세를 위협할 정도의 천재라는 건 허명이 아니었나. 심지어 며칠 새에 비약적으로 강해진 듯한데.”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료는 끝난 건가요.”

“아니. 아직 절차가 남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한소백은 교관을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커다란 수납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백 교관은 웬 고량주를 꺼냈다.


“사천 오량액(五粮液). 그것도 명품이다. 독하긴 한데, 네 연배로는 헤아릴 수 없는 풍미가 담겼다.”


술잔을 두 개 꺼내고, 그중 하나에 조르르 술을 따랐다. 백 교관은 향을 한번 음미하고, 술을 약간 홀짝거렸다.


“난 이 술을 교육생과 나눠 마시며, 수료를 마무리하지.”

“군침이 도네요. 이제 마시면 되는 건가요.”

“성급하군. 아직 수료 시험은 안 끝났다네.”


한소백이 손을 뻗자, 백 교관은 오량액을 슬며시 뒤로 뺐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탁자에 기댔다. 한소백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미 인정받은 것 아니었나요.”

“물론 넌 칼질만큼은 비범했지. 보증하마. 허나 교관으로서 내 소임은, 칼질만 가르치는 게 아니거든.”

“인품을 말씀하시나요.”


백 교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자루를 천천히 매만지며 이내 입을 열었다.


“칼은 사람을 해하는 무기다. 이 하찮은 날붙이에 귀중한 목숨이 걸렸지. 헌데 칼질만 잘하면 다라고 여기며, 생명에 존중을 표하지 않은 이들이 참 많아.”


스릉.


칼집에서 슬그머니 칼이 빠졌다.


“물론 태생적인 사명이 잔혹한 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피에 취해 분별없이 행동하면 안 돼. 그런 살인마는 육성자로서 내가 거부한다.”


칼날에 얼굴을 한번 비친 백무영은, 손가락으로 퉁 튕겼다. 그리고 술을 따랐다.


“의기(意氣), 협심(俠心), 도덕(道德)··· 하다못해 출세라든지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칼질할 것인가. 가슴 한 켠에 자신만의 긍지를 품어야 한다. 이른바 칼잡이의 품위지.”


이내 백무영이 노려봤다.


“내 묻지. 넌 이 술잔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한소백은 말없이 다가갔다.

손이 뻗친다. 이번에는 일절의 제지가 없었다.


단번에 들이켰다.


쿵.


술잔을 탁상 위에 올렸다.


“술을 마셨으니, 수료는 끝난 겁니까.”


긴 설득은 없었다. 행동만으로 충분했다.

백무영은 양팔을 크게 벌렸다.


“수료를 축하하네, 한소백 교육생.”


옛 기억이 느지막이 떠올랐다.


─거기 오만한 우등생. 사내가 됐으면 살면서 가출 한번쯤은 해야겠지. 근데 너무 늦으면 최장기 수료생이 되고 만다. 적당히 방황하다가 돌아와라. 그때 수료시켜주마.


일 년 후, 한소백은 수습검주 신분으로 출가했다. 그로부터 다시 이 년 후, 복귀했음에도 수료는 없었다.


‘수료라···. 잊고 있었네.’


가혹한 세상 살이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기억.


회상을 마친 한소백은 머리를 짚었다. 연소한 몸으로 독주는 너무 이른 걸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알싸한 취기가 나릿나릿 올라왔다.


수습이라는 꼬리표를 떼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최장기 수료생이란 농담도 정말로 현실이 됐고. 이 기록은 앞으로 깨지지 않겠지.


새하얀 구름이 보이고, 선선한 바람이 상쾌하게 지나갔다. 칼잡이의 품위란 무엇인가. 인생을 한 번 마쳐내고서야 한소백은 그 갈피를 잡아냈다.


무려 삼십여 년만의 수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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