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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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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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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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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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

DUMMY

적막이 짙어졌다.


패도적인 언행이 술법처럼 뇌리를 들쑤셨다. 심상치 않은 소년이라고 여기긴 했다. 회의에서 지껄였다던 개세적인 발언도 그렇고, 어제의 만남에서 보인 기백도 옹골찼다.


‘무심코 굴종할 뻔했어···. 이 소년은 도대체 정체가 뭐지?’


소년의 치기라기엔 중압적인 무게감이 설득력을 키웠다. 거부하면 필히 후회할 듯했다.


동시에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잡아먹히고 마리라.


“네 패기가 범상치 않다.”


일공녀는 힘겹게 말문을 뗐다.


“주제를 모르고 직계에게 무례를 일삼다니. 내 위엄이 무너졌다. 네게 큰 징벌을 내려야 마땅하나···.”


결국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일공녀는 굴욕적인 패배감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반발심을 겨우 억눌렀다.


“너 같은 인재를 부리는 것도 유능한 제왕의 역량이지. 내, 관대한 아량을 보여 너를 용서하겠다. 허나 뻣뻣하게 굴 만한 능력을 정말로 지녔는지는 별개지.”

“불경을 뒷받침할 만한 힘을 증명하라는 거죠. 잘 알겠습니다.”


한소백은 평온하게 대꾸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오만방자한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일공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못 삼키면 탈이 나지만, 그렇다고 대공자를 비롯해 다른 직계에게 빼앗기기엔 위협적이었다.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내일 공개 비무를 열겠다. 너보다 무조건 고강할 중견 고수로 준비하지. 이십 초식을 받아내면 인정하마.”

“과연, 계산적인 판단이로군요.”


한소백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에게 후계자 후보로 인정받은 자가 공개 비무로 꺾인다면, 공녀의 위엄이 오르겠지요. 설사 제가 내기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후계자 후보를 수하로 둔 것만으로 입지를 챙기니까요.”

“내가 손해 볼 거래를 할 듯싶더냐.”


일공녀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의미심장한 웃음이 그녀를 싸늘하게 반겼다.


‘자기가 적토마를 길들이는 여포가 된 줄 아나. 착각도 유분수지.’


불온한 속내는 처음부터 일공녀의 통제 밖에 있었다. 고고한 칼잡이는 스스로 칼을 쥘 뿐, 타인의 칼이 되지 않는다.


우스운 정치 싸움이었다.



* * *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다. 근래 장안의 화제인 한소백이 일공녀와 내기를 벌였다. 거기다가 표면적으로는, 일공녀의 아랫사람이 될 자격이 있는지 확인한다는 명분이었다.


일공녀에게 너무나 유리한 조건이기에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무언가 거래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아마 둘이서 손을 잡았을 거야. 이번 공개 비무는 그 방계 소년의 명성을 높여주기 위함일 테고.”

“약예당에서 일하는 시녀에게 듣기로는 금명단(金明丹)이 일공녀 쪽으로 반출되었다던데. 그거 소환단과 필적하지 않나.”

“역시 일공녀의 사람이 된 건가. 하긴 그 난리를 피웠으면 사방의 적이 두려울 수밖에. 지켜줄 뒷배가 있어야지.”


담화가 이곳저곳에서 오갔다. 어느새 비무 장소에는 온갖 구경꾼들이 몰렸다. 파벌에 속하지 않은 떨거지들부터, 곧 일어날 치열한 정쟁을 대비하고자 하는 이들까지.


아들의 비무 소식에 한대명도 들떴다. 그간 아들 자랑 한번 제대로 못 했으니, 눈부신 활약을 한껏 즐길 셈인 듯했다.


“일공녀도 상당한 수완가다. 발언권도 세며 자기 사람들을 많이 만들었지.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으니 꽤 강한 자가 나올 거다.”


우려스러운 모양새는 일절 없었다. 싱글벙글한 낯빛이 평소 진중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근신 중인데 구경 나오셔도 되나요?”

“근신이면 뭐 집 안에 갇혀 살아야 하나. 남들이 내 아들 치켜세우는 꼴 좀 보겠다는데.”


능청스러운 목소리도 역시나 어색했다. 서툴지만 차근차근 익숙해지는 애정 표현이었다.


준비를 마친 한소백은 비무 장소로 향했다. 여우 가면을 착용한 일공녀가 다가왔다.


“패배하면 영약은 없을뿐더러, 직계 모욕의 죗값도 감당해야 한다는 걸 잘 알겠지.”

“어느 쪽이든 이득이신 분이 너무 까탈스럽게 구시는군요.”


새침한 눈빛이 한소백을 노려봤다. 피식 웃으며 비무대로 올라갔다.


이십 대 후반 정도는 됐을까. 흑립(黑笠)을 쓴 사내가 엄숙하게 기립해 있었다. 순백의 칼날을 보듯, 정밀한 기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임유광(林維侊)이라고 한다. 반갑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 친구.”


반면 목소리는 장난스러웠다. 첫인상이 꿈결처럼 확 무너져 내렸다.


“풋내기 검객, 한소백이라고 합니다. 고명하신 선배님을 뵙습니다.”


차려 갖춘 예의가 굉장히 능숙했다. 관람하고 있던 일공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저놈이 저런 말을 할 줄 안다고?


“네가 요즘 잘나간다며? 공녀가 험담하는 거 지겹도록 들었어.”

“과장된 풍문입니다. 칼질 하나 변변찮지 않거든요. 그럼 시작할까요.”

“잠깐. 아직 소개가 안 끝났어. 여기, 얘한테도 인사하도록.”


임유광이 허리춤을 가리켰다. 눈 씻고 찾아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여기 있잖아. 안 보여, 후배? 네 선배님이 눈을 뜨고 버젓이 기다리시는데.”


손가락이 재차 가리켰는데, 그 끝에는 다름 아닌 검집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이맛살이 구겨졌다.


“설마 검한테 인사하라는 겁니까.”

“어허. 대선배님께 무슨 망언이냐! 너보다 몇 년은 더 연륜을 쌓았다고. 정중히 모시도록.”

“······.”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무심코 관중석을 돌아봤는데 저마다 이마를 짚고 있었다. 저자의 광증은 꽤 유명한 모양인 듯했다.


“이름은 여음(餘音)이라고 해. 나와 칠 년은 함께했지. 여음, 너도 후배한테 인사해.”


우웅-


검명(劍鳴)이 널리 번졌다.


[반가워, 후배.]


간혹 그런 이야기가 있다. 절세고수의 손길이 닿은 병장기는 신병이기(神兵利器)가 되어, 자아를 품게 된다고.


‘하지만 저건 그냥··· 전음(傳音)이잖아?’


공력으로 음성을 전달하는 기예다. 그러한 전음을 마치 복화술(腹話術)마냥 펼쳤다.


“공녀님께 대담한 거래를 요청한 친구래. 방계의 기린아라고 할 수 있지. 이십 초를 받아내면 저 친구 승리야.”

[유광아, 아픈 건 싫은데 초장에 끝내면 안 돼?]

“안 돼. 그래도 선배가 되어서 후배님 기 좀 살려줘야지. 조금만 참자.”


흡사 정신병자의 인격 분열이었다. 허나 단순히 미친 짓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나를 소중하게 대해줘.]


육합전성과 전음을 합쳤다. 귓속으로 꽂히는 음성이 사람의 구별 없이 동시적이란 뜻이다. 실로 굉장한 전음기예였다.


‘저런 재주를 하잘것없는 짓거리에 쓴다고? 머리에 화살이라도 맞았나.’


골통이 어지러웠다. 허나 상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임유광은 번잡스럽게 계속 지껄여댔다.


[아니면 칼질로 내장을 도륙 낼까! 그럼 허락할게.]

“그만해, 여음. 후배님이 무서워하시잖아. 소백이 너도 너무 질겁하지 마. 착한 검이야.”

“그렇군요.”


한소백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정신 이상자와의 정상적인 대화는 심력만 깎을 뿐이다.


이내 비무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불현듯 궁금증이 생겼다.


“혹시 그 검, 성별은 있습니까.”

“······성별?”


임유광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곧 태연하게 말했다.


“본디 검이란 검객에게 애인과도 같지.”

[난 수컷이야!]


애써 고수하는 일관적인 태도.


경멸 어린 시선이 선명하게 쏠렸다. 특히나 일공녀는 벌레 보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 사랑 하시길 바랍니다.”

“···고맙다.”


임유광은 헛기침했다. 다행히 저 모든 언행이 진심은 아닌 듯했다.


“그럼 갈까.”


낮고 굵직한 목소리. 검끝이 예리하게 치켰다. 서릿발 같은 무형의 기세도 동시적으로 올라왔다.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칼을 쥐면 차분해지는 성격인가.’


비무에 임하는 자세마저 경솔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한소백은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갑니다.”


팔다리 혈도를 공력이 단숨에 지나쳤다. 발바닥 용천혈(湧泉穴) 아래로 전사경 마냥 진기가 휘돌았다. 순간적으로 신형이 검과 함께 흐릿해졌다.


팟, 카앙!


직선적인 검로는 즉각 막혔다. 그러나 쾌검을 막아낸 임유광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마음을 아예 놓았으면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그 탓에 지금도 조금 위험했다.


쿵!


발울림이 지면을 두들겼다. 위치가 뒤바뀌고, 손목도 반 바퀴 돌았다. 우상단으로 짓쳐진 검. 발경이 묵직하게 담겼다.


카강!


몰린 건 임유광이지만, 도리어 한소백이 반발을 맞이했다. 강대한 검력(劍力) 탓에 오른손이 저릿했다. 내공량의 차이가 막심한 것이다.


‘보는 눈이 많으니 적당히 고전해야겠어.’


의도적인 고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시에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이 휘돌았다. 옆구리를 노리는 일격. 사선에서 쳐내는 수비식에 막혔다.


이내 발이 땅을 훑고,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초식이 나뉘었다.


쩡, 쩌저정!


발경력의 파편이 칼바람을 일으키며 사위를 채웠다. 임유광의 눈이 대뜸 커졌다. 정석적으로 합을 나누는데 조금씩 변초가 가미되었다.


“···너, 뭐야.”


빼앗긴 간합과 불리해진 위치. 이변을 알아채자 전투 양상도 교활하게 바뀌었다. 변칙적인 칼질이 삽시간에 열댓 번 일었다.


임유광은 맞받아치지 못한 채 몇 걸음 후퇴하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년의 검이 하체 부근을 찔러 들어왔다.


후욱-


공세를 막고, 곧장 반격초를 준비했다.


파앗!


그러자 날카로운 발길질이 연격을 차단했다. 상체 부근을 향한 투로도 동시적이었다. 임유광이 잠시 물러났다. 간격을 벌린 한소백은 곧장 검파를 고쳐 쥐었다.


이윽고 흰빛이 반원으로 궤적을 그렸다.


쩌어엉!


임유광은 검날을 사선으로 세워 방어했다. 실로 무색해진 공격. 허나 승부욕이 동한 걸까. 그의 눈빛이 엄준해졌다.


휘익!


가벼웠던 칼질이 일순간 쾌속해졌다. 스스로 제한한 공력이 검날에 가일층 담겼다.


과연 전음에 통달한 자였다. 내가기공에도 능숙한지 검격에 실린 공력의 흐름이 다채로웠다. 줄기줄기 휘어나오는 기파가 간합을 헤집어댔다.


후우우웅!


이내 휘몰아치는 검격이 강풍을 몰고 왔다. 한줄기 찌르기로 흉포하게 수렴했다.


“진심으로 임할 셈인가?”


관람하던 한 무사가 중얼거렸다. 즉각 칼을 빼내고 비무대에 난입하려는 찰나였다. 다른 누군가가 제지했다.


스르륵······


소년의 검이 찰나에 비스듬해졌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동작은 호수 위 파문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상대 검로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응축된 힘이 충격파를 요란하게 터트렸다.


째애앵!


어마어마한 검력이 단숨에 흩어졌다. 공기의 떨림이 좌중까지 자욱하게 번졌다. 고등한 안법으로 곱씹어봐도 방금의 기예를 전부 파악할 수 없었다.


“무슨! 고매한 태극의 묘리가 실렸다. 명현 진인의 가르침이라도 받은 건가···?”

“그렇다기에는 마지막 힘의 산개는 무슨 원리지?”


부드러운 화경의 수법이 정밀하게 힘을 흘렸다.


과정은 의문스러웠으나 결과는 확실했다. 손속 없는 체급 차를 고작 지학의 소년이 천재성으로 극복한 것이다.


뒤늦게 머리를 식힌 임유광이 검을 거두었다.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듯 침묵했다. 동시에 붕어처럼 살짝 벌어진 입이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저기···.”


눈을 찌푸리고 사과하려는 때였다. 한소백과 시선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이 실로 묘했다.


말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궁금한데, 저 칼.”


냉랭한 목소리가 묵은 감정을 토했다.


“부러져도 깐족거릴 수 있습니까.”


주변이 적막으로 잠겼다.


당사자인 임유광만이 곧 의중을 알아챘다. 황급히 제 애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미세한 균열이 검날에 새겨졌다.


순간적으로 가한 힘이 고스란히 돌아온 것이다. 어기충검으로 내구가 보강되었음에도 그렇다. 동일한 체급이었다면 부러졌으리라. 상대의 병장기를 파괴하는 기예가 실로 예사롭지 않았다.


[유광아, 나 무서워!]

“나도 그래.”

[쟤랑 더 싸우기 싫어.]

“동감이야. 이십 초식도 진작 넘겼고.”


탁.


임유광은 급하게 납검했다. 목덜미에 맺힌 땀을 대충 닦아내며 말했다.


“대단한 검공이었어. 천부적으로 칼질을 타고난 건가? 네 연배를 생각하면 앞으로 더 비상할 일만 남을 거야.”

“저도 선배의 고절한 전음기예에 감탄했습니다.”


천성이 유난스러운 건지, 임유광은 싱그럽게 웃었다. 새하얀 건치까지 보이며 말이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다소곳이 포권했다. 경내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지며 두 무사의 무예를 칭송했다.


입매를 굳히며 심란하게 서 있던 일공녀가 다가왔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날숨을 느릿하게 내쉬었다.


“···네 자질을 인정하겠다. 너는 가문에 없어선 안 될 보배. 자, 약속대로 영약이다.”


우웅-


곁에 있던 임유광이 까불거렸다.


[우리도 잘했는데 영약 하나 없나.]

“입 닫아라.”


임유광이 시무룩하게 검을 튕겼다.


[공녀님은 너무 까칠해.]


잡스러운 짓거리는 무시했다. 한소백은 영약이 든 목함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수상한 미소마저 입에 걸렸다.


못내 불안했는지 일공녀가 쭈뼛 물었다.


“······영약 먹으면 내 편이 되는 거다. 괜히 말 바꾸지 마라.”

“설마요. 제가 배은망덕하겠습니까.”


확답 없는 의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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