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새글

역천맨
작품등록일 :
2024.07.29 13:26
최근연재일 :
2024.09.19 23:56
연재수 :
41 회
조회수 :
1,337
추천수 :
19
글자수 :
302,288

작성
24.08.02 13:01
조회
46
추천
2
글자
18쪽

죽음의 경계

DUMMY

"이런 씹!"


"케르르르!"


"케케케!"


사방에서, 온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들이 줄지어 떠오르며 공동과 연결된 여러 통로들이 붉은빛으로 물결치는듯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거냐...?


지금껏 많아야 네다섯 마리씩 나오던 게 전부였던 놈들이 왜 갑자기 수십 마리씩 튀어나오는 거지?


휘틀러가 날 속인 건가?


일부러 어떤 중요한 정보를 말해주지 않았나?


이 거지 같은 던전을 빠져나갈 생각에 너무 경솔하게 뛰어든 건가?


젠장할!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탓할 거면 멍청하게 사지에 기어들어 온 자신을 탓해라!


당장 움직여!


놈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하진 않았지만 뒤를 잡히는 것도 시간문제다.


뒤쪽 대각선 통로에서도 놈들이 나오고 있으니까.


포위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단 일 초도 허투루 써선 안 된다.


나는 찰나의 순간 재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미 사지에 발을 들인 이상 생각과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가장 최선의 수에 모든 걸 걸어라.


놈들의 우두머리를 노리는 거다.


우두머리를 잡으면 나머지 놈들의 기세를 크게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홉 고블린이... 세 마리...?'


각각의 고블린 무리를 이끌고 나타난건 두 마리의 홉 고블린이었다.


대가리가 두 개쯤 더 큰 만큼 높게 번들거리는 안광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단순하게 생각해라. 그저 홉 고블린을 세 번 죽이면 되는거다.


먼저 죽여야 할 놈이 셋이 된것뿐.


그저 그뿐이다.


스릉.


나는 글라디우스도 뽑아 들었다. 오른손엔 아밍소드, 왼손엔 글라디우스.


최소한의 힘과 동작으로 한 번의 공격에 한놈씩 베어낸다.


간다...!


"""케르르랴악!"""


놈들은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서 발작적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이만큼 달려들어도 식겁할 텐데 놈들은 덩치도 훨씬 크고 사람 죽이려는 악의로 가득 찬 몬스터들이다.


그 악독함은 비교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나 또한 검성이라는 이명을 괜히 딴게 아니다.


내게 검의 재능은 없었을지언정 육체적 재능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쌓아온 경험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언제나 최전선에서 대괴수들과 마주하며 싸웠기에 기세만큼은 이딴 고블린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다.


다만 델리시아의 여린 육체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되는 대로 하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뒤를 잡히기 전에 가장 가까운 정면의 홉 고블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을 쥔 손목의 긴장을 과하지 않게 유지한 채 오른손으론 앞을 막아서는 한놈의 눈알을 수평으로 찌르고 동시에 역수로 쥔 왼손으론 한놈의 얼굴을 대각선으로 쭉 그어올렸다.


이 일련의 동작은 거의 하나의 동작이었던것처럼 빠르게 연계됐고 두놈은 각자 얼굴을 부여잡고 주저앉거나 바닥을 굴렀다.


"끄엑!!"


"캭!!"


나는 옆에서 밀려드는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뿌리치며 쓰러진 놈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목표는 가장 가까운 홉 고블린.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도박수라도 던져야 한다.


홉 고블린을 호위하듯 앞을 가로막은 세 마리의 고블린이 내게 달려온다.


저놈들만 넘으면 홉 고블린에게 닿을 수 있다.


놈들이 제각각 뛰쳐나오는 속도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오른손마저 역수로 바꿔쥐고 스치듯 지나가며 한놈의 손을 베고 쭉 내달렸다.


놈이 손바닥을 부여잡고 소리지르건 말건 다른 놈들을 베어넘기는데 집중했다.


욱신.


벌써 오른쪽 손목이 시큰거리는 게 확실히 작은 식칼과는 손목에 가해지는 부하부터 다르다.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게 했음에도 이 정도다. 그러니 속전속결. 체력이 허락할 때 승부를 봐야 한다.


나에게 막무가내로 뛰어드는 놈을 본 순간 역수로 쥔 오른손을 다시 정수로 바꿔잡고 오른발을 축으로 왼쪽으로 회전해 회피하는 동시에 놈의 뒷목을 베고 뒤에서 덮쳐 오는놈의 아가리에 글라디우스를 박아줬다.


꽤 쎄개 꽂혔는지 뽑아낼 여유가 없기에 즉시 놔버리고 홉 고블린을 향해 쇄도했다.


"허억. 허억."


고작 이 정도의 움직임으로 양손목이 시큰거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며 심장이 미칠 듯 뛰는 걸 보니 상대가 아무리 고블린이라도 어린아이의 몸이라는 한계가 여실히 느껴진다.


심지어 몰려드는 놈들의 공격을 피하려고 억지로 몸을 움직이느라 체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한번 붙잡히거나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이다.


어쨌든 홉 고블린 바로 앞까지 다다른 나는 놈이 몽둥이를 휘두르기 위해 들어 올린 팔을 내려치기도 전에 재빨리 놈의 손목을 아밍소드로 꿰뚫어 버렸다.


"께에엑!"


누가 정예 아니랄까봐 목소리 하난 우렁차군.


그래 그렇게 비명이나 질러라. 네가 내 동아줄이다.


나는 검을 뽑고 자지러지는 놈의 왼쪽 어깨도 한번 내려친 뒤 왼손으로 놈의 목을 조르듯 끌어안았다.


왼손엔 주머니에서 꺼낸 식칼이 놈의 목을 파고들듯 짓누르르고 있었다. 허튼짓하면 바로 그어버릴 것이다.


"살고 싶냐? 그럼 니 친구들한테 살고 싶다 말해!"


"끼엑! 께에.. 께에에엑!!"


내 말을 알아 들을 수 있을진 몰라도 칼로 하는 대화는 만국 공통이다.


놈은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고블린들을 향해 뭐라 뭐라 떠들어 댔다.


던전속 몬스터라도 생존 본능이 없진 않나보지?


그러자 주변의 고블린들이 주춤주춤 거리며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홉 고블린이 확실히 고블린들 사이에선 끗발이 날리긴 하는 걸까 놈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자기들 대가리가 잡혔으니 어쩔 줄 모르는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케르. 케켈. 케르르!"


"케르약! 케케르!"


"께엑? 께에액! 께에에엑!!"


고블린들 사이를 헤치고 나온 두 마리의 홉 고블린.


그놈들은 내가 잡은 홉 고블린과 저들끼리 대화같은 걸 하는 것 같더니 금세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며 곧 달려들 것처럼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에헤이. 조졌네 씨발."


그래, 홉 고블린은 둘이나 더 있다 이거지?


"깩! 깨륵..."


나는 망설임 없이놈의 목을 깊게 그어 버리고 뿜어지는 피를 사방에 뿌린 뒤 식칼에 묻은 피를 핥으며 과장되게 웃었다.


"크흐하하하하!"


비리고 역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기세에서 밀리면 개죽음 뿐이다.


조금이라도 공포와 두려움, 망설임을 심어야 한다.


흠칫. 몇 놈이 몸을 떠는게 느껴진다.


아직도 남은 고블린은 수십.


정말 징글징글 하게도 많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다.


놈들은 분명 홉 고블린을 인질로 잡았을 때 크게 동요했다.


무리 후방에 있던 홉 고블린이 전면에 나온 지금 둘 모두를 죽이거나 하나를 죽이고 남은 하나를 제압한다면... 희망은 있다.


"그래, 죽자. 근데 내가 너희 두놈은 반드시 죽이고 죽는다."


나는 고블린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


"아무래도 찝찝해서 안 되겠어. 쯧."


애써 무시하려 해도 정예를 쫓아간 그 바보 같은 인간 전사가 자꾸 뇌리 한구석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 쓰인다.


던전에서 사람이 죽는 건 일상이다.


하지만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는 건 굉장히 찝찝한 일이다.


그것도 저처럼 혼자 던전에 들어온 경우라면 더더욱.


'유품을 챙겨줄 동료도 죽음을 기억해 줄 누군가도 없이 죽는 건 너무 쓸쓸하지 않나.'


게다가 자신이야 수련을 위해 1층에 내려온 경우지만 그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초행이 분명했다.


수련을 방해받지 않고 싶은 마음이 컸고, 기세만큼은 자신과 견줄 정도로 뛰어났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상식이 조금 부족한 녀석인가 정도로만 여겼던 것이다.


녀석은 자기 말만 듣고서 아무런 대비 없이 홉 고블린을 찾아갔을 테고 어쩌면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이번 수련은 텄군.'


이대로면 더 이상 집중도 안 될게 뻔하다. 선의로 정예를 양보한 게 되려 독이 됐다.


구해 줄 수도 없는 고립형 함정에 빠져 유품도 남기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옛 파티원이 떠오른 건 괜한 기우일까.


휘틀러는 짐과 무기를 챙겨 빠르게 달렸다. 제발 늦지 않길 바라며.


***


기적은 없었다.


홉 고블린 한 마리와 고블린 몇 마리를 더 죽일 수 있었다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홉 고블린은 놓쳤다. 어디로 숨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야가 흐려서.


내 것인지 놈들 것인지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피, 그리고 땀과 먼지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죽음이 다가왔다는 증거였을 뿐.


사람은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


근육이 끊어지면 힘을 쓸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다.


신체에 저장된 에너지가 전부 고갈돼도 죽는다.


그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다.


그러니 왼팔의 살점이 갈라지다 못해 뭉텅이로 뜯겨나가고 듬성듬성 뼈가 드러났을 정도의 상처라면 살아날 희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바다조차 갈라버라던 내가 고작 고블린들 따위에게 죽는 건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오는군.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쉬이 웃을 수도 없다.


허나 아직 나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다면 그 목숨이 완전히 끊기기 전까지 발버둥 쳐야 하는 것이 삶이다.


"와, 라."


내가 검을 제대로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감각조차 꺼질듯 위태롭다.


암전되듯 깜빡이는 의식 너머론 죽음만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러니 그저 내가 지금껏 살아오며 쌓아 올린 검에 대한 집념만을 믿을 뿐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 마지막은 반드시 검과 함께일 것이라 믿는다.


"케케케."


어디선가 홉 고블린 놈의 비웃음이 들리는듯 하다. 거기냐. 그쪽에 있나.


이젠 감각조차 죽어버려 확신할 수 없었으나 어렴풋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한 발을 옮겼다.


나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찾아온다.


하지만 그 마지막까지, 검을 쥐고, 검을 휘두르며-


검사로 죽는 거다.


죽음의 순간조차 누구도 내게서 뺏어갈 수 없다.


검은.


"케략!"


희미한 기척. 나는 내 마지막을 담아낼 일 검을 준비했다.


나는 바다조차 베어내지 않았던가.


그 일 검을 펼칠 순 없으나 쫓을 순 있겠지.


그리고 그것을 휘두르기 직전.


- ···우리는 끝없이 몰아치는 폭풍조차도 맨몸으로 뚫고 나아가리라.


일순 델리시아의 결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 프레시아의 축복.


화아아악!


순간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금빛의 광휘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금빛 광휘의 진원지는...


내... 몸?


내 몸에서부터 터져 나온 따뜻하고 포근한 빛무리는 공동을 잠깐 밝히고선 사라졌지만 기적은 내 몸에 남아 끊임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기적과도 같은 힘이 처음 고블린 세 마리를 죽인 후 상처를 치료해준 그 힘이라는걸.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시간을 되감듯 상처가 회복되고 몸 상태가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고블린들이 난데없이 터진 황금빛 섬광에 잠깐 주춤 하던 사이 내 몸은 이미 감각과 시야가 돌아오고 호흡이 안정되어 있었다.


지금, 이 느낌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잘한 상처들 까지도 전부 낫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기에 홉 고블린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너 반드시 죽여 준다고."


경악으로 물든 놈의 얼굴은 썩 봐줄 만 했다.


***


휘익. 빡!


"캑!"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월슨에 직격당해 넘어진 홉 고블린은 절망했다.


괴물, 괴물이다. 어떻게 그 모두를 전부 죽일 수 있는 거지? 이건 현실이 아니다... 필시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 못생긴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된 꼴이라니.


나는 놈이 오줌이라도 지리기 전에 얼른 목숨을 끊었다.


괜히 월슨에 오줌이라도 튀면 난감하니까.


등짝에 아밍소드가 박힌 홉 고블린을 뒤로하고 참았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후우. 징글징글하게도 많네."


도대체 몇 마리냐 이거? 못해도 30마리는 넘어 보이는데.


정말 던전의 모든 고블린이 싹 모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었는지 후드케이프는 풀어져 어디로 날아가 버렸고 의복은 마침내 옷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해 이젠 누더기보단 걸레조각이라 부르는 게 더 낫게 되었다.


이걸 입고 다닌다면 세상에서 가장 피도 눈물도 없는 악한조차 금화를 적선해 주리라.


차라리 안입느니만 못한 꼴이라 그냥 찢어서 버려 버렸다.


어차피 던전은 어둡고 전신이 누구것인지 모를 피투성이라 자체 심의규정은 아슬아슬하게 준수할 수 있었다.


후드케이프를 찾아 걸치면 그나마 사람 언저리로 보이기는 할 거다.


전신이 피에 절여진 꼴이라 찝찝함이 장난 아니지만.


사르르르.


그렇게 후드케이프를 찾는와중 정예 홉 고블린의 사체가 무슨 먼지처럼 흩어지더니 그 자리에 무슨 돌덩이 같은 게 남는 게 아닌가?


"아니 시발."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돌덩이가 맞았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숫돌이다.


"삼도천에 다이빙 하고 왔는데 귀환석이 아니라 숫돌을 준다고? 실화냐?"


물론 내겐 숫돌도 없고 아밍소드나 글라디우스도 날이 뭉툭해져서 숫돌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절대 수지가 맞지 않는다.


개고생한 보람이 없다고...!


더 줘...!


나는 불길한 마음을 억누른 채 다른 홉 고블린의 사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이번에는 은은한 녹광을 뿌리는 정사면체 돌멩이가 나왔다.


각 면마다 알 수 없는 문자인지 기호인지가 음각된 기묘한 삼각형 돌멩이였는데 당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야광도 아니고 스스로 빛나는걸 보니 보석 종류인가? 비싸게 팔 수 있으려나.


"아니 생각해 보니 귀환석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네."


만약 마지막 정예 고블린이 이거랑 똑같이 생긴 돌멩이를 준다면 높은확률로 이게 귀환석일 거다.


귀환석은 정예를 잡으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했으니...


"오?"


이번엔 숫자 '1' 이 음각된 검은 돌멩이가 나왔다.


아무리 봐도 이거 1층을 뜻하는 거 아니냐? 그럼 이게 귀환석이라면 이 야광 돌멩이는 뭐지?


'몰라 시발.'


이제 와서 무슨 '감정!' 이라고 외쳐도 알려주진 않을 것 아닌가.


일단 챙겨 놓자. 나중에 확인할 방법이 생기겠지 뭐.


혹시나 해 다른 고블린 사체들도 쭉 살펴봤지만 뭔가 아이템을 주지는 않았다.


정말 짜다 짜. 이딴 쓰레기 같은 던전에 대체 왜 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고블린 입에 박혀 있던 글라디우스와 아밍소드도 회수했고 배낭과 물주머니도 찾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뭔가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칼이... 원래 이렇게 가벼웠나?'


아밍소드는 처음 보다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다.


뭐지? 죽다 살아나서 각성이라도 한 건가?


축복은 몸 상태만 낫게 해준 것 같던데?


지구에서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능력을 각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쩌면 이세계에서도 각성이라는 개념이 있을지도 모르지.


난데없이 강해진거면 뭐 진짜 레벨업이라도 한거냐? 하지만 절대 상태창을 외치진 않을거다.


어쨌든 검을 휘둘러보니 확실히 알겠다. 힘이 강해진게 맞다.


체감상 내 중학교 1학년 시절 수준 정도?


고작 중학생이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각성하기 전에도 나는 목검 1천회 내려 베기 정도는 휴식 없이 수행 할 수 있었다.


검도대회는 기술이 후달려서 승률이 낮긴 했지만 체력과 근성만큼은 전국구였다... 라고 자부한다.


그러니 앞으로 어지간해선 손목 나가는 일 정도는 없을 것 같다. 그것만 해도 대만족이다.


이게 각성인지 뭔지는 차차 알 수 있겠지.


신체 점검이 끝난 뒤엔 물과 음식을 미친 듯 들이켰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그 텁텁한 물도 그냥 아주 꿀맛이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인지 밑도 끝도 없이 쭉쭉 들어간다.


그렇게 식사하며 델리시아가 이끌어낸 기적같은 힘에 대해 생각했다.


이 힘의 정체가 뭘까? 분명 프레시아의 축복 이라고 한 것 같은데.


델리시아가 믿는 신의 이름인가?


그 기도하는 여자 목걸이와 관계가 있나?


프레시아? 신에게 기도하면 축복을 내려주는 건가?


혹시 내 빙의도 그 신과 관계되어있나?


"후..."


여전히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그 정체불명의 힘, 축복은 다시 사라진 뒤였다.


모든 상처를 낫게 만들고 체력을 회복시켜주다니.


이것만 해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이런 힘을 언제나 대가 없이 쓸 수 있을까? 그럴 확률은 낮겠지.


아닌 게 아니라 내 의식 한 켠에 자리 잡은 델리시아의 혼이 이전보다 훨씬 미약하게 느껴진다.


이전엔 '기진맥진' 혹은 '비몽사몽' 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 느껴지는 건...


'과도한 탈진으로 인한 기절.'


뭔가 전치 12주짜리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조금씩 회복되던 환자가 갑자기 전력으로 조기축구를 한판 뛴 느낌이랄까.


비유가 정확하진 않을 수 있지만 그런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금방 깨어났을 델리시아가 내가 경솔하게 위험에 빠져 버려서 힘을 과도하게 써버렸고, 그로 인해 깨어날 날이 한없이 미뤄진 느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새삼 휘틀러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초짜라고 해서 휘틀러가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그는 내 보모가 아니니까.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망나니인가 봐...


그런 못되먹은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심마가 올라오듯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 같기에 나는 숫돌을 꺼내 들었다.


칼날을 갈아내며 심마조차 흘려보내는 거다.


내 나약함을 탓하고, 경솔함을 탓하고, 신중치 못함을,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라.


스윽. 사악. 스윽. 사악.


휘틀러는 아직 정예방에 있으려나?


다시 만나면 할 이야기가 정말 많을 것 같다.


어디 가지 않고 꼭 거기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군...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칼날을 갈던 중이었다.


"이, 이런 미친..."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저 앞 통로에서 장신의 하이 고블린, 휘틀러가 나타났다.


"휘틀러... 꼭 다시 보고 싶었다."


난 너무 반가운 나머지 새파랗게 잘 벼려진 칼을 들고 화사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에 미친 성녀가 되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 루나 24.08.16 33 0 19쪽
16 삼위일체 24.08.15 32 0 18쪽
15 폭풍전야 24.08.14 39 0 17쪽
14 델리시아 24.08.13 40 1 16쪽
13 증명 24.08.12 40 1 17쪽
12 변수 24.08.10 42 1 17쪽
11 듀얼 24.08.09 44 1 20쪽
10 성녀 24.08.08 44 1 23쪽
9 룰루 24.08.07 44 1 22쪽
8 친구 24.08.06 46 1 19쪽
7 정산 24.08.05 42 1 18쪽
» 죽음의 경계 24.08.02 47 2 18쪽
5 '그거' 24.08.01 51 1 18쪽
4 괴물 24.07.31 58 1 15쪽
3 빙의 24.07.30 67 2 13쪽
2 24.07.29 116 2 12쪽
1 프롤로그 - 검극 24.07.29 104 2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