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으면 죽는 북부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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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7.30 19:32
최근연재일 :
2024.09.0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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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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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화. 죽일 명분

DUMMY

몇 시간 뒤 새벽. 수도로 호송되는 감옥마차 안에서, 수염 컷의 남자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곤거렸다.


“오늘 의뢰대로 공녀를 암살한다. 실수하지 않는다면 우리 용병단도 돈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죄수로 위장한 용병들이 은밀하게 눈빛을 맞췄다. 그러자 아프로 곱슬머리를 한 통통한 용병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꼭 죽여야 돼? 공녀님은 전장에도 앞장서서 나가주시고, 신분에 상관없이 도와주시잖아. 게다가...”


아프로 곱슬머리를 한 남자가 꿈꾸듯이 하늘을 바라봤다.


“존나 이쁘고. 괜히 대륙 최고의 미인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라니까.”


찬동하던 녀석들도 그 말엔 섣불리 고개를 젓진 못했다. 수염 컷은 그런 아프로의 머리를 쿵 쥐어박았다.


“사내새끼가 외모에 낚여서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죽이려고 하는 놈들은 널렸어! 공국의 시초신화는 알고 있잖냐!”

“은색 늑대는 불행을 가져온다는 소문 말이지?”


구석에 있던 메부리코가 코끝의 고드름을 털며 답하자, 수염컷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 카스토르 공왕이 사령 왕의 코어를 북부에 봉인하려 할 때, 은빛 까마귀가 성역으로 이끌었고 은색 늑대는 둘을 방해했다. 그렇다면...”


수염 컷은 정수리 중앙에 간신히 모여 있는 머리털을 입으로 불어 날렸다.


“은색늑대수인인 공녀는 불행을 넘어선 재앙을 불러 올 징조라 생각되지 않나?”

“그건...”

“소문으론 폴라리스 교단이 검증을 준비하려는데, 대공이 그걸 막았다더군. 구린내가 나지 않나?”


누런 이를 훤히 드러낸 수염 컷의 말에 죄수 일동은 침을 삼키며 수군댔다.


“확실히 공녀가 남들이 기피하는 사기가 짙은 전장으로 가는 이유가 저주를 뿌리기 위함이라는 소문이 있긴 하지...”

“은색 늑대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어!”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소문은 모두 은색늑대수인인 공녀를 향해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암살하려고? 성의 보안이 우리 같은 용병들한테 쉽게 뚫릴 리도 없잖아?”


아프로가 겁먹은 듯 소곤댔다.


“의뢰자가 내부자들을 매수해 뒀다더군. 은빛 까마귀 문양을 반대로 단 이들이 우릴 도울 거다.”

“하지만 공녀는 5서클 마법사에 하급이지만 오러도 쓸 수 있다는데 어떻게...”

“공녀는 항상 그런 것처럼 전장에서 마력을 남용해, 사기가 축적되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다더군. 뭐 혹시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수염 컷은 옆에 있던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문가를 영입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빨수집가입니다.”


카벨은 험악한 인상을 아낌없이 선보이며 혀를 날름댔다. 딱 봐도 범죄자의 관상을 본 이들은 동지애가 담긴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듣자 하니 기사를 쓰러뜨려 체포되었다더군. 설마 이런 인재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북극성이 인도하심이 틀림없다!”

[오오...!]

“이 녀석은 이빨을 전리품으로 취하는 놈이다! 공녀의 이빨을 얻으면 자기 잇몸에 박아 넣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런 말까진 안 했...”

“그걸 이 녀석은 결혼이라고 한다더군!!”

“미친...”

[오오오!!]


죄수들로 변장한 용병들의 면면에 희망이 감돌았다. 몇몇은 까마귀가 새겨진 징표 같은 것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일이 풀리려면 이렇게도 풀리는구나.’


카벨은 처음으로 이런 얼굴로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하며 주먹을 쥐었다. 이상한 설정이 덧붙여 진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계획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들이 행동하면 성안은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 틈에 도망치기만 하면 됐다.


암살 성공이 우려됐지만, 살펴보니 오러나 마법도 못 쓰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윗대가리 몇 놈만 적당히 손봐두면, 나머지는 병사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런데 9년 동안 찾았던 여자가 미친개의 딸이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재해의 저울이 가리키는 공녀를 지켜야 하는 건 변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대공에게 눈에 띄지 않으면서 공녀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해 신뢰를 얻어 지킨다? 그게 가능할 정도로 공녀에 대한 대공의 부성애가 얕진 않았다.


공녀에게 접근한 남자에 대해선 일체의 타협 따윈 없는 폭군. 게다가 그 폭군이 대륙에 몇 없는 소드마스터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녀석들까지 알 정도면 공녀에 대한 나쁜 소문이 상당히 퍼져 있는 것 같은데...’


카벨은 녀석들이 말하던 시초 신화와 은색늑대소문을 복기했다. 수도로 갈수록 길가엔 장대에 꽂힌 은색늑대 머리가 더욱 많아졌다.


저런 시초 신화가 있을 정도니, 은색늑대수인인 공녀의 취급이 좋을 리 없겠지...


덜컹덜컹-


새벽녘이 돼서야 마차는 북부의 수도 카스토르에 도착했다. 대공이 있는 카스토르 성의 커다란 위용은 놀라웠다.


화려한 장식은 최소화하고 실용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 거대한 벽 같았다.


방호 마법이 걸려 있는지, 곳곳에 큼지막하고 선명한 푸른빛 마석이 박혀 있었다.


역시 마석의 주요 산지다운 씀씀이였다.


“모든 것을 북극성의 인도대로.”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병사가 암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수염 컷과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니 사전에 이야기된 것 같았다.


‘그냥 버리는 말 정도인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암살에 동원되는 규모가 큰가 본데?’


병사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면 난감했다. 만에 하나 공녀의 암살이 성공한다면 닭 쫓던 개꼴이 되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대공이나 공녀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게 공녀를 방패 삼아 냅다 던지고 튀었는걸...


그렇게 카벨이 양자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어?”


불행을 선고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옆을 보자 작은 체형의 메이드 복 여성이 금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저기... 맞죠?”


카벨은 혀를 차며 고개를 휙 돌렸다. 분명 공녀와 함께 있던 메이드 엔야였다. 식은땀이 폭포처럼 새어 나왔다.


‘미친 여기서 쟤가 왜 나와?!’


감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녀를 구한 게 알려졌다간 자칫하면 대공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미친개를...


앞에서 하나하나 암구호를 주고받는 멍청이들에게 얼른 들어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머리 빈 녀석들은 그것이 신성한 의식이라도 되듯 암구호를 주고받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잠깐만요! 저기 분명...!”


다가오는 빠른 발걸음. 결국 카벨은 앞에 있던 다른 경비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뭐야 죄수! 엉겨 붙지 말고 차례를 기다...”

“제발 빨리 감옥에 넣어주십시오!! 저 밝힐 게 엄청 많은 놈입니다! 여, 여기 죄수로 위장한 용병들은 사실 공녀의 암살자입니다! 협력자가 어떤 표식을 가졌는지 다 말할 테니까 제발 감옥에!! 그리고 정상 참작으로 빠른 석방을!!”

“역시! 공녀님을 구해주셨던 분~ 저 엔야에요! 모르시겠어요? 아! 안 그래도 공녀님이 찾고 계셨는데!”

“저리가! 제발 좀!!”


속도 모르고 엔야는 해맑은 얼굴로 카벨의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반면에 암구호를 주고받던 병사와 수염 컷 패거리의 얼굴은 썩어 문드러졌다.


+


“쓰레기 투성이군.”


대공의 낮은 목소리가 알현실 내부로 퍼졌다. 곳곳에 걸린 마족의 머리뼈와 무기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쿵-!


쌓여있던 문서들을 내리친 대공은 짙은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일어섰다.


흩날리는 문서 사이로 갑옷을 입은 거대한 사자수인과, 문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부복했다.


“레오닐. 라셀. 내 딸을 없어지면 정녕 북부의 모든 문제가 사라질 거라 생각 하는가?”

“대공께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보거라 라셀. 공국의 귀족이라는 놈들이 무능력한 원인을 무엇으로 돌리고 있는지.”


라셀이라고 불린 중년 남자가 앞에까지 날아온 문서를 살폈다. 마석의 생산량 저조에 대해 은유적으로 공녀의 시찰을 탓하고 있었다.


은색늑대수인인 공녀가 다녀간 이후 광산에 사기가 깃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실상은 제 탐욕이 더 커졌을 뿐이겠지.


그만큼 북부에선 은색늑대가 불행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는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공녀가 은색늑대수인이라니... 빌미로 사용하긴 충분하고도 남았다.


타오르듯 풍성한 금색 숱을 자랑하며 사자수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녀님의 반려 후보 결정은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미 신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으음...”

“은색늑대수인이신 공녀님이 공국에 있는 게 문제라면, 결혼시켜 바깥으로 내보내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대공은 낮게 신음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녀의 나이는 이제 20살. 성인이 15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결혼 적령기는 지났다.


그럼에도 공녀의 혼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공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녀는 공국에 안정을 가져오고 싶다는 사명을 내걸고 그 모든 혼사를 모두 거절했다.


그 모습은 죽은 아내와 무척 닮아있었다. 대공은 인상을 쓰며 날카롭게 말했다.


“유레하가 공국 밖에서 내 아내처럼 되어도 말이냐?”

“...그건...”

“됐다.”


대공은 전투적으로 솟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눈만 감으면 12년 전 왕도에서 일어난 인마전쟁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어제 일 같이 떠올랐다.


왕국의 건국제에 아내와 어린 공녀만을 보냈다가 생긴 참변이었다.


끼이익-


상념에 젖어있을 때 문이 열리며 병사하나가 들어왔다.


“어제 공녀님을 구한 자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들여라.”


하복한 병사가 나가자, 대공은 왕좌 옆에 있는 묵직한 대검을 한 손으로 들었다.


‘또 하나 무덤이 늘겠군. 공녀님이 회복되지 않아 막을 사람도 없으니...’


라셀은 지끈대는 머리를 감쌌다. 지금까지 공녀를 구했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 축적 된 사기로 공녀가 쓰러진 것을 어부지리로 구한 이들이었다.


대가로 보상과 직위를 제안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공녀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공녀님을 제게 주십시오.-


여자들조차 질투를 넘어 설렐 정도로 공녀는 아름답고 고귀했다. 남자라는 생물은 항상 그 점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대공은 내기를 걸었다. 조건은 세 가지였다.


1. 대공의 일격을 받아내는 것.

2. 공녀의 마음을 얻을 것.

3. ????


마지막 세 번째는 앞선 두 가지를 통과한 자만이 들을 수 있었다. 아무도 들은 자가 없었지만...


‘소드 마스터의 윗 단계까지 바라보고 있는 대공의 일격이라니... 설마 이번에 오는 구혼자들에게도 같은 조건을 말씀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


라셀은 큰 기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험상 이쪽이 가장 피가 덜 튀기는 곳이었다.


이번 남자는 과연 어떻게 나올까. 엎드려 빌까? 아니면 당당하게 요구할까? 지금은 멸망한 소국의 황태자 같이 결혼 아니면 전쟁이라고 선포할까?


“크흠!”


옆을 보자 레오닐 원수가 팔짱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라셀은 손가락 하나를 보이며 작게 헛기침했다.


잠시 뒤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1번? 2번? 그것도 아니면 3번? 레오닐과 라셀이 귀를 기울였다.


-공녀 따위를 구한 게 뭔 대수라고! 사정이 없었다면 안 구했을 겁니다!!-

-따위라니 무슨 망발이냐! 일어서라! 곧 있으면 대공전하의 앞이다!-

-딸자식 두 번 구했다간, 하루 공왕이라도 시켜줄 기세야! 아 몰라~ 못가! 아니 안가!!-

-이, 이봐! 도와줘! 얼른 기둥에서 떼어내!-


라셀과 레오닐은 입을 떡 벌리며 바삐 대공을 살폈다.


“하하.”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잔뜩 구긴 대공의 웃음에 둘은 폈던 손가락을 접었다.


+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꽁꽁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카벨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옆엔 뒤따라온 엔야도 함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공의 측근으로 보이는 둘의 살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밖에서 소리 지른 게 다 들린 모양이었다.


대공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공녀‘따위’를 구한 게 뭔 대수냐고 했지.”

“그, 그건...”

“딸을 보았나.”

“...예. 어쩌다 보니.”

“어땠지?”

“존나게 이ㅃ... 아니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래도 ‘사정’이 없으면 구하지 않을 건가?”

“......”


대공은 목 칠 준비를 앞둔 망나니처럼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그 사정이 뭐지?”

“...북부에서 반드시 이뤄야 하는 개인적인 목적입니다.”

“그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보다 중요하다?”

“아, 아니 그러니까 이게 설명하자면 복잡...!”

“하하.”


폭발하기 직전의 웃음이 서늘하게 카벨의 목에 닿았다. 죽을 위기에 봉착하니 머리가 절로 돌아갔다.


북부는 정보 통제가 심한 곳이었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건 항상 나라가 그은 선을 넘는 법이었다. 특히 미인이 연관된 정보는 더욱.


대공은 인마전쟁에서 사랑하던 평민 출신 아내를 잃었다. 유일한 혈육으로 공녀가 있지만 20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남은 딸에 대한 대공의 과보호 때문이라는 소문이 만연했다.


‘공녀가 모욕당했으니, 꼬투리를 잡아 죽일 생각인가? 설마 공녀를 구했는데 그러진...’


혹시 몰랐다. 상대는 형제들을 도륙 내고 피 묻은 공왕의 자리에 오른 미친놈이니까. 남부 연합장이 말한 대로다.


시시각각 변하는 카벨의 면면에 대공이 서늘한 시선을 맞췄다. 이걸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듯했다.


“암살 위기에 처한 내 딸을 네놈이 구했다더군.”


올 게 왔다. 어차피 공녀를 구하고 대공을 만난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카벨은 대공과 엮이는 걸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사심 없는 놈처럼 보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공녀를 지켜야 한다지만 당장 죽는다면 소용없는 일 아닌가?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녀님과 옆에 계신 분이 거의 다 물리치고 소인은 숟가락만 올렸을 뿐입니다! 헤헤...”

“아니에요 전하! 공녀님은 사기 때문에 습격받은 직후 쓰러지셨어요! 이분이 아니었다면 큰일 났을 거예요!”


이런 씨발. 카벨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나풀대는 엔야를 노려봤다.


그녀는 살기를 모르는 어린 초식동물처럼, ‘저 잘했죠?’라며 입을 벙긋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대단한 재주로 사ㄱ...”

“무언가 더 있나.”

“아, 아뇨! 이게 다입니다...”


엔야는 사기를 풀어냈다는 부분을 이야기하려다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 말하지 않지? 혹시 공녀가 그렇게 시킨건가...?’


카벨은 공녀의 의도를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단 말이지?”


살의 담긴 감탄사에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


고오오-


대공의 몸에서 군청색의 오러가 이글거리자, 카벨의 탄식이 깊어졌다.


“전하! 아닙니다! ...그, 그래! 이후 병사들이 때마침 도착해 처리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말도 안 돼요! 벨티오 경은 나중에 왔다구요! 당신이 없었다면 공녀님은 죽었을 거예요!”

“그래?”


미친. 적개심이 오르는 효과음이 있다면 들릴 것 같았다. 대공이 휘두르는 검의 속도가 빨라졌다.


공녀를 외간 남자가 구했다는 사실 자체가 탐탁잖은 거겠지.


카벨은 필사적으로 엔야에게 말 좀 맞춰 달라며 입으로 벙긋거렸다. 여차하면 딸 바보 대공의 자식사랑에 깔려 죽을 같았으니까.


하지만 공녀의 메이드가 되는데 눈치는 필수사항이 아닌 모양이었다. 엔야는 자신만 믿으라며 윙크를 보냈다.


‘아, 안 돼. 뭔가 살아날 방법이...’


그때 라셀이 헛기침 하며 병사에게 받은 문서를 펼쳤다. 곧 이채가 담긴 시선을 카벨에게 보내며 앞으로 나섰다.


“대공전하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자는 잘라내기 마을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갱단을 모두 쓸어버리고, 몰락한 기사였던 라븐을 처리했다고 합니다.”

“이런 개 같은...!”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병사들의 웅성거림에 묻히고 말았다.


“라븐이라면, 그 중급오러를 다루던...”

“맞아 맞아! 잘라내기 마을에 눌러앉아, 뒷세계로 물자를 제공하던 그자야!”

“세상에. 좀처럼 꼬리를 드러내지 않고 거처를 옮겨서 골머리를 앓았는데 저자가...”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다고...? 카벨은 갈수록 좋아지는 자신의 평판에 울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상대는 술에 많이 취해 있었고... 내분이 있었는지 이미 상처를...”

“게다가 체포당해 오면서 공녀님의 암살계획을 밝혀내, 관련자들 솎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격하게 카벨이 컷해달라며 손날을 흔들었지만. 대공은 어느새 대검에 기름을 붓고 있었다.


붕- 붕!


점점 거세게 휘둘러지는 대검을 보며 카벨이 치를 떨었다.


죽일 생각 만반이군...


“저자의 속박을 풀어라.”


카벨은 구속이 풀리자 좌절하듯 바닥을 짚었다. 그러자 사형선고처럼 대공이 명했다.


“너를 공녀의 호위 기사로 임명하겠다.”


그 순간 웅성거리던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 졌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를 가졌던 공녀는 항상 남자로 인한 문제를 달고 살았다. 그래서 공녀의 주변엔 여성만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호위... 그것도 기사라니. 그건 대놓고 문젯거리를 만들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대공은 여전히 적개심 가득한 오러를 일으키며 카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너는 어쩔 거지?’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냥 죽이겠다는 뜻이잖아!’


호위 기사. 어떻게 보면 카벨이 가장 손쉽게 공녀를 지킬 방법이었다.


하지만 카벨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옛날에 대공의 도끼병으로 어린공 녀와 실수로 닿은 호위 기사들을 모두 반병신으로 만든 것을...


저런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한 건 꼬투리를 잡아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죽어도 싫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에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대공은 너무나도 만족스러워하며 대검을 카벨에게 겨눴다.


“옳지. 나의 명을 거역했군! 좋다. 내 일격을 받고 살아남아라. 그럼 용서해 주지.”


죽일 구실을 찾고 있던 대공은 훌륭한 명분에 사납게 웃었다.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카벨은 좆됐음을 감지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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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화. 이방인이 아니라 카벨. 24.08.09 46 2 17쪽
10 9화. 주문하신 천벌. 직접 수령하실게요~ 24.08.08 56 2 16쪽
9 8화. 미드 문 김에 바텀 감 24.08.07 58 2 18쪽
8 7화. 치킨레이스 24.08.06 58 2 13쪽
7 6화. 금고아 24.08.05 57 3 17쪽
6 5화. 언더커버 for 공녀 24.08.04 65 3 18쪽
5 4화. 원하는 건 대공. 24.08.03 70 4 15쪽
» 3화. 죽일 명분 24.08.02 77 4 19쪽
3 2화. 꾸르륵 24.08.01 77 5 16쪽
2 1화. 금니네 24.07.31 124 6 16쪽
1 프롤로그 - 캐치볼 24.07.30 262 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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