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으면 죽는 북부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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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7.30 19:32
최근연재일 :
2024.09.0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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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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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미드 문 김에 바텀 감

DUMMY

8화


“그분이 반려 후보로서 마음에 안 드십니까?”


툭-


새하얀 식탁보 위 문 핏물 가득한 고깃덩어리가 떨어졌다. 대공은 시뻘건 피가 흐르는 나이프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럴 때마다 대공이 보고 있던 문서에 핏방울이 튀었다.


일부 귀족들이 집단으로 상소한 ‘공녀님을 수도에서 떨어뜨려라! 다시 전장으로!’라고 적힌 부분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커다란 식탁으로 음식을 나르던 하녀들 역시 시간이 멈춘 듯 굳어있었다.


옆에 자리하고 있던 유레하는 흔들림 없는 하늘색 시선을 보냈다.


“...잘못 들었는데 다시 말ㅎ...”

“카벨 씨가 마음에 차지 않으신지 여쭈어봤어요.”


대공의 송곳니가 참지 못하고 입술 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그 새ㄲ... 녀석이 마음에 든 것이냐.”

“...네.”


유레하는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딸을 오래토록 지켜봐 온 대공은 저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레하에게 많은 재능이 있었지만 거짓말 하는 재능만큼은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대공은 떨어진 고기를 집곤 철천지원수처럼 씹었다. 거짓말이건 아니건 남자 놈 하나 때문에 공녀가 저렇게 나선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어디가.”

“.....?”

“어디가 마음에 든 것인지 말해라.”


주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유레하는 당혹스러웠다.


어디가 마음에 들다니... 곰곰이 지난 하루를 되짚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한밤중 외간 남자를 침소로 불러 손을 잡았다며, 엔야가 꺅꺅 대던 것이 떠올랐다.


“...손이 크고 든든했습니다.”


거짓말이군. 그럼에도 대공은 어젯밤 유레하의 손을 잡고 있던 그 놈팡이의 손이 어느 쪽이었는지 떠올렸다.


오러가 실린 나이프가 고기를 접시 채 잘랐다.


‘검을 나누다 보면 불상사도 생기는 법이지.’


대공은 녀석의 손목을 담아둘 케이스를 준비해 둘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언젠가 녀석에게 금으로 된 리본을 달아 하사하겠노라 다짐했다.


“대공 전하. 집사장이옵니다.”

“들어와라.”


말끔한 복색의 초로의 노인은 격식 있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대공에게 서류를 건넸다.


“으음...”


서류를 본 대공은 침음을 흘리며 들고 눈썹을 찌푸렸다. 유레하도 어느새 포크과 나이프를 놓고 무겁게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식된 자들의 명단인가요?”

“그래...”


대공은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곱씹듯 읽어 내려갔다. 그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어느새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유레하가 대공의 떨리는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까운 인재들이 이렇게 또 사라지는군...”

“아버님 잘못이 아닙니다.”


공녀의 다독임에도 대공은 시름이 깊어졌다.


마력을 사용함에 따른 사기 축적. 그것은 북부에선 악몽과도 같은 현상이었다.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난 자들이라도 저항력 이상으로 사기가 축적되면 더 이상 마력을 쓸 수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사기가 천천히 생명과 마력을 파먹어 미치광이가 되거나 폐인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죽는다.


이것은 북부가 발전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인재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에 시간이 지날수록 재능 있는 자들이 사라진다.


‘그렇게 지금까지 떠나보낸 이들이 얼마인가...’


사기에 홀린 몬스터와 마족들이 몰려드는 상황에 마력을 쓰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공의 마음을 아는지 유레하의 목소리 역시 가라 앉아있었다.


“전장에서 제가 조금 더 노력했더라면...”

“모두를 구할 수 없는 법이다. 네가 누구보다 노력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않느냐.”


얼음같이 무표정하던 유레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새하얀 설원 같은 피부 위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대공은 손수건을 건네며 안타깝게 딸을 위로했다. 이런 딸을 볼 때마다 잃어버린 아내가 떠올라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레하는 매번 제 몸도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 마력을 사용하곤 했다. 그 결과 매번 사기가 쌓여 괴로워했다.


일반인의 몇십 배. 사기에 대한 저항력이 유별나게 강한 유레하가 전장에서 떠안고 오는 사기의 양이었다.


저항력이 남다르기로 유명한 대공가에서도 독보적인 수치였다.


아무리 저항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막대한 사기가 가져오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딸은 항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앞장서 마력을 사용했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공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 와중 유레하는 대공의 어깨를 다독이며 카벨을 떠올렸다.


‘그 사람의 능력이라면 이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유레하는 명단을 보며 카벨을 떠올렸다. 사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젯밤 자신의 사기를 연속해서 풀어줬을 때 상당히 지쳐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부탁할 순 없었다.


그래도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이야기는 해볼 순 있겠지...


유레하는 부디 카벨이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남자보다 괜찮은 사람이기를 바라며 창백한 손을 꼭 쥐었다.


그때 대공은 천천히 이름들을 훑다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라셀의 아들인가...’


레오닐 원수와 함께 자신의 수족과 같은 충신, 재무장관 라셀의 아들인 아셀 글리포드.


라셀의 성격과 재능을 닮아, 무척 영특하고 공명정대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간간히 교류했던 유레하도 그 이름을 발견했는지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마녀의 저주가 하필... 젠장!”


양피지가 구겨지며 대공의 주름 또한 깊어졌다.


‘뭐라도 당장 두들기고 싶군.’


대공은 더욱 어두워져 가는 딸을 보며 서류를 옆에 치워뒀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좋은 샌드백이 있는 것이 떠올랐다. 그 샌드백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고민 중 하나의 당사자라는 것이 더 대공의 마음에 들었다.


날카롭게 뜬 투박한 갈색 눈이 옆에 있던 집사장에게 향했다.


“중급 치료 물약을 구비해 놓았겠지.”

“그, 그것이...”

“왜 말을 못 하는가.”


맹수가 그르렁거리는 것 같은 대공의 기세에 집사는 냉큼 바닥에 엎드렸다.


“죽여주시옵소서! 대공전하... 가, 갑자기 중급물약의 재료의 핵심재료들이 시장에 풀리지 않아서...!”

“뭐라?!”


대공의 얼굴 여기저기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이 오갈 데 없는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유레하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혹시...”


아침에 카벨과 아버지의 대련이 물약이 떨어지며 끝났다는 사실이 다시금 되새겨졌다.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게 일어난 재료부족. 왠지 카벨의 얼굴이 스쳤다. 하지만 아닐 거라며 애써 털어버렸다.


오늘 아침 만난 성을 나간 사람이 반나절 만에 수도의 시장에 영향력을 끼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


“은색늑대수인이 북부에 불행을 내리고 있다! 공녀는 재앙을 불러올 거다! 공녀를 다시 전장으로 추방시켜라!!”


수도의 광장. 체포되어 가는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남자의 허리춤에 긴 줄로 묶인 은색늑대 새끼의 사체가 핏자국을 내며 끌려갔다.


사람들은 쉬쉬하면서 그 위로 침을 뱉거나 돌을 던지고 있었다. 병사들도 굳이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카벨은 눈길만 힐끗 주고 돌아섰다. 은색늑대와 공녀를 향한 비난은 요 며칠 눈이 아플 정도로 봤기 때문이다. 저 정도는 오히려 양반이었다.


‘생각보다 은색늑대와 공녀의 이미지가 안 좋네. 이러면 공녀를 끌어안고 있는 대공도 힘들겠는데?’


북부는 대공의 카리스마와 소드마스터라는 무력으로 결집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심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힘을 숭상하는 북부다.


그런 곳에서 공녀라는 약점을 가진 대공은 안팎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불평하는 자 중엔 귀족들도 있었으니까.


왜 딸을 과보호하는 대공이 구태여 공녀의 반려 후보를 모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바깥으로 내보내 북부의 안정과 공녀의 안전을 도모할 셈이겠지.


‘물론... 대공은 딸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직접 그 집착을 경험한 카벨은 소름을 털며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속 좁은 기사의 이갈이를 멈추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캬~! 북부의 기사가 뭔가 있긴 하네! 그 많은 녀석들과 싸우고도 살아있다니. 덕분에 거리가 한층 더 안전해진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피로에 찌든 벨티오가 흉갑에 묻은 부산물을 닦으며 이를 갈았다.


그의 뒤로 지나가는 커다란 호송 마차엔 20명은 되는 범죄자들이 널브러져 수송되고 있었다.


모두 카벨과 벨티오가 반나절 동안 날뛴 결과물이었다. 물론 벨티오는 호위라는 명목으로.


“아직도 꽁해있는 겁니까? 고작 몇 놈 정도 짬처리시켰다고 오래가시네.”

“몇 놈이 아니다 몇십 명이었다! 그것도 조직 세 개분!! 네놈은 숫자도 못 세는가?!”

“공녀님 암살 문서를 발견했는데 어쩔 수 없잖습니까? 옳은 일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고 누가 그러는 바람에... ”

“큭...”


벨티오는 카벨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데릭이 물약에 수작을 부리러 간 사이, 발견한 문서엔 지난번 공녀 암살을 주도한 조직들과 앞으로의 계획이 적혀있었다.


결국 벨티오는 자신이 한 말에 묶여, 울며 겨자 먹기로 카벨과 함께 연이어 다른 조직들을 습격했다.


호위라는 명목으로 쥐어짜지며 반나절 정도를 범죄자들과 뒤엉킨 시간.


슬슬 정신상태는 카벨의 뒤통수를 볼 때마다 바프(검)이 근질근질 해지는 지경까지 갔었다.


저놈만 해치우면 이 지옥도 끝나는 거 아닌가? 무리하게 실적을 세우려다 당했다고 하면...?


구체적인 계획이 정해지고 실행단계까지 갈 정도로 몰렸을 때쯤... 공녀 암살에 관련된 조직토벌은 종료됐다.


남은 건 벨티오의 불완전 연소한 마음뿐. 분명 옳은 일을 했고 북부에 이로운 일을 했는데... 뭔가 처음 느껴보는 엿 같은 기분이었다.


“또 암살인가. 공녀님이 뉘 집 개도 아니고. 개나 소나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네.”


하지만 카벨은 남의 옹졸하게 불타는 마음을 건사해 줄 생각은 없는지, 공녀 암살에 대해 적힌 문서를 구기고 있었다.


북부에서 가장 안전한 대공의 성안에 있으면서 왜 이렇게 위협에 시달리는지...


공녀를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카벨 입장에선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과 죄수로 위장한 용병들, 이번엔 범죄 조직들까지 공녀를 노리고 있었다.


문제는 감옥마차 안에서 작당했던 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 내부에도 공녀가 죽길 바라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축적했는지 사기를 덕지덕지 달고 와 골골대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카벨 입장에선 난처했다.


‘전이되기 전 글귀에 따르면, 결국 델카서스라는 그 백골 놈에게 암살당하기도 하고...’


이렇게 쉽게 공녀의 암살 시도가 이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공녀가 은색늑대수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편이 없다는 것이 커 보였다.


방법이 필요했다. 좀 더 안전하게 공녀를 지킬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웅성웅성-

덜컹- 덜컹-


그때 옆으로 초라한 호송마차가 소수의 사람들을 싣고 지나갔다.


주변에 선 이들은 안타까워하며 들풀이나 꽃을 마차 앞에 던졌다.


“이번에도 아까운 분이 가는군... 서기관님 참 좋으신 분이었는데...”

“반년 전에는 치안관님도 사기에 침식되셨는데 이렇게 또...”


사람들의 말에 이어 옆에 있던 벨티오가 혀를 찼다.


“사기가 침식된 자들이 또 나왔나 보군. 곧 마족령에서 사기에 홀린 마족과 마물들이 넘어올 때가 됐는데 큰일이다.”

“넘어올 때라니. 마족과 마물이랑 넘어오는 주기가 따로 있습니까?”


벨티오는 득의양양하게 코웃음을 쳤다. 경갑 차림의 어깨가 몇 자는 치솟은 걸로 보아 묘한 데서 자신감을 회복할 생각인 듯 했다.


그 묘한 곳이 자신이라는 걸 카벨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 그것도 모르다니 무식한 외부인 같으니라고. 북부인이라면 상식이다.”

“북부인 아니고, 온 지 3일밖에 안 됐거든? 정신승리하고 싶으면 정보 통제 풀고 골든벨 뜨던가.”


벨티오가 헛기침으로 급히 이야기를 마쳤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북부의 정보 통제는 무척이나 삼엄했다. 뿐만 아니라 북부 전체를 결계로 덮어 외부에서 관측과 침입이 일체 불가능하게 만들어 진 상태였다.


외부인이 들어오는데도 까다롭지만, 나가는 덴 더욱 까다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카벨이 굳이 남부의 성소를 통해 들어온 이유이기도 했다.


‘아마도 코어에서 사기가 새어 나오고 있는 것 때문이겠지. 외부에 들키면 약점이 될 테니까.’


연합장이 마지막으로 사기를 확인한 시기와, 북부가 결계를 만들기 시작한 시점이 엇비슷한 걸 생각하면 쉽게 낼 수 있는 결론이었다.


조금이라도 긁으려다 팩트로 긁힌 벨티오는 연신 헛기침하며 말했다.


“성역에서 사령왕의 코어에서 새어 나오는 기운을 감당 못 해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때 이끌린 마족 놈들이 쳐들어오곤 하지.”

“사령 왕의 코어와 성역이라. 시초 신화 말이죠? 성역으로 가는 방법이 오래전 유실 되었다던데 그 영향입니까?”

“외, 외부인이 어떻게 거기까지...!”


아휴~ 당신네들 멸망 막으려고 정보수집에 판타지 라이프 꼬라박아 알아냈지. 어떻게 알았겠니?


카벨은 적개심 가득한 이갈이를 멈추고 말을 돌렸다.


“남부의 지인에게 좀 들었습니다. 그보다 그렇게 된 원인이 뭡니까?”

“크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론 대공가의 피를 이은자가 은빛 까마귀의 인도를 받아 성역에서 주기적으로 정화해야 한다더군. 하지만...”

“하지만?”


벨티오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3백 년 전부터 대공가의 누구도 은빛 까마귀의 인도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

“그래서 일부 불경한 놈들은 대공가의 정통성을 의심하기까지 하더군. 그런 상황에 공녀님이 은색늑대수인으로 태어나기까지 했으니...”


카벨은 왜 이렇게 공국의 전 국민이 앞장서 공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시초신화에 악역으로 나오는 은색늑대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몇백 년 동안 누적된 대공 가의 불신이 은색늑대수인 공녀가 태어남으로서 폭발한 탓이었다.

정황상 누가 봐도 망조라고 생각될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데? 그러니 성안에서도 암살 협력자가 나올만 하지.’


카벨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했다.


이렇게 된 이상 공녀를 대공만 믿고 성에 놔두는 건 하책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진 소드마스터라도 민심을 앞세운 정치질까지 막아낼 순 없을 테니까.


“응? 잠깐.”


그 순간 카벨의 머릿속으로 커다란 깨달음이 스쳤다.


공녀를 그대로 둘 수 없으면 안전한 곳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실적도 쌓으면서.


“벨티오씨.”

“뭐지.”

“만약 죽은 자들의 사기가 풀리면 어떻게 됩니까?”

“사기를 풀 수 있을 리가 없...”

“됐으니까 어떻게 되는지만.”


잠시 고민하던 벨티오가 아픈 손가락을 찔린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아마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사기가 풀렸을 때를 상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신분이 되돌아올 리는 없지.”

“북부는 인재를 아끼는 곳 아닙니까? 다시 원래 신분과 직책으로 되돌리지 않는 겁니까?”

“이미 빈 자리를 차지한 귀족들에게 반발을 살 거다. 안 그래도 공녀님 일로 예민한 귀족들을 들쑤시는 꼴이니까. 하지만...”


그는 건틀릿에 주렁주렁 엮인 머리카락들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그들은 북부의 안전과 발전을 책임지던 영웅들과 인재들이다. 사기가 풀린다면 판도가 바뀌겠지.”


대답을 들은 카벨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사기에 침식된 죽은 자들이 있는 잘라내기 마을. 북부에서 유일하게 사기를 풀 수 있는 카벨. 마치 차려진 밥상 아닌가?


그뿐인가? 그의 말대로라면 아까운 인재들이 가치를 잃고 묶여 있는 장소다. 잘하면...


카벨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와 씨! 존나 천재! 이게 미드 문 김에 바텀 간다는 건가?!”

“미드... 뭐?”

“벨티오씨 아까 조직에서 물약 하나 꿍쳐뒀죠? 다 아니까 횡령죄로 밀고하기 전에 넘겨주시죠.”

“그건 어떻...! 그것보다 횡령이라니! 이건 전하께 헌납... 이봐!!”


꼬라지 부리는 벨티오의 배낭 속에서 카벨은 솜씨 좋게 물약들을 꺼냈다. 중급과 하급 물약이 각각 하나씩이었다.


하급 물약에 ‘리암’이라고 이름표를 보니 이건 저 녀석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거겠군...


그의 괴상한 취미를 반나절 만에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몸서리치며, 하급 물약은 다시 넣었다.


“나중에 빌린 돈이랑 같이 갚을 테니, 달아두쇼.”

“큭! 안 갚기만 해봐라! 바프의 때로 만들어주지!”


뭐의 때로 만든다고? 협박이 이렇게 소름 돋을 줄이야.


“알겠으니까 그럼 우리도 슬슬 갑시다.”

“또 어딜 갈 셈이지...?”

“실적도 채우러요. 겸사겸사 판 깔 자리도 봐두고.”

“...뭐??”


카벨은 시야에 보이지 않는 죽은 자들의 마차를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됐지만, 벨티오는 저 웃음만으로 무언가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의말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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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화. 이방인이 아니라 카벨. 24.08.09 48 2 17쪽
10 9화. 주문하신 천벌. 직접 수령하실게요~ 24.08.08 56 2 16쪽
» 8화. 미드 문 김에 바텀 감 24.08.07 59 2 18쪽
8 7화. 치킨레이스 24.08.06 58 2 13쪽
7 6화. 금고아 24.08.05 58 3 17쪽
6 5화. 언더커버 for 공녀 24.08.04 65 3 18쪽
5 4화. 원하는 건 대공. 24.08.03 70 4 15쪽
4 3화. 죽일 명분 24.08.02 77 4 19쪽
3 2화. 꾸르륵 24.08.01 77 5 16쪽
2 1화. 금니네 24.07.31 124 6 16쪽
1 프롤로그 - 캐치볼 24.07.30 263 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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