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타짜 정희원
제40화 타짜 정희원
“패 돌리시죠.”
내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에 꽤나 놀라셨는지 토끼눈이 된 할머니들.
빨간 가디건 할머니는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는 푹 들어간 실눈이었는데, 패 돌리시란 내 말에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어린 게 배가 많이 고픈겨. 과자 한 봉지에 할마시들하고 놀아준다고 한 걸 본께.]
“화투는 칠 줄 알어?”
“잘은 모르지만 그림 정돈 맞출 줄 압니다. 그리고 화투라는 게 운칠기삼 아니겠습니까? 제가 운이 좀 좋은 편이라서요.”
순간, 옛날에 봤던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오홍호호··· 맞네 맞어. 운이 다여.”
“아는가 모르겠지만 우린 지금 고스톱 치는 거여. 치면서 찬찬히 갈켜줄 테니께 쫄지 말고.”
쫄아요? 누가요? 얼른 패나 돌리시죠.
그렇게··· 슈퍼 앞 평상에서 할머니들과 ‘꽃의 전쟁’, 화투가 시작되었다.
“백합 닮으신 어르신, 장미 닮으신 어르신. 누가 선 할지··· 시작하시죠.”
꽃의 전쟁에 어울리게 난 흰 옷 할머니를 백합 할머니, 빨간 가디건을 두른 할머니를 장미 할머니라 불렀다.
그러자 돌아오는 말.
“백합? 장미? 지럴허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마음으론 웃으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백합 할머니.
백합 할머니가 두 팔을 뻗어 담요 위에 흩어져있던 화투장들을 한 곳에 모으셨다.
– 사다락, 사다락
할머니의 손 짓 몇 번에 화투장이 서로 부딪히다 금세 포개어졌다.
생각보다 손이 빠르시네.
어느새 할머니 손아귀로 모인 48장의 화투들.
그 화투장들이 조그마한 손 안에서 오와 열을 맞춰가며 쌓여가고 있었다.
“읏차···”
백합 할머니가 손바닥으로 화투를 몇 번 두드리자 화투장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시던 장미 할머니가 몸을 당겨 앉으셨다.
진심으로 전투에 임하겠다는 의지가 발현된 순간.
– 터억.
백합 할머니가 쥐고 있던 화투장들을 담요 가운데 내려놓으시더니 손바닥으로 좌우로 눌러 밀어내자 화투장들이 부채펴듯 옆으로 퍼졌다.
카지노 딜러 하셨던 분이야?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자, 하나씩 골러. 선 할 사람 정해야 하니께. 밤일낮장인 거 알제?”
밤일낮장··· 들어봤다.
밤에는 가장 낮은 숫자가, 반대로 낮에는 가장 큰 숫자 집은 사람이 선이 되는 룰.
선, 먼저 하면 유리한 건가?
이럴 땐 속마음 듣는 능력보단 화투장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게 더 나았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뭐, 남들 뭐들고 있는지는 알고 시작하는 거니까.
난 가장 가운데 있는 화투 한 장을 집어들어 보지도 않고, 담요를 향해 내리쳤다.
[어디서 본 건 있나보네···오홍호호]
백합 할머니의 마음소리가 들려왔고.
“사쿠라. 3이여.”
비교적 낮은 숫자다. 그리고 뒤이어 뽑은 두 할머니들.
장미 할머니는 흑사리 4를, 백합 할머니는 단풍, 10을 뽑으셨다.
“내가 선이니께 돌릴께.”
다시 백합 할머니 손으로 빨려들어가 섞이는 화투들.
백합 할머니가 장미 할머니에게 화투를 쥔 손을 내밀었다.
“퉁!”
그 말씀과 동시에 백합 할머니가 능숙하게 플레이어들 앞으로 화투를 던지기 시작했다.
– 턱, 턱
양궁 과녁 엑스텐을 맞추듯 정확하게 내 앞에 떨어지는 화투장.
난 내 앞에 깔린 화투장을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다.
똥광, 비광··· 광이 두 개나 들어왔네?
이 정도면 첫 끗발치고 나쁘지 않아.
그때 날 힐끔 보시던 장미 할머니가 날 한심하듯 보며 말씀하셨다.
“이봐, 화투에서 젤로 중요한건 말여, 맴을 들키지 않는 거여. 좋은 거 들어왔다고 웃지 말어~ 마스크 써도 다~ 보여··· 왜? 광 두세 개 들어왔어?”
아··· 그게 보였어요?
역시 연륜은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난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다시 전투에 임했다.
여전히 날 햇병아리 취급하시는 두 꽃 할머니들.
하지만, 흐흐흐···
***
“저, 여기서 스톱할게요. 청단 3점, 고도리 5점··· 참, 제가 고 세 번 했죠? 세 번했으면 나온 점수에 두 배···인거 맞죠? 두 분 광박에 아··· 백합 어르신은 안타깝게 피박까지···”
[도대체 얜 뭐여? 뭐 이렇게 잘혀?]
[처음하는 녀석이 한두 판 운 좋게 이길 수 있다 해도 이게 벌써 몇 판 째여?]
“에헴···”
약간의 짜증과 분함이 섞인 기침소리.
점당 100원짜리 고스톱이지만 이게 은근 점수가 많이 나면 꽤나 많은 돈이 오간다.
세종대왕님 몇 분이 벌써 내게 오셨으니···
처음 칠 땐 분명 생긋 생긋 웃으시면서 손주 대하듯 하셨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말씀하시는 속마음도 영~
이제 슬슬 빠질 때인가?
난 일부러 시계보는 척 했다.
“어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이만 저 가봐야···”
“어허! 이러코롬 다 따고 어딜 간단가!”
갑자기 역정을 내시는 장미 할머니.
그때 옆에서 들려온 냥이 소리
– 냐아옹~
땅에 떨어진 육포를 엄청 열심히 뜯어먹고 있던 냥이가 할머니 역정에 놀라서는 내가 걱정돼서인지 날 빤히 쳐다봤다.
“도대체 뭐하는 총각이여?”
내 정체를 묻는 백합 할머니.
“아··· 사실 저 은행원입니다.”
“은행원?”
“네. 오늘 휴일이라서 밖에 나왔다가 여기까지 온 거고요.”
“은행원이라서 화투를 잘 치는겨?”
“네?”
“은행원이니께 계산같은 걸 잘하겄지. 그러니까 잘 치는 거고.”
“아··· 그건 아닌데요.”
이 애매해진 자리를 벗어나려면 만원씩이라도 깨평을 드려야하나 고민되는 순간.
“어디 살어?”
“저··· 이 골목 주욱 내려가면 화성빌라라고···”
“뭐? 화성빌라?”
그때 대화에 백합 할머니까 끼어드시며 말씀하셨다.
“화성빌라면··· 언니거 아녀?”
“어. 맞어.”
아··· 이 분이 나 월세사는 건물 주인분이셨어?
“저 그 건물 101호 사는데요, 계약할 때 뵙질 못했던 거 같은데요?”
그러자 또 다시 끼어드는 백합 할머니.
“이 언니 건물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계약이야 관리하는 아저씨가 대신 하셨겠지.”
아··· 귀티가 난다했더니 역시 부자셨구나.
은행원 입장에서 돈 많은 고객이란 최우선 영업 대상.
나도 모르게 착하게 말하며 내 앞에 있는 3만원을 그냥 드릴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은행원 총각, 진짜 딱 한 판만 더 하는 거 어뗘? 지금까지 것들 묻고 따블로.”
“따블요? 어떤···”
“이번달 방세.”
“아··· 이달 방세요?”
순간 혹한 나.
하지만, 이런 딜을 넙죽 받을 순 없지.
“겨우 그 정도로···”
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포즈를 취했다.
그랬더니 내 팔을 끌어당기시는 장미 할머니.
“아~ 그럼, 1년치!”
“네?··· 1년치요?”
1년 치면··· 할만 하지.
난 잠시 숙고하는 척 연기를 한 다음 크게 결심한 듯 말했다.
“콜, 좋습니다.”
“그럼 자넨 뭘 걸껴?”
“네?”
아··· 생각하지 못했다.
내기니까 나도 뭘 걸어야 하는구나.
그렇다고 방금 전 하겠다고 한 말을 취소할 수도 없고 말야.
“음··· 글쎄요. 그럼 전 뭘 걸까요?”
“1년 동안 내 건물들 청소.”
“네? 청소요?”
“어. 많이도 아녀. 1주일에 한 번씩만 계단 위주로 하면 되야.”
음··· 할머니 제안 받아? 말아?
내가 질 확률은··· 패가 엉망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거의 지지 않는다고 봐도 되지.
이기면 1년치 주거비가 굳는 세기의 도박.
승률은 내가 앞선다.
“좋습니다. 조건을 받겠습니다.”
“두 말하기 없기야.”
“넵.”
“그리고 말여, 이번 판은 큰 것이 걸렸으니께 장난치지 말고 진심으로다가 해야 할 것이여.”
장미 할머니가 내게 다짐받듯 말씀하시는데, 순간 오싹한 거··· 기분 탓이지?
방금 전까지의 너그럽고 장난스럽던 장미, 백합 할머니가 아니었다.
숨막히는 긴장감이 이곳 평상에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야흐로 꽃의 전쟁 최종전이 시작된 것이다.
– 터억, 터억
백합 할머니가 던져준 화투들을 조심스럽게 쥐어봤는데··· 패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두 할머니들의 패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즉, 나의 승리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는 말이지.
– 탁, 투욱
– 탁, 툽
들고있던 화투를 던지고 쌓여있는 화투를 한 장씩 뒤집어 내려 칠 때마다 탄식과 눈치싸움이 더해졌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막판.
이제 손에 들고 있는 화투패는 각 2장만 남았다.
판세가 나 아니면 장미할머니 둘 중 누가 먼저 이기느냐가 되어 버린 상황.
난 청단 2장을 이미 확보하고 풍 청단 한 장만 먹으면 내가 이기는 반면, 장미할머니는 매조 새 그림만 얻으면 고도리로 이기는···
즉, 청단이냐 고도리냐를 두고 누가 먼저 나머지 한 장을 먹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바로 그때.
“아고··· 먹을끼 없네.”
백합할머니가 매조 중 한 장을 바닥에 던졌다.
아닌데? 할머니 먹을 거 있는데 왜 그걸···
분명 자기가 먹을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미할머니가 매조 새를 가져가 고도리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치사하게.
그렇다고 ‘초 먹을 거 있잖아요? 왜 그거 안내세요?’라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젠장!
하지만, 장미 할머니는 매조가 없으시니까···
만약 매조를 먹으려면 본인 걸 한 장 내고 뒤집었을 때 매조가 나와야 하는데···
흠··· 드디어 장미 할머니가 담요 가운데 쌓여있는 화투패 가장 위의 화투장을 집어 들어올리셨다.
[흑사리.]
장미 할머니의 마음소리가 매조가 아닌 흑사리라 읽었다.
휴우~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번 판도 내 승리···.인데···
헉!
뭐야?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할머니가 뒤집어 담요에 내리친 화투패는··· 매조, 새 그림이 있는 매조였다.
“오홍호호···우짠댜~ 내가 이겼네.”
득의만만한 모습의 두 할머니.
갑자기 하이파이브까지 하신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장미 할머니가 패를 뒤집었을 때 들려온 마음 소리는 새 그림 있는 매조가 아니라 흑사리였다.
그게 어떻게···바뀌어?
“한동안 건물 청소 걱정 안 혀도 되겄어.”
“오홍호호··· 역시 승부는 마지막에 이기는 게 다 이기는겨···”
아··· 젠장! 괜히 한다했어.
그때였다.
“처음 본 어린 아 데리고 뭣들 하는겨?”
멀찍이서 보고 계시던 슈퍼마켓 할아버지가 한 소리 하시며 평상 앞으로 오셨다.
그리곤 쑤욱 장미 할머니의 치맛폭 밑으로 손을 집어 넣으셨다.
“이 영감탱이가 미쳤나. 뭐 하는겨?”
버럭 화를 내시는 장미 할머니.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 안에서 꺼내신 건··· 흑사리 화투장.
길다란 혓바닥 같은 게 붙어있는 흑사리였다.
분명 장미 할머니가 패를 뒤집었을 때 집었던 그 패.
“아니, 이 영감탱이가!”
아··· 그때야 알았다.
이 할머니들 타짜셨다.
화투장을 바꿔치기 하신 것이었어.
그때 날 보며 충고의 말씀을 하시는 할아버지.
“화투는 끝이 슬픈 드라마여. 젊은 친구가 지금부터 알 필요··· 아니 평생 알 필요없어.”
“그래도··· 아는 게 힘이잖아요.”
“아니, 이건 알면 독 되는 거니께.”
분명 아까 이 분 화투를 모르신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할아버진 누구···세요?”
“나? 화투와 몰아일체를 경험했던 사람. 한 때 아귀라고 불렸지.”
“아귀?
‘휘릭’
분명 방금까지 할아버지 손에 있던 흑사리 화투패가 손가락 몇 번의 움직임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치 마술처럼···
“영감탱이가 그~케 안한다고 하두만···”
장미 할머니가 투덜대자 할아버지는 씨익 웃어보이시곤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오우~ 완전 멋있어.
그나저나··· 슈퍼는 누가 봐요?
– 터덜 터덜···
꽃의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결국 어떻게 되었냐고?
건물주 할머니가 1년은 너무하니 6개월 방세 면제를 제시하셨고, 나 역시 오케이 했다.
할머니들에게 들키진 않았어도 나 역시 꼼수를 부린 게 맞으니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엥? 넌 왜 계속 따라오냐?
– 냐옹~
육포 또 달라고 따라오는 거야?
집에 육포 남은 게 있나?
그렇게 의도치 않게 줍냥이가 되어 집 앞에 왔더니 갑자기 냥이가 우리집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런데··· 왜 문이 열려있지?
내가 문을 열고 나갔었나?
그리고··· 넌 왜 여깄어?
“조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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