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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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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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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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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만 멀쩡했어도

DUMMY

대입 학력고사의 출제 난이도는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해서.

올해인 1992년에는 역대급 난이도를 경신하게 된다.

영하 5도를 밑도는 날씨 속에서 할아버지의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저 녀석이 덕현이를 이길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준이는 분명 해낼 수 있을 겁니다."


김성재 실장의 긍정적인 대답에도 장우진 회장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김성재를 쳐다봤다.


"지난번에 태준이가 골드바흐의 추측인지 뭔지를 증명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발표하면, 수학계가 발칵 뒤집힐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거지?"

"그게... 태준이가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

"증명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해보려고, 수학 교사가 몇 차례나 태준이를 설득했지만, 자신이 적었던 증명을 지워버린 뒤, 다시 그것을 풀지 않은 탓에 자료 제출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허."


자신의 손자지만,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아이였다.

게다가 웬만한 이들은 자신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태준은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한 번씩 자신이 기에 눌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확실히 뭔가 특별난 녀석인 것만은 분명했다.


'몸만 멀쩡했어도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


뇌성마비로 불편해 보이는 다리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 한켠이 저려왔다.

다리가 저렇게 된 게 가난한 여자와 도망치듯 결혼한 아들의 배신감에 지난 십수 년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기 탓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대한물산 지분 0.5%가 아깝긴 해도, 태준이 녀석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


사실 그도 이번 대결에서 태준이가 이길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덕현이가 어떤 아이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머리도 좋았지만,

어려서부터 최고의 선생들 밑에서 공부를 해온 탓에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의 아내인 천도희가 처음 내기를 제안했을 때 장우진 회장은 거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아니, 실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처음 만난 친손자를 믿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는 게 두려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물론, 윙크를 비롯해 알 수 없는 기시감도 있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태준은 절대 덕현이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후회는 없었다.

대한물산 지분 0.5%보다는 태준이와 가까워진 지금의 상황이 더 기꺼웠으니까.

······



***



"하하, 어머니 제가 뭐랬습니까. 덕현이가 저를 닮아서 공부 하나는 확실히 타고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덕현이 받아온 대입 학력고사 성적표에 장기석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천도희 또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장덕현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잘하고 왔을 줄은 정말 몰랐구나. 320점 만점에 319점이라니. 어이구 내 새끼 정말 장하다. 장해."

"할머니 자꾸 이러시면, 저 기분 나빠요."

"응? 그게 무슨 말이니?"

"아니 제가 그런 병신한테 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놈이야 공부 안 하고 쳐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고요."

"아이구 이쁜 내 새끼한테 이 할미가 실수를 했나 보구나."


천도희와 장덕현의 대화에 장미진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대한물산 지분을 안 주시진 않겠죠?"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이 할미가 그럴 때를 대비해서 벌써 각서에 공증까지 받아놨단다."

"와... 역시 우리 할머니."


천도희를 비롯한 그 자식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때마침 장우진 회장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를 발견한 장미진이 쪼르르 달려갔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대한물산 지분은 덕현 오빠한테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오늘 성적이 발표됐는데, 덕현 오빠 점수가 무려 319점이래요."

"·····"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결과를 듣는 순간 장우진 회장은 허탈한 마음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왔다.

320점 만점에 319점을 받았으면, 태준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봐도 무방했다.

역대 학력고사에서도 만점이 나온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으니까.


“내일 박 변호사 보낼 테니까. 지분에 관한 약속은 바로 이행하죠.”


천도희의 말에 장우진 회장이 표정을 찌푸렸다.


“아직 체력장이 남아있질 않소?”


이 시기의 대입 학력고사는 총 340점 만점으로 얼마 전에 치렀던 시험에 포함된 점수가 320점이었고,

남은 20점은 체력장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아니... 덕현이 점수를 들었으면서도.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학력고사 점수만 319점인데. 몸도 불편한 애가....”

어떻게 체력장에서 덕현이를 이기냐는 말이었지만,

천도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순간 태준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태준을 향해 천도희가 세상에 둘도 없는 자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준이 왔구나. 성적은 잘 받았니?"

"나쁘지 않게 받았어요."


덤덤한 대답에 장우진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 모두가 조소를 흘렸다.

네까짓 게 잘 받아봐야 절대 덕현이를 이기진 못했을 거라고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덕현 오빠는 319점이라는데. 오빠는 몇 점이야?"


비웃음 짓는 장미진을 한번 쳐다본 뒤,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넣어둔 성적표를 내밀었다.

거기에 적혀있는 숫자를 본 장미진의 눈이 급격히 커지더니, 이내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장미진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천도희가 낚아채듯 성적서를 가져갔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정말이니?"

"대체 점수가 어떻길래 다들 그렇게 놀라는 거야?"

"그게...."


답답함을 느낀 장우진 회장이 천도희의 손에 들린 성적서를 확인했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집이 떠나갈 듯 폭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역시 내 손주답구나. 320점 만점이라니."

"아버지... 우선 성적의 진위부터 확인을 해보시는 게..."


장기석의 말에 폭소를 터트리던 장우진 회장이 웃음을 뚝 멈추고는 그를 향해 호통쳤다.


“네 녀석은 지금 태준이가 성적표를 조작이라도 했다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확실하게 하자는 겁니다. 다른 것도 아닌 대한물산의 지분이 걸려있는 일이잖습니까.”


체력장도 치르지 않고, 당장 변호사를 보내겠다고 말한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장우진 회장은 그 자리에서 곧장 김성재 실장에게 전화해 성적의 진위를 확인해보라고 시켰고,

오래지 않아 이번 학력고사 유일한 만점자가 태준이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 내일 변호사는 몇 시쯤 보내면 되겠소?”


조금 전만 해도 더없이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도희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당신 말대로 아직 체력장이 남았잖아요. 고작 1점 정도는 체력장에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 걸 모르세요.”

“어머니 말이 맞아요. 지분 증여는 체력장까지 확인한 뒤에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천도희와 장기석의 말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불편한 내 왼쪽 다리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저들의 말에 대꾸했다.


“두 분 말씀처럼 지분은 마지막 결과까지 확인한 뒤에 결정하는 걸로 하죠.”

“....괜찮겠느냐?”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된 물음이었다.

“어차피 체력장은 형식적인 거잖아요.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체력장은 90%의 학생들이 19~20점을 받는 사실상 형식적인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은 건강한 일반인들에게나 통용되는 기준이었고, 나 같은 장애인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본인인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니,

할아버지도 더는 뭐라 반대하지 못했다.



***



"교장 선생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그러게... 말일세."


지난 수년간 몇 차례나 체력장을 주관했지만, 청명 고등학교의 교장은 오늘처럼 긴장되는 날은 처음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무려 대한그룹의 두 손자가 자신의 학교에서 체력장을 치르는 것도 모자라서.

대한그룹의 회장과 안주인이 모두 참관했기 때문이다.


"체력장 순서는 어떻게 되나?"

교장의 질문에 학생 주임이 체력장 종목이 적힌 표를 내밀었다.


- 100미터 달리기: 13초

- 던지기: 63미터

- 제자리멀리뛰기: 2.75미터

- 턱걸이: 18개

- 윗몸 일으키기: 1분 63개

- 오래달리기(1,000미터): 3분 53초


"이 중에서 하나라도 참여만 하면, 기본적으로 16점은 받을 수 있지만, 만점을 받기 위해서는 6개 종목 모두 기준치를 만족해야 합니다."

"태준이가 만점을 받긴 힘들겠군."


교장의 말에 학생 주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왕이면, 자기 학교 출신이자.

학력고사 역사상 최초의 만점자인 태준이 체력장에서도 만점을 받기를 원했지만,

대한그룹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몇 차례나 기준대로 운영하라고 압력을 넣은 탓에 따로 특혜를 주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일단... FM대로 진행하겠습니다."

"····"


그렇게 체력장이 시작됐다.


"하하. 어머니 결과는 볼 것도 없다니까요. 태준이는 기본점수인 16점 외에는 아무런 추가 점수도 받지 못할 겁니다."


장기석에 이어 장덕현 또한 승리를 확신했다.


"할머니, 비록 시험은 1점 차이로 제가 졌지만, 저딴 병신쯤은 가볍게 눌러버리고 올 테니까. 마음 편히 계세요."

"그래그래, 이 할미는 너만 믿고 있으마."


웃으며, 덕현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천도희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쉽사리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객관적으로는 아무리 봐도 덕현이가 우세한데도 말이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체력장이 시작됐다.


첫 번째는 100미터 달리기였다.

수험 번호가 빠른 장덕현이 먼저 시험을 치렀고, 그는 만점에서 살짝 못 미치는 14.39초가 나왔다.


그래도 성적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나를 향한 이죽거림은 잊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천천히 걸어갔다 와. 괜히 아픈 다리로 무리하다가 남은 다리마저 못 쓰게 되면, 안되니까 말이야."

"내가 너보다 빨리 뛰면, 어쩌려고 그러냐?"

"푸핫, 네가 나보다 100미터를 더 빨리 뛴다고? 그 다리로?"

장덕현이 기분나쁜 시선으로 내 다리를 쳐다봤다.

"그래도 너 정도는 가뿐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 x소리야. 네가 나보다 빨리 뛰면, 앞으로 내가 형님이라고 부른다."


그저 장난삼아 가볍게 한 도발인데.

녀석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걸려들었다.


"방금 그 말 지키는 게 좋을 거다."


무어라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녀석을 뒤로하고,

나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출발선에 멈춰 섰다.

등 뒤에서 수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학력고사가 실시된 이후, 최초의 만점자였으니 관심을 가지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몸만 멀쩡했어도. 340점 만점을 받는 최초의 수험생이 됐을 텐데. 아쉽게 됐어.”


한성일보 박대기 기자가 안타깝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그런 그의 표정이 의문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출발선에 서 있던 그가 짚고 있던 목발을 옆으로 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저... 저게 대체 무슨....?"


박대기 기자뿐 아니라 멀리서 지켜보던 장우진 회장도 놀랐고,

천도희를 위시한 그 가족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혹감을 금치못했다.


모두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출발 신호가 울렸고,

태준이 엄청난 속도로 운동장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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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원샷을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3 24.08.17 3,528 5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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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고작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3 24.08.15 3,646 51 13쪽
8 네? 특별 사업팀이요? +4 24.08.14 3,908 5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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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출 좀 받으려고요 +7 24.08.12 4,243 61 12쪽
» 몸만 멀쩡했어도 +4 24.08.11 4,275 62 12쪽
4 와, 정말이에요? +6 24.08.10 4,593 71 11쪽
3 이 할애비와 함께가지 않겠느냐? +4 24.08.09 4,793 70 11쪽
2 골드바흐의 추측 +8 24.08.08 5,231 71 9쪽
1 프롤로그 - 내용수정 +7 24.08.07 5,831 74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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