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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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용
작품등록일 :
2024.08.1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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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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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암약하는 당의 세작들

DUMMY

밤 늦은 시각, 이공도의 저택.


사랑채에 흰 도포를 입은 불혹의 이공도가 탁자에 놓인 유오의 밀서를 읽고 있다.


“음, 마침내 유오가 결심하려는 모양이군.”


서찰의 내용으로 보건대 유오는 7할의 결심을 굳힌 듯했다.


······이 공께서는 전세가 불리하니 병사를 보전해 후일을 도모하라고 했는데, 후일이란 사도왕을 대신해 제국을 취하되 황실에 충성하는 군주가 되라는 뜻. 내가 운주성을 치는 사이 만일 전홍정의 군대가 배후에서 나를 들이치면 나의 신변과 후일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이오.

······운주성은 제국의 수도로, 운주성이 패망하면 제국의 다른 주들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오. 그러니 이번 운주성 도모는 황실과 제국의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전쟁이 될 거요. 황실에서 뭔가를 보상해 준다는 약조라도 있다면 모를까, 공연히 섣불리 움직일 수 있겠는가.


‘으음! 결심은 섰으되 약조 없이는 움직이지 않으시겠다? 거사 후 지분 보장을 해달라는 거로군.’


탁자 위에 서찰을 두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이공도는 가벼운 한숨을 섞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약조를 원한다면, 원하는 걸 주어야겠지.”


판관(判官) 이공도는 왕 이사도의 근신이면서, 당 조정 관료들과도 교분이 두터운 한족 출신 문신 관료이다. 그는 제국의 조정에서 행정실무를 맡고 있으면서, 당의 조정 관료들과 오랫동안 외교적 교류를 해 왔다.

당연히 그는 당의 세작부대 운주성 지부의 첫 번째 포섭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운주성 지부의 집중 공작으로 마침내 포섭되어 제국 내 친당 핵심 세력이 되었다.


당시 제국의 문무백관은 무관직은 고구려계와 요동 출신, 안사의난 때 이정기 장군과 함께 했던 무인들의 후손들이, 문관직은 한족 출신들이 많이 출사해 있었다.


제국은 당 황실에 대해 국경은 무신 관료를 내세워 강경하게 대응하는 한편, 조세 상납과 제국 왕의 책봉은 문신 관료를 내세워 외교적으로 대응하는 강온 양면 정책을 펼쳐왔다.


밀군(密軍)은 헌종의 명으로 805년 무원형이 창설한 당의 세작 부대로, 반란 번진들에서 상단이나 표국으로 위장해 암약해 오고 있었다.


운주성의 밀군은 이러한 제국 관료 조직의 권력구조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밀군은 제국의 한족 출신 문신 관료를 대상으로 10년 이상 내간계의 공작을 펼쳐 마침내 제국의 조정 내부에 친당 세력를 구축함으로써 제국 내 내분의 불씨를 지피는 데 성공한 것이다.


81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국과 당의 전쟁을 두고 친당파와 반당파 사이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져 갔다.


818년에 들어 전황은 제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자 12주 중 3개 주를 상납하고 제국의 관료 임용권을 당 황실에 바치자는 친당파가 일시 득세했으나, 곧 그에 반대하는 친고구려계의 20개 가문과 반당파 무신들이 다시 실권을 잡았다.


친당파 핵심 세력인 고목은 죽임을 당했고, 곽호는 감옥에 갇혔다. 이공도의 입지도 매우 좁아들었다.


그러자 이공도는 결심했다. 제국과 이사도를 버리기로.


사방에서 조여오니 제국이 살길은 요원하다, 고구려계는 정세에 대한 안목이 없어 눈앞의 위기를 가볍게 여겨 제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하다가는 멸문지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을 본받아 현명한 토끼처럼 여러 개의 굴을 파 두어야 한다.


이공도는 유오의 서찰을 촛불에 불사른 후, 두 통의 서찰을 작성했다.


한 통은 위박절도사 전홍정에게, 다른 한 통은 제국군 북부 진영 대총관 유오에게.


이공도는 작성한 서찰을 봉투에 넣고 밀납(蜜蠟) 조각을 촛불에 가열하여 만든 밀납 액을 봉투의 봉합 부위에 떨구었다. 밀랍 액이 굳기 사직할 때 봉인 인장(印章)을 밀랍 위에 눌러 문양을 새겼다.


이공도는 꼼꼼히 밀봉 작업을 끝낸 후, 밀봉 상태와 문양의 모양을 확인하고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만하면······.”


그 후에도 이공도의 사랑채는 늦은 시각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



야심한 밤 전신에 흑색 도포를 걸친 흑의인이 이공도의 저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저택의 대문은 놔두고 달빛을 피해 가며 담장을 따라 움직이며 저택의 뒤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사랑채가 있는 내원의 높은 담장에 도착하자, 그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담장 위로 몸을 날려 내원의 정원에 가벼운 나뭇잎 내려앉듯 착지했다.


탁.


묘영경공(猫影輕功)의 경신술을 구사하며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민첩하게 내원에 잠입한 흑의인은 정원의 큰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밝으며 발소리를 죽인 채 불이 켜진 사랑채로 은밀히 접근했다.


샤샤샥-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불 켜진 방문 앞에 다다르자,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안에서 초조함이 묻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어서 들라.”


방으로 들어온 흑의인은 복면이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은 그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대인, 인사 올립니다. 긴급하게 대인을 찾아뵈라는 단주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예상보다 지체되었구나.”


“야간 기찰(譏察)이 심해 통금을 뚫고 오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생 많았다. 내게 신분을 검증해 보이거라.”


“예, 대인.”


흑의인은 가슴 품에서 가로세로 두 치(寸)의 은색 사각패를 꺼내 보였다. 패의 표면에는 열 개의 원이 있었는데, 그중 여섯 개의 원에 모란꽃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백화단패. 백화상단(百花商壇)의 인물임을 알려주는 패.

백화상단은 806년부터 상단으로 위장해 제국의 운주성에서 활동해 온 당나라 세작부대 밀군의 운주성 지부다.


단패를 확인한 이공도는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육모단(六牡丹)의 지위라면, 자네의 직급은 총관이 아닌가? 어찌 총관급이 움직였느냐.”


“예, 대인. 저는 호위총관입니다. 단주께서는 이번 일이 중대하다며 제가 직접 실행하라 명하셨습니다.”


“자네는 이번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단주께서는 대인을 만나면 알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


“서찰을 전달하는 일이네.”


“밀서입니까?”


“그렇네, 역시 단주의 식견은 대단하군. 자네 같은 총관급을 보내다니, 이번 일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음이야. 여기 성문 출입 통행증과 서찰이 있네. 먼저 이 서찰을 황하 이북에 군영을 세우고 있는 위박절도사 전홍정 장군에게 전달하게.”


이공도는 탁자 위에 전홍정에게 보낼 서찰과 통행증을 먼저 흑의인에게 건넸다. 그런 다음 또 다른 서찰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 서찰은 돌아오는 길에 양곡의 유오 대총관에게 전달하게.”


흑의인이 조심스럽게 서찰을 가슴에 갈무리하고 나자, 이공도는 그에게 다시 당부했다. 이공도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고 엄중하네! 황실의 권위가 살고, 번진 할거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느냐 마느냐는 이 서찰 두 통에 달려있네.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네.”


“예, 대인. 소인의 신명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시간이 없네. 여기서 황하 이북의 전홍정 장군의 군영까지는 300리, 그곳에 들렀다가 다시 유오 장군의 군영까지 가려면.”


“상단의 역참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전시 중이라 상단마다 역참 상황은 어렵다고 들었는데?”


“백화상단에서 손을 써 두었습니다.”


“역참을 이용해 말을 갈아탄다 해도 내일 저녁이나 도착할 걸세. 새벽 통금이 해제되는 대로 서둘러 출발하게.”



*****



이공도의 저택을 나온 흑의인은 몸을 날려 달빛이 만들어 내는 사물의 그림자를 밟으며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성내촌락(城內村落)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운주성 성벽 근처의 황량한 숲속. 버려진 사당 한 채가 쓰러질 듯 서 있다.


이공도의 저택을 나온 흑의인은 야경병(夜警兵)의 순찰길을 이리저리 피해 마을의 여러 골목을 휘돌더니 마침내 숲으로 접어들어 익숙한 듯 사당 안으로 쑥 들어갔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판자 사이로 사방에서 달빛이 새어들어 낡은 대전 안을 군데군데 비추고 있었다.


흑의인은 대전 맨 안쪽까지 곧장 걸어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포권(破拳)의 자세를 취하며 인사했다.


“호위 총관 백가운이 단주를 뵙습니다.”


어둠 속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하거라.”


“이 공이 요청한 것은 두 통의 밀서 전달로, 위박군의 전장군과 유오 장군에게 전해 달란 것입니다.”


“음, 서로 칼을 겨눈 두 장군에게 동시에 밀서를?”


이 공은 어제 급히 내게 기별을 넣어 무술이 높은 자를 찾았다. 이번 밀서에는 어쩌면 전쟁을 판가름 지을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백화상단이 이공도를 포섭하는 데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마침내 그는 상단이 원하는 대로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 같구나.


“백 총관, 성 안팎으로 기찰병들의 경계가 심하고, 통행증을 구하기도 난망하니 자네에게 호위무사를 붙일 수도 없다.”


“예, 단주.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백화상단의 단주는 소맷자락에서 지필묵을 꺼내더니 흰 백지에 다섯 글자를 휘갈긴 후, 그 곁에 단주패를 꺼내 인장을 찍었다.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처럼 구름 위에 피어난 커다란 모란꽃 문양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팔검귀살단(八劍鬼殺團).


밀군이 강호 무림에서 채용한 여덟 명의 최정예 살수 집단.


그들의 검술은 귀신도 처치할 만큼 강력하고 신묘해 밀군 내부에서는 그들을 팔검귀살단이라 불렀다.


밀군의 수뇌부가 팔검귀살단에게 내리는 암살 명령은 반란 지역의 장수나 귀족이 대상이었지만, 때로는 당파싸움에 휩싸인 당 조정의 관료도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팔검귀살단은 운주성 내로 투입 명령이 내려오길 기다리면서 친황실 영역인 서주에 머물고 있었다.


글자가 쓰인 종이를 받아 든 백가운은 놀라 소리쳤다.


“아니! 단주, 팔검귀살들을 운주성으로 불러들이시는 겁니까?”


“이제 때가 되었다. 은밀히 이곳으로 불러들여 백화상단의 안가(安家)에 대기시켜 놓아야겠다. 자네는 이공도 공의 서찰을 전달 후, 나의 서찰을 서주의 밀군 지부에 전달해 이들을 급파하도록 요청하라.”


“내가 무예가 뛰어난 자네를 특별히 선발한 것은 백화상단 10년 사업의 성패가 이번 일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임무의 성패를 자네의 목숨과 바꾸어야 할 것이야.”


“예, 단주!”


“살아서 돌아오라!”


짧은 말을 뒤로하고 사당을 빠져나온 흑의 신형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백가운은 그 뒤에도 사당에 남아있다가 동이 트자 사당을 나와 백화상단이 운영하는 객점(客店)에 들렸다. 그리고 백화단패를 보여주고 요기를 한 후 말을 구해 성문을 나섰다.


백가운이 위박번진 총사령관 전홍정의 군막을 다녀간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그의 방문 이후 전홍정의 부관 이정은 어둠이 내리자 한 자루의 검만 든 채 흑무복(黑武服) 차림으로 은밀히 군영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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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군영의 살육 24.08.17 18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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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반의 협력자들 24.08.14 20 1 11쪽
4 밀담 24.08.13 21 1 11쪽
» 제국에 암약하는 당의 세작들 24.08.12 28 1 11쪽
2 셈법을 끝낸 유오, 모반의 결심을 세우다 24.08.11 33 1 11쪽
1 전란의 시대, 이납이 산동성에 제국을 건국하다 24.08.10 57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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