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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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용
작품등록일 :
2024.08.1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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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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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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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강의

DUMMY

35년의 교단을 마감하는 이정기 교수의 고별 강의.

이 강의에서 정기는 평양성이 함락되던 그날 하루의 사정과, 패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삶을 학생들에게 재조명해 주고 싶었다.


강의실로 걸어가는 동안 강의 내용을 곱씹다 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웅대한 제국의 갑작스러운 패망 때문인지, 나라 잃고 뿔뿔이 흩어진 유민들에게 감정이 이입된 때문인지, 마지막 강의였기 때문인지···.


강의실 입구에 도착해 잠시 멈추어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큰 숨을 한 번 쉬고는 문의 손잡이를 훅 당겨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한국대학교 인문학동 대형 계단강의실. 좌석을 빽빽이 채우고 앉은 학생들의 눈이 일시에 정기에게로 쏠렸다.

강의실 앞 열에는 사학과 동료 교수들도 참석해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들려오던 소소한 소란이나 잡담 소리마저 없이 조용하고 차분했다. 조금 긴장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이 분위기 뭐지. 이번 강의가 내 고별강의라서인가! 아니면 오늘 강의 주제의 무게 때문인가.’


정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 해왔던 대로 교탁 위로 올라가 학생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며 가볍게 손 인사를 했다. 그리고 컴퓨터로 가서 오늘 강의자료를 탑재하고 무선마이크를 가슴 옷깃에 부착한 후 교탁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 학기 15주 동안 고구려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 현대 정치와 한반도 영토에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해 강의를 해왔어요. 오늘 강의 내용은 강의 스케줄에 고지 되어있는 것과 같이 평양성 함락 과정과 그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만들어 낸 또 다른 고구려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패망한 국가의 기록이라 사서에는 많은 내용이 사라졌거나 왜곡된 채 기록되어 있고, 패망 후 고구려 유민들이 이루어 놓은 중국 내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서는 현재 진행형으로 왜곡되거나 중국화 되고 있어요. 따라서 이번 수업은 더욱 집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파워포인터의 리모콘 버턴을 누르자 강의실 전면을 가득 채운 하얀 스크린 위에 검은 글자들이 만들어 낸 문장들이 드러났다.


[668년 요동 천하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

[요하강 동쪽을 지배하던 강력한 대제국 고구려가 멸망했다.]


[풍운의 동북아시아.]

[수천년 동안 요하강(지금의 랴오허강) 1천 4백 킬로를 경계로 동쪽의 고구려는 서쪽의 중화 세력과 동과 서로 천하 강역을 양분하며 세력의 균형을 이루어왔다.]


[당금 요동의 가장 큰 나라 고구려.]

[말갈, 실위, 거란 등 숱한 군소 세력을 흡수하면서 요동 평원의 대제국으로 세력을 확장해 왔던 고구려. 그 수도 평양성이 688년 9월 당나라의 침입으로 어이없게 함락당했다.]


곧이어 다음 스크린에는 온통 검은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인 고립무원의 평양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기를 높이 세운 80세 노장 이세적의 50만 병사들로 겹겹이 포위된 채 공격받고 있는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여러분, 이 슬라이드는 고구려 패망의 날을 사실감 있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CG 사진입니다. 고립무원으로 항전하고 있는 함락 직전 평양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정기는 학생들이 사진을 보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잠시 준 후 슬라이드를 넘겼다. 평양성의 도면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스크린에 투사된 평양성의 구조와 역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평양성은 백성들의 거주지인 외성, 행정관청과 귀족들의 가옥이 밀집해 있는 중성, 왕궁이 있는 내성, 그리고 내성의 북쪽에 위치해 내성을 방어하는 북성 등 모두 4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나당 침략군은 왕궁과 귀족이 거주하는 내성과 중성을 집중적으로 공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기는 먼저 면적 12㎢, 성의 외곽 둘레 17㎞ 규모인 평양성의 내부 구조를 설명한 다음 성 주변의 강줄기와 산줄기들을 따라가며 지리 지형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7가지 계책에는 기후와 지리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럼 평양성 주변의 지형지물을 살펴볼까요!”


정기가 설명하기도 전에 그림만 보고도 이 천혜의 요새에 대해 학생들은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빔포인터의 붉은 정기의 손놀림에 따라 점은 항아리 모양의 평양성에서 맨 위에 위치한 북성을 찍은 후 성의 동에서 남쪽을 휘둘러 흘러 내려가는 대동강을 따라가다 다시 성의 서쪽을 길게 감싸고 흐르는 보통강으로 옮겨갔다.


“평양성의 북쪽에 있는 북성에는 금수산의 험준한 모란봉이 있고, 그 아래에 위치한 내성, 중성, 외성은 보통강과 대동강이라는 자연 해자가 빙 둘러 흐르고 있는 천혜의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이로 인해 공성 무기가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을 테니, 이세적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정거리가 300보로 개량된 포차의 투석 공격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성벽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당나라의 포차는 1차 고당 전쟁에서는 요동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평양성의 성벽은 포차의 투석 공격에도 견고하게 견뎌냈던 걸로 보여요. 성벽의 안과 바깥 모두 돌로 축조되어 있고, 쐐기돌이 육합으로 쌓아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포차에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천혜의 요새이자 난공불락인 평양성은 수십만 나당 침략군의 공성에도 불구하고 버텨내고 있었지만, 평양성 외부의 방어선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정기는 평양성 외곽 전황을 설명하는 함축적인 문장 하나를 스크린 위에 띄웠다.


[연정토의 신라 투항으로 남방 방어선이 붕괴되자 20만 신라병의 북진은 거침이 없었고, 서북 전략 요충지인 요하의 신성과 압록강 방어 요충지인 부여성의 함락으로 북방의 요하와 압록강 방어선이 모두 붕괴되어 평양성은 구원병을 기다릴 수 없는 고립무원의 외로운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곧이어 고구려의 외곽 방어선을 뚫고 평양성으로 집결하는 신라군의 북진 경로와 당군의 남진 경로를 표시하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화살표들이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정기는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빔포인터로 짚어가며 김인문의 신라군과 이세적, 계필하륵이 이끄는 당군의 침입 경로를 구분해 설명했다.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 삼 형제의 내분이 일어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666년 12월에 휘하의 총관 24명과 12성 7백 30호, 3천 5백여 명의 주민을 데리고 신라에 귀순해 버렸고(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북상하는 신라군이 평양성 북쪽의 당군과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연남건이 보낸 고구려군은 668년 7월 16일 평양성 동쪽 근교의 사천벌에서 문영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대패하는 등 열세를 면치 못했어요.”


평양성 남쪽 전황에 대한 설명을 노트에 필기하거나 노트북에 타이핑하고 있는 학생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생수병을 들이키며 잠시 기다린 후, 평양성 북쪽의 전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려는 순간, 한 학생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지난번 강의 시간에도 질문을 한 적이 있어 이름을 기억하는 학생이었다.


“인겸이 질문이 뭘까?”


“교수님, 고구려가 신라의 북진을 막기 위해 치른 크고 작은 전쟁 중 특히 사천 평원 전투가 주목받고 있는데, 이 전투가 전쟁에서 특별히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좋은 질문인데···, 누군가 그 질문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어요. 여러분! 인겸이가 사천벌 전투의 전쟁사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했어요. 평양성의 함락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짚어낸 질문이죠.”


강의실에는 마이크가 교단에만 있어 멀리 앉은 학생들을 위해 인겸은 질문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7월 16일 사천벌 전투의 패배는 고구려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고구려군은 신라군 본대가 당군과 합류하는 막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이후 합류한 두 국가의 군대가 연합해 공성전을 펼침으로써 결국 9월 21일 평양성은 함락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죠.”


다른 몇몇 학생이 고개를 끄떡이는 모습을 보면서 정기는 북방에서 펼쳐진 고구려군과 당나라군의 전황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자, 이번에는 평양성의 북방 전황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고구려 북방에서는 667년 9월 서북 방면 전략 요충지인 신성이 이세적에게 함락되자 그 주변 16개 성이 잇따라 항복했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연남건이 보낸 고구려군은 설인귀의 측면 기습 공격으로 5만이 죽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668년 2월에는 압록강 방어 요충지인 부여성이 함락되었고, 인근 40여 개 성도 항복했는데, 이를 구원하러 떠난 고구려 5만 군사가 설하수 전투에서 이세적에게 대패하여 그 중 3만이 죽었어요(삼국사기 권 제22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뒤이어 대행성마저 뺏기고, 압록강에 목책을 세우고 강하게 저항하던 고구려군이 돌파당했어요. 고구려 정예군은 거의 소멸되었고, 요하와 압록강 방어선이 대부분 붕괴되어 버린 셈이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 달이 넘는 포위 공격에도 버텨내던 평양성 성내에서도 친당파 귀족 중심으로 항복 여론이 득세하기 시작했어요.”


정기는 천천히 강의실을 빙 둘러 학생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강의가 중간쯤 지날 때면 떨어지는 고개를 붙잡느라 용을 쓴다든지, 하품을 한다든지, 고개는 빳빳이 든 채 눈은 게슴츠레 뜨고 졸음을 참는 학생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게 마련인데··· 학생들은 수업을 깊게 경청하고 있었고 얼굴은 진지하고 우울했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모처럼 민족의식이 발동해서인가,

1300년 전 잃어버린 만주 고토에 대한 역사적 회한 때문인가!

요즘 젊은이들도 내가 젊었을 때 느꼈던 고구려에 대한 짙은 향수와 패망에 대한 회한이 있을까?


학생들의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눈빛도 그렇고, 앉은 자세도 그렇고··· 교양 수업이라 수강생 대부분은 사학과 학생들이 아니지만, 이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만은 자신의 역사를 도둑맞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혹시 이전 세대가 도둑맞은 역사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여러분! 잠시 옛날로 돌아가 함락 당시 평양성의 내부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성벽에서는 군사와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배후에는 배신자 연남생 일파를 동원한 이세적의 끊임없는 귀족들 간 이간계와 항복 회유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친당 세력에게 설득당한 보장왕은 결국 9월 21일 연남산에게 98명의 수령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성 밖으로 나가 이세적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게 했지만, 당시의 대막리지 연남건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끝까지 항전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말을 마친 정기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그러자 평양성이 함락되는 그 날의 전투 장면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의 원문들이 하나씩 스크린 위로 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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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셈법을 끝낸 유오, 모반의 결심을 세우다 24.08.11 3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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