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대체역사, 무협

새글

비천용
작품등록일 :
2024.08.10 22:32
최근연재일 :
2024.09.20 22:12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282
추천수 :
14
글자수 :
77,351

작성
24.09.20 22:12
조회
3
추천
1
글자
14쪽

제나라, 고구려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DUMMY

[평양성 성문이 열리는 날의 기록]


[668년 9월 21일 신라군이 이세적의 당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포위하자 고구려왕 고장은 연개소문의 3남 연남산을 먼저 보내 이세적에게 항복을 청하게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0대왕 문무왕 상]


[남건은 군사의 일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와 요묘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닷새가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 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 하 27년]


[영공(이세적)이 신라의 정예 기병 5백 명을 선발하여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하 11년. 답설인귀서]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성문은 너무 황당하게 열려 버렸어요. 연남건의 최측근으로 군사의 일을 책임지고 있던 승려 신성이 당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라 정예 기병을 필두로 나당 침략군이 물밀듯 성내로 짓쳐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수십만 대군의 공격에도 한 달 이상 버텨냈는데, 너무 허무한 함락이죠. 성문이 열리자 평양성 군주 술탈이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 군대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등 성내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연남건은 끝까지 저항하다 자결을 시도했으나,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처구니없게 성문이 열리는 상황을 말하다 보니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해 정기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제기랄 우리 고대사 강의는 할 만한 일이 아니군. 공부하면서도 화나고, 공부한 것을 설명하면서도 화나는 그야말로 분노조절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일인 걸!’


정기는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고구려 패망에 대한 분노와 회한의 감정을 학생들도 함께 공감하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강의실을 쭉 둘러본 후, 평양성 함락의 마무리 멘트를 했다.


“수·당 2개 왕조 70여 년에 걸친 집요한 요동 공략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던 강력한 대제국 고구려는 내분과 배신자, 국제정세의 무지로 인한 고립 등으로 종국에는 멸망했어요. 기원전 37년 고주몽이 졸본 땅에 고구려를 세운 이래 실로 705년 만의 일이지요. 지금까지 평양성 함락이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질문 있을까요?”


사학과에 재학 중인 수연이 손을 들었다.

“수연이 무슨 질문인가?”


“교수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9월 21일에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포위하자 보장왕이 항복했다고 되어있는데, 포위당한 당일 바로 항복한 것인지, 아니면 며칠 후에 한 것인지가 분명치 않은 것 같아요.”


“음······.”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보장왕이 연남산을 통해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지만, 실질적인 최고 실권자이자 대막리지인 연남건은 항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평양성 문이 열린 날 즉 평양성이 정복된 날을 패망한 날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서에는 평양성 문이 열린 날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다만 신성이 내통한 날로부터 닷새 후 성문이 열렸다고만 되어있어요. 하지만 신성이 내통한 날의 기록이 없어 성문이 열린 날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사학과 학생답게, 깊이 있게 분석했네.”


정기는 질문이 마음에 들어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띄웠다.


“평양성 함락 날짜에 대해 나도 수연이와 같은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어요. 중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종본기에는 9월 12일, 구당서 동이열전에는 11월, 고구려본기에는 날짜 없이 단지 9월, 신라본기는 9월 21일로 사서들도 제각각 다르게 기술되어 있어요. 아마 그때는 정보망이 발달되어 있지 않고, 국가별, 사가별 역사기술의 시차가 크기 때문에 이러한 오차가 있었던 것 같아요. 평양성이 함락된 날을 패망일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정기는 스크린 위의 평양성 함락에 관한 삼국사기의 원문들을 빔 포인트로 짚어가며 답변을 이어갔다.


“보장왕이 항복한 9월 21일 이후에도 성은 건재했으니 패망일은 그 이후일 것으로 추론할 수 있겠지요? 만약 9월 21일에 보장왕이 연남산과 98인의 수령들을 이세적에게 보내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면, 아마 그 무리 속에 신성의 수하 장수인 오사와 요묘가 섞여 있을 수도 있을 테니··· 그러면 내통한 날은 9월 21일이 되고, 내통 5일 이후 문이 열렸다고 되어있으니 9월 26일 평양성 문이 열렸다고 추론할 수 있겠지요. 내 답변은 여기까진데··· 수연이가 사학도답게 이번 방학에 사서들을 파헤쳐 보는 건 어떨까?”


정기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정기는 이번 학기 들어 질문한 적이 없는 것 같은 학생 한 명을 손으로 가리켰다. 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라 질문을 한 적이 없으면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안한데 이름이 뭐지? 전공은?”


“국문과 김중효입니다”


“아, 중효 학생, 무슨 질문인가요?”


“과거 수당전쟁에서 기후는 고구려 편이었습니다. 특히 북방의 겨울은 수당 군의 최대 적이었는데, 이번 3차 고당 전쟁에서는 이세적이 667년 2월에 신성을 공격해 9월에 정복했고, 설인귀가 668년 2월에 부여성을 정복하는 등 매서운 겨울에도 당군은 보급과 주거에 어려움 없이 전투를 치렀습니다. 당군의 겨울 전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 궁금합니다.”


“예리한 질문이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연남생 때문인데, 국내성을 거점으로 평양성의 연남건과 대립하던 연남생은 결국 9개 성과 약 10만 호에 달하는 성민들을 당나라에 바쳤는데, 당군은 연남생이 갖다 바친 성들로부터 군량미와 전쟁물자를 조달받아 겨울 뿐만 아니라 2년에 걸친 장기적인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나중에 연남생은 3000호를 받아 호의호식하면 편안하게 장수를 누렸어요”


답변을 끝내자 다시 서너 명의 학생들이 손드는 것을 슬쩍 외면한 채 정기는 스크린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 계속 질문만 받으면 강의를 이어갈 수가 없으니, 다음 질문들은 내 개인 메일로 보내주면 답변을 드리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 봅시다. 두 번째 주제는 패망 후 고구려에서 벌어진 일들과 유민들의 이주 역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


정기는 고구려 패망 이후의 연대표를 스크린에 띄우자 688년 고구려 패망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이 시간 순서대로 하나씩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668년 12월. 안동도호부 설치(676년 고구려 유민의 저항으로 요동의 여러 지역으로(요성, 신성, 유주, 평주)으로 쫓겨남. 고구려 지역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여 통치.

669년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

669년 4월. 3만 8,300호가 당나라 강회의 남쪽, 산남, 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됨.

670년 4월. 검모잠이 왕의 외손 안순을 임금으로 세우고 나라를 일으켰으나 당 장군 고간에게 패하고,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귀순

671년 7월. 안시성이 당 장군 고간에게 함락됨.

672년 12월. 빅뱅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당 장군 고간에게 패하고 그 이후 고구려-신라 연합군이 다시 고간에게 패함.

673년 윤5월. 호로하에서 고구려 군사가 당 장군 이근행에게 패해 수천이 잡히고 남은 군사는 신라로 도주.

677년 2월. 보장왕은 조선왕으로 봉해져 내지의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요동 도독으로 부임한 후 비밀리에 말갈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681년 공주(邛州)로 유배되어 682년 초에 사망.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하남, 농우의 여러 주로 다시 분산 이주되었고,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 성에 그대로 머무르게 했으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감.

699년. 안동 도독에 임명된 보장왕의 3남 고덕무가 699년 소고구려를 건국했으나 820년 발해에 병합.

765년 7월. 고구려 유민 이정기 산둥성 일대 15주를 통치함.

782년. 11월.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12주를 기반으로 운주를 수도로 제나라를 건국함.

819년 2월. 이사도왕 때 제나라 패망.]


발생 순서대로 하나씩 스크린에 차례대로 나타나던 사건들이 788년 당나라 산둥성을 기반으로 건설되었던 제나라의 패망을 끝으로 멈추었다.


정기는 목소리에 힘을 넣고 조금 비장한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강의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군요. 나는 오늘 강의를 패망 이후 고구려 유민이 만들어 낸 당나라 속, 아니 중국 속 고구려 역사로 마무리하려고 해요. 화면에 제시된 연대표처럼 사서에는 699년에 대략 3만8천 호가 강제로 이주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가구당 4-5명으로 계산했을 때 대략 16-20만 명이 끌려갔다고 정도로 추측할 수 있겠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때 끌려간 유민이 20여만 명으로 기록되어 있어요(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상). 677년에도 대규모 강제 이주가 있었지만, 그 규모는 확인할 길이 없어요.”


정기가 마지막 강의 슬라이드를 띄우자, 스크린 가득 요녕성 조양시의 지도가 펼쳐졌다.


“지도 위에 빨간 원으로 표시된 지역은 요하의 서쪽 요녕성 조양시인데, 당나라 때는 영주라고 불렸어요. 이 지역은 거란, 실위, 말갈, 해족 등과 접하고 있고, 요동에서 유주, 태원 등 당나라 내륙으로 들어가기 길목이라, 지정학적으로 군사 요충지였고, 상업이 활발했어요. 여러 부족의 이민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다민족이 섞여 사는 국제도시였어요. 요동의 고구려인들도 이곳에 많이 이주해 왔고, 중국 내륙으로 끌려가는 유민들도 이 영주를 거쳐 갔어요.”


길어지는 강의에 그는 학생들을 한번 돌아본 후 말을 이어갔다.


“강남, 산남과 같은 중국 남부 내륙 깊숙이 끌려간 유민들은 묘족을 형성해 현재까지도 고구려 역사를 이어오고 있고, 산둥반도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은 이정기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천하를 도모해, 이정기, 이납, 이사고, 이사도로 이어지는 4대 55년에 걸친 강력한 고구려인의 나라, 제나라 왕국을 건설했어요. 제왕국의 역사는 중국 사관과 식민사관에 묻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구당서 신당서 같은 중국 사서에도 자치주로 폄하되어 있어요.”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었고, 강의의 클라이맥스였다.


”고구려의 역사는 요동에서는 발해를 통해 이어지고 있었지만, 당나라 내륙에서는 이정기와 그의 세력을 통해 그 국가의 이름만 달리한 채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벽시계는 어느새 강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교단에 선지 30년. 정기의 마지막 강의가 끝났다. 그가 가장 아꼈고 열정을 쏟아부었던 강좌였다. 그는 한국대학에 부임하자마자, 매학기마다 「격동의 한반도, 고대 한민족의 이산과 그 역사가 남긴 흔적들」이란 강좌 시리즈를 개설했다. 학기로 치면 60회 개최된 셈이다. 심지어 그가 연구년이었을 때도, 강사를 초청해 이 강좌는 계속 유지했었다. 이번 학기는 그 종결로서 1,300여 년 전 고구려 패망 후 유민의 이주 역사였다.


다시 학생들의 질문 시간이었다.


“내 역사 강의는 이 고별수업을 끝으로 종강하고, 마지막 질문 받겠습니다”


마지막 강의여서인지 여기저기 질문들이 쏟아졌다.


“교수님, 유민들의 이주 루트는 영주 루트 외에 또 다른 루트는 없었나요?”


“전쟁포로로 잡힌 고구려 병사와 강제로 끌려간 유민은 다른 의미인가요? 포로와 유민은 당에 끌려가서 다른 대우를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강제 이주 대상으로 선정되었는지요?”


“당나라는 왜, 유민들을 가족 단위로 이주시켰는지 궁금합니다.”


“고구려 유민의 이주가 패망 고구려와 우리 민족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

·

간략하게라도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한 후, 정기는 학생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여러분, 이 수업을 통해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알고 나니 많은 아쉬움이 남지요?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숨기고 왜곡시킬 수는 있어요. 찬란했던 한민족 고대사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 세우는 숙제를 제 세대에서 채 마치지 못하고 강단을 떠나게 되었네요. 이제는 여러분 세대로 이 과업을 바통 터치하고자 합니다. 미안합니다. 부탁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강의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대형강의실은 빼곡히 차 있었다. 낯익은 학생들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그는 학생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정기는 강의실에 들어올 때처럼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왔다. 그때 등 쪽에서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교수님, 퇴직하신 이후에는···?”


뒤돌아보니 강의 시간에 질문했던 인겸이 어느새 뒤에 달려와 서 있었다.


정기는 손바닥으로 인겸의 어깨를 토닥인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나라, 대륙 땅 아래 묻혀버린 제나라 역사를 파헤쳐 볼 생각이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제국의 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제나라, 고구려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NEW 6시간 전 4 1 14쪽
13 고별강의 24.09.19 10 1 11쪽
12 운주성 최후의 날 24.09.18 11 1 14쪽
11 당의 세작부대 팔검귀살단을 주살하다 24.08.26 20 1 12쪽
10 유오의 모반을 감지하다 24.08.23 17 1 13쪽
9 홍방과 천무오검 24.08.21 14 1 12쪽
8 운주성 성문이 열리다 24.08.19 16 1 13쪽
7 군영의 살육 24.08.17 18 1 13쪽
6 달밤의 검투 24.08.16 15 1 12쪽
5 모반의 협력자들 24.08.14 20 1 11쪽
4 밀담 24.08.13 21 1 11쪽
3 제국에 암약하는 당의 세작들 24.08.12 27 1 11쪽
2 셈법을 끝낸 유오, 모반의 결심을 세우다 24.08.11 33 1 11쪽
1 전란의 시대, 이납이 산동성에 제국을 건국하다 24.08.10 57 1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