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걸음으로
“......”
뚜껑이 젖혀진 편의점 사발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후룩-
태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발면을 한 젓가락 오물거리던 윤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연기 장면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너도 모르게 연기를 해버렸다는 말이지?”
태훈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궁색한 변명이라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에 떠오르는 핑계가 이것뿐인데.
“그게... 내가 요즈음 연기 연습에 빠져 있어서... 하하. 미안. 내가 가끔 뭐에 빠지면 주변을 신경 못 쓰고 그래. 하, 나 완전 이상했지?”
회귀라는 혼란은 잠시였고, 적응은 빨랐다. 변명이 술술 나왔다.
말도 안 되는 변명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대책 없이 착했던 윤아라면 어떻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
윤아가 그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태훈을 바라보았다. 태훈은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윤아라도 이따위 변명을 믿기는 무리...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응?
“얼마나 몰입을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와...”
믿는다고 이걸?
“진짜, 나 아까 순간적으로 나하고 너 사이에 뭐가 있었나? 내가 까먹었나? 했다니까. 어쩜 그래? 너 진짜 천재인가 봐. 연기 쪽으로 진로 준비하는 거야? 나도 사실...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진짜 대단하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참으로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윤아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훈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래. 윤아는 이런 아이였지.
밝고, 따뜻하고, 눈물 많고, 사람 잘 믿고.
태훈이 자기도 모르게 들릴 듯 말 듯 읊조렸다.
“다행이다.”
사고 이후, 오랜 세월 보아왔던 윤아의 얼굴은, 얼굴에 입은 화상보다 더 깊은 그늘이 드리웠던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윤아는.
태훈의 기억 그대로, 환한 빛을 간직한 열일곱 살 윤아의 모습은. 그러니까.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응? 지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후루룩-
태훈이 컵라면을 한 젓가락 가득 입 안에 넣고는 편의점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옛 동네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따뜻하고, 또 따뜻했던 그해 겨울의 풍경.
잠잠히 미소가 떠오르는 태훈을 바라보며, 윤아가 빙긋 웃고는.
후룩-
컵라면을 오물거리며 태훈의 시선이 머무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거칠게 열어젖혀진 편의점 문에서 울리는 도어벨 소리였다.
땡그랑─
한 소년이 성큼성큼 편의점 안으로 걸어들어와서는 곧 태훈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어? 야, 성태훈 너 뭐냐?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태훈의 시선이 소년을 향했다. 기억 저 너머에 있던 오래된 추억이 소환되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 이름이.
‘이동진이었나.’
20년을 넘게 잊고 지내던 인물이었는데, 이름이 떠오르는 게 신기했다. 아무튼 녀석은 같이 보컬 댄스 학원에 다니던 친구였는데.
반반한 외모에 그럭저럭한 실력, 그리고 외모와 실력에 비해 넘치는 허세. 뭐 그런 부류의 녀석인지라, 딱히 좋은 친구는 아니었고, 오래 사귄 친구도 아니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꽤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좋게 봐줘도 호감형은 아니건만, 녀석을 잠시나마 좋은 친구로 생각했던 건 태훈의 성격 탓이 컸다.
‘이때는 참, 나도 대책 없이 밝았지.’
청소년 시절의 태훈은 뭐랄까 조금은 단순하고, 무한 긍정 마인드를 가진, 조금은 어린아이 같았다고 할까, 머리가 꽃밭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그런 성격이었다.
그래서 친구 엄청 좋아하고, 악당이 아니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서로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아는.
‘아니, 대책이 없는 건 오히려 지금인가.’
산전수전 다 겪고 닳고 닳아져서 세상에 대한 냉소가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는, 그래서 그게 뭐든 세상에서 딱히 무서운 게 없는 지금.
어쨌든 썩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친구도 아니 건만, 꿈에 그리던 과거로 돌아온 탓인지, 이런 녀석의 얼굴마저 반가웠다.
“아, 미안. 친구하고 얘기하느라 폰 울리는 줄도 몰랐네.”
“친구?”
그제야 태훈의 뒤쪽에 가려져 있던 윤아를 발견한 이동진이 순간 흠칫했다.
“어, 이쪽은? 큼...”
이동진의 눈이 휘둥그레지는가 싶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윤아를 향해 제 딴에는 멋짐이라는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나는 여기 태훈이 친구고. 이동진. 혹시 여자 친구?”
태훈과 윤아를 번갈아 보는 동진의 시선에 윤아가 손사래를 쳤다.
“아냐. 무슨.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같은 초등학교 친구.”
“아, 그래?”
동진의 미소가 짙어졌고, 그런 동진을 바라보는 태훈의 입가엔 헛웃음이 흘렸다.
‘넘치는 게 허세만은 아니었지.’
허세보다 더 넘치는 건 연애 욕구. 도끼병에 걸린 마냥 여자애들이 웃기만 해도 자기에게 반했다고 생각하는 녀석이었는데.
반반한 외모 탓인지, 아니면 평범한 학생들이 볼 때는 감탄할 정도는 되는 노래와 춤 실력 덕분이었는지, 어찌어찌 끊임없이 연애를 해댔다.
윤아를 바라보는 동진의 눈빛에 담긴 뻔한 속셈.
이런 상황에는 아주 익숙한 태훈이었다. 아이돌 활동할 때도 여배우급 외모를 뽐내던 윤아에게 집적거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태훈이 동진과 윤아 사이를 가로 막고 섰다.
“윤아야. 우리 갈게.”
“어?”
윤아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태훈이 동진을 향해 돌아섰다.
“야, 가자.”
“아, 뭐, 아직 시간 여유 있어. 잠깐...”
“나오라고. 이 자식아. 윤아야, 다음에 보자!”
태훈이 윤아에게 손을 흔들고는, 동진을 질질 끌다시피 하여 편의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저, 저기!”
뒤늦게 윤아가 태훈을 불렀지만 두 사람은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
두 사람이 사라진 편의점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윤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 볼 거면 폰번호나 좀 알려주지...”
***
“야, 인마. 이거 놔!”
한참을 끌려오고 나서야 태훈의 손을 뿌리친 이동진이 뭔가 알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뭔데. 너 쟤 좋아하냐?”
“그런 건 네가 알 것 없고. 쟤한테 집적거리면 죽는다는 것만 알면 돼.”
“뭐?”
동진은 태훈에게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냥 해맑고 어린애 같아서 데리고 놀기 딱 좋은 녀석이었는데. 말이나 눈빛이 뭔가 달라졌다.
‘뭐지. 이 새끼?’
동진이 태훈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아, 새끼. 여자한테 눈 돌아가는 타입이었네. 하긴 저 정도 예쁘면 그럴 만도 하지. 아니, 새끼야 그러면 그렇다고 얘길 하지, 뭘 이렇게 까칠하게 굴어. 설마 내가 너 좋다는 애 건드리겠냐? 나 그런 놈 아니다.”
응. 그런 놈이야.
태훈이 혀를 찼다.
‘남친 있는 애 꼬셨다가 뒤질 뻔했지. 남친이 유명한 일진이어서. 물론 조금 미래의 일이긴 하다만.’
여자에 눈 돌아가면 앞뒤 분간 못하는 놈이었다. 겁도 많고 싸움도 못 하는 놈이 일진 여친을 건드려서는.
“태훈아. 걱정 마라. 형님이 지원 사격해 줄 테니.”
태훈이 자기 어깨를 두드리는 동진의 손을 꾹 잡아 내렸다.
“지원 사격은 됐고. 이거 하나만 명심하면 돼. 윤아한테 집적거리다가 걸리면 나한테 죽는 거야.”
자기가 알던 태훈과는 뭔가 다른 서늘함. 본래 배짱이 있는 편은 아닌 동진이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어? 버스 왔다.”
말을 돌리듯 버스 정류장을 가리켰다.
“학원 늦겠다 빨리 가자.”
태훈도 일단 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윤아를 처음 다시 만났던 건, 중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아직 고등학교 입학을 하기 전, 대략 2월 중순 무렵이었다.
이때의 태훈은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등록한 보컬 댄스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학원은 일단 가야겠지.’
지금 태훈에게 보컬 댄스 학원이 필요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어려운 형편에 누나가 힘들게 보내 준 학원이었으니까.
학원에 빠지면 집으로 연락이 갈 테고, 태훈의 회귀 같은 건 알 리가 없는 누나에게 너무나 미안해질 일이었다.
태훈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를 대신해 태훈을 돌봐준 10살 위 누나.
누나는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 경비 일을 하는 연세 많은 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대학 학비는 고사하고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인 탓이었다.
‘그런 누나에게 연예인 되겠다고 보컬 댄스 학원을 보내 달라고 졸랐으니 참... 그걸 보내 준 우리 누나도 대단하고.’
물론 진짜 만행은 따로 있었다. 지금의 태훈은 등록금이 대학교보다 비싼 사립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상태.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철딱서니 없는 동생의 만행이었지만, 그걸 허락해 줄 만큼 누나는 태훈을 끔찍이 아꼈다.
‘하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
희생이 당연한 듯, 엄마 없는 동생이 엄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랑을 쏟아부어 주었던 누나.
이 시기 태훈이 환경에 비해 구김이 없고 밝은 성격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누나 때문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누나 생각을 하자니 태훈의 콧등이 시큰거렸다.
물론 이전 생에서 태훈은 성공한 뒤에 정말 원도 한도 없이 누나에게 돈을 쏟아부었지만, 누나가 태훈에게 베풀었던 희생은 단순히 물질적인 보답만으로 갚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번 달 말까지만 열심히 다니자.’
강습비를 선납했으니, 꼼짝없이 월말까지는 착실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타닥.
태훈이 훌쩍 버스에 올라탔다. 곧이어 치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버스가 출발했다.
***
[해인 댄스&보컬 학원]
차 두 대가 겨우 비켜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이면도로에 접한 낡은 3층 건물. 곳곳이 헐고 금이 간 건물의 벽면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나름 깨끗하고 세련되게 매달려 있는 학원의 간판.
‘와. 이게 얼마 만이냐.’
얼결에 온 학원이었지만, 막상 학원 앞에 도착하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전 생 태훈이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쳐 CW엔터의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꿈꾸며, 땀 흘리며, 눈물을 쏟았던 곳.
비극적인 사고만 아니었다면, 절대 태훈의 기억 저편에 그렇게 깊이 묻혀 있지 않았을 장소였다.
태훈을 빌보드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칭한다면, 그 전설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학원이었으니까.
“야, 인마. 뭐해? 안 들어가?”
건물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채 추억에 잠겨 있는 태훈의 어깨를 이동진이 툭 하고 쳤다.
“......”
문득 정신을 차린 태훈이 과거 수없이 오르락내리락하던 낡은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나이에 댄스 보컬 학원이라니.
피식 웃음을 흘린 태훈이 이내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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