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왜 되냐!
태훈이 당황한 그 순간, 다행히도 태훈의 담임 교사가 끼어들었다.
“아니, 선생님 여기 교무실이에요. 무슨 연기를 해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훈. 옳으신 말씀입니다. 교무실에서는 정숙해야지요.
하지만 연기과 교사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여기 K예고에요. 우리 학교 모토가 뭐예요? 예술은 곧 자유다. 어디면 어때요. 그냥 연기하면 하는 거지.”
“아니, 그래도 나중에 따로 볼 수도 있잖아요. 선생님들 일하시는 데 방해도 되고.”
“선생님들 신경 안 써요. 태훈아 한 번 해봐. 윤아가 대단하다고 했던 그 연기.”
태훈이 담임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말씀을 꺼내셨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죠. 확실히 말려주세요. 라는 눈빛으로.
태훈과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휴. 그래 알았다. 한번 해봐.”
아니, 선생님! 그게 왜?!
어떻게 남자가 마음을 그렇게 쉽게 바꾸십니까! 교무실에서는 정숙! 밀어붙이셔야죠!
태훈의 마음속 절규와는 상관없이, 세 사람의 시선이 태훈에게로 모여들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상황이 재밌었는지, 몇몇 선생님들까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태훈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
뭔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
물론 태훈이 못하겠다 내뺀다고 해서 막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태훈의 인생 좌우명이 무엇이던가. “해보지도 않고 쫄리지 말자!”였다.
이유야 어쨌든, 전과하겠다고 와서, 해보라는 연기도 안 하고 내뺀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워지는 꼴은 태훈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분야는 조금 다를지라도 한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최정점에 섰던 그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고작 이런 자리에서 꼬리를 말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묘한 투쟁심이 태훈의 가슴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뭐,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런 거지? 하. 그래 해보지 뭐. 어차피 한번 해봤던 거, 흉내 비슷하게라도 못 내겠나.’
짧게 한숨을 내쉰 태훈이 호흡을 고르고는 말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태훈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천천히 집중하며, 마치 노래에 몰입하듯이, 그때의 그 상황과 감정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장면은 윤아의 장례식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친구들을 보았고.
지독히도 아리던 그 감정을 지나.
다시, 아프지 않던 어린 시절 윤아를 만났었지.
그 순간이었다.
‘어?’
태훈의 머리가 멍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저절로 뜨인 태훈의 눈앞에는 그날의 윤아가 서 있었다. 그리고. 태훈이 서 있는 곳은.
교무실이 아니라, 그날 그 거리였다.
심장이 아프도록 뛰었다.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흘러나왔다.
“윤아야...”
부들부들 떨리는 태훈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볼을 향했고.
가까스로 손이 윤아의 뺨에 닿았을 때, 꾹꾹 눌려있던 울음이 기어코 터져 버렸다.
“흑흑, 윤아야! 미안해!”
태훈이 윤아를 와락 끌어안고 오열했다.
“내가 미안하다! 내 친구 윤아야! 못 지켜줘서 미안해... 으어헝─.”
그렇게 진정 되지 않는 울음이 얼마간이나 터져 나왔을까. 태훈의 귓가에 먼 곳에서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야야. 태훈아! 태훈아? 괜찮아?"
순식간에 소리가 가까워졌다.
"태훈아! 진정해! 정신 차려!”
누군가 등을 두드렸고. 그 순간 번뜩 하고 태훈의 정신이 돌아왔다.
“어?”
태훈은 바로 이상함을 느꼈다. 윤아를 끌어안았던 건 기억이 나는데... 지금 자기 시선 앞에는 윤아의 얼굴이 아니라, 웬 젊은 여성의...
“으악!”
화들짝 놀란 태훈이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고 있던 건 윤아가 아니라, 연기과 교사였다.
‘뭐, 뭐야! 이건?!.’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게 뭐지?
정신없는 태훈의 시선에 경악에 물든 연기과 교사의 표정이 들어왔다.
“너, 너, 뭐야. 혹시 기억이 안 나? 지금 방금 상황?”
“어, 그게, 그러니까.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닌데... 제가 분명히 몰입을 하려고 했는데...”
뭔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두서없이 내뱉고 있는 태훈에게 연기과 교사가 재차 물었다.
“너 연기 해본 적 없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그게 맞는데...”
그러니까. 이게 대체 뭐냐고.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껌벅이는 태훈 앞에서, 연기과 교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쳤네. 미쳤어. 재능이 완전히 미쳤어.”
아뇨. 선생님. 재능이 미친 게 아니라, 그냥 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
이게 왜 되는 거죠?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태훈의 어깨를 연기과 교사가 꽉 그러쥐었다. 그녀의 고개가 태훈의 담임에게로 홱 돌아갔다.
“김 선생님! 얘 봤죠? 얘 이거 문창과에 그대로 둬야 해요?”
“......”
너무 충격적인 연기 탓에 태훈의 담임도 그저 입을 달싹거릴 뿐, 뭐라고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이 김에 둘 다 데려가게 해주세요. 제가 신세는 톡톡히 갚을게요.”
연기과 교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태훈의 담임을 종용했다.
하지만 순간, 담임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손을 들어 연기과 교사를 말렸다.
“선생님, 잠깐, 잠깐만요. 재능? 좋죠. 인정해요. 하지만 이제 입학한 지 이틀이에요. 문창과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가면서 천천히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요.”
“선생님!!”
담임의 말에 연기과 교사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때였다.
“크흠! 선생님,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지금 제가 진정할 수가.... 어? 교장 선생님!”
어느새 다가온 교장의 모습을 본 두 교사가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순간 흐르는 침묵.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어색함을 흩어버리는 교장의 따뜻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학생들에 대한 열정이 보기 좋습니다. 허허허.”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말이었다. 하지만 교사들은 머쓱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교무실이 너무 소란스러워지면 안 되니까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교사들, 특히 연기과 교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흘깃 교장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보아하니, 어차피 내가 정리해야 할 문제인 것 같아서 미리 나섰어요. 선생님들 맘 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나이가 무색하게, 반짝이는 청년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낸 교장의 시선이 태훈과 윤아에게서 멈췄다.
“그러니까. 두 학생은 연기과에 가고 싶다는 거지요?”
“네. 선생님.”
윤아가 입술에 힘을 주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태훈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고 싶으면 가야지요.”
“선생님!”
두 교사가 이구동성으로 교장을 불렀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달랐다. 태훈의 담임에게는 난감한 표정이, 연기과 교사에게는 기쁨의 표정이 걸렸다.
“잠깐만 아직, 두 분 다 내 말을 들어보세요.”
교장이 한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는 태훈을 향해 말했다.
“아주 인상 깊은 연기였어요. 아, 나야 음악 쟁이라 연기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래도 훌륭한 건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알아보는 법이니까.”
교장이 잠시 물끄러미 태훈의 눈빛을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었다.
“아주 좋은 눈빛을 가졌네요. 태훈 학생은.”
“감사합니다.”
교장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응원해주고 싶은데, 근데 이걸 어쩌나. 여긴 학굡니다. 아무리 다른 곳보다는 자유롭다고 해도 엄연히 절차라는 것은 존재하지요.”
“......”
입으로는 절차라는 딱딱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교장의 표정은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즐거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5월 말에 있을 연극제에서 최소한 조연 이상으로 무대에 설 것. 그러면 바로 연기과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줄게요.”
교장의 말에 연기과 교사가 바로 입을 열었다.
“엇! 교장 선생님, 그건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5월 연극제는...”
“아아. 알지요. 알아. 그래서 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어때요, 이 정도면 문창과에서 충분히 납득하지 않겠어요?”
교장이 연기과 교사의 말을 일축하고는 태훈의 담임을 바라보았다. 담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교장의 말에 수긍했다.
“그 정도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교장이 태훈과 윤아를 향해 물었다.
“어때요, 한번 도전해 보겠어요?”
태훈이 교장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5월 연극제.
태훈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각계에서 활동하는 선배들도 방문하는 홈커밍 성격의 축제.
여기서 선배들의 눈에 띄면 나중에라도 극단이라든지, 드라마, 영화 등에서 캐스팅되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기에.
‘연기과에 난다긴다하는 애들이 반쯤 목숨을 걸었더랬지.’
입시를 위한 생활기록부 작성에도 이익이 있는 건 덤이었고.
그 때문에 5월 연극제에 서는 두 연극 동아리, 비상(飛上)과 창공(蒼空)의 주요 배역은 무조건 연기과 학생들로 채워졌었다.
‘심지어 연기과여도 1학년에게는 주요 배역을 주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장이 제시한 건 상당한 난도의 과제였다. 그게 좀 태훈에겐 의외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담임과 상담해서 전과 신청하고, 연기과 선생님들께 정식 오디션 받는 것으로 끝일 텐데.’
물론 절차에 따른 전과 오디션이라는 것도 어떤 형태가 정해진 것은 아니기에, 결정권자인 교장이 연극제를 오디션으로 대치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단지 궁금한 건 이유였다.
왜 교장 선생님이 절차를 들먹여가며 일반의 절차보다 훨씬 난도 높은 과제를 주는지. 물론 어렴풋이 짚이는 게 없지는 않았지만...
‘흠, 연극제 오디션이라.’
교장의 묘한 제안.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태훈 자신의 연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여기까지 와서, 못 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
태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네. 저도요.”
윤아도 태훈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 알고 이제 교실로 돌아가면 되겠네요.”
“네.”
태훈과 윤아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교실로 돌아갔다.
**
“......”
교무실 안.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연기과 교사가 조금은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교장을 응시했다.
“교장 선생님. 5월 축제 연극 무대에 연기과가 아닌 다른 과 학생이 주요 배역을 맡은 적은... 적어도 제가 부임한 이후론 한 번도 없었어요.”
“알지요. 꽤 오래전 일인걸.”
연극 오디션을 통과하는 건 단순히 연기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디션 심사 위원들은 다름 아닌 연극 동아리 임원들. 그리고 그 임원들은 대부분 연기과 학생들이었다.
타 과가 연극무대 주요 배역에 선다는 건, 연기과 임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쉽지 않은 문제였다.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고, 그건 학교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니까.
“오디션이 두 주 남은 것도 아시는 거지요?”
“그럼요.”
“그런데도 저 아이들이 연기과 아이들을 제치고 오디션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아마 어렵겠지요.”
“아니, 근데 왜 그러셨어요. 너무 과도한 조건이었습니다.”
원망이 담긴 연기과 교사의 말에 교장이 지긋이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이걸 해내면 당장 연기과로 보내준다고 했지, 못 한다고 해서 안 보내 준다고 하진 않았어요.”
교장이 연기과 교사에게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입학하고 한 학기도 안 되어서 전과를 시켜주는 것도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에요. 전례가 없는 일을 위해서, 전례 없던 일에 도전해 보라는 게 부당한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제야 자신의 요구가 조금 성급했다고 생각했는지 연기과 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급했네요. 아이들이 너무 욕심이 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장이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처음이지요. 이런 학생들?”
“......”
“입학한 지 하루 만에 전과시켜달라고 교무실로 쳐들어와서는 멋들어지게 연기를 해버리는 학생 말입니다.”
“네. 처음 있는 일이죠.”
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녀석들에게는 특별한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래야 더 멋지게 자라지 않을까.”
교장이 조금 전 보았던 태훈의 눈빛을 떠올리며 지긋이 미소를 지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저는 어쩐지 기대가 됩니다. 한번 봅시다. 이 아이들이 또 뭘 보여줄지.”
**
교무실에서 나오자마자 태훈과 윤아가 향한 게시판 앞.
“오디션이 다다음 주네.”
5월 연극제 포스터를 확인한 김윤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상과 창공. 두 동아리의 오디션 날짜가 거의 비슷했다.
5월 말 발표 무대라면 시간이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막상 다다음 주라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좀 막막함이 밀려오는 윤아였다.
“저기, 태훈아?”
“... 응?”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태훈이 윤아의 부름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윤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윤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디션이 다다음 주라서...”
“아.”
태훈이 포스터의 날짜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그래, 일단, 준비하면서 확인해 보자.’
아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생각을 잠시 털어낸 태훈이 윤아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충분히 준비할 수 있으니까.”
원래 계획보다 일찍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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