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차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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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릉다라
작품등록일 :
2024.08.21 15:42
최근연재일 :
2024.09.0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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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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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걸어 다니는 재앙

DUMMY

계단으로 향하던 준기는 습관적으로 아래쪽을 쳐다봤다.

공동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언제나 똑같지.”


1회 차의 준기는 집에 숨어 바깥 동정을 살피며 시간을 끌다가 복도로 나와 저 부자에게 살해당했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던 때였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죽음이었다.


‘참으로 등신 같은 죽음이었어.’


추억이 아름다운 건 미화 때문이다.

스스로를 긍정적인 인간으로 기억하려는 본능이 원인 같았다.

준기는 가급적 실수를 기억하려 들었다.

어떤 실수는 삶을 끝장낼 정도로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


계단을 오르며 꼭대기 층의 주인집을 지나쳤다.

그대로 옥상 문을 열고 나가자 해가 뜨고 있었다.

3월 중순이라 약간 쌀쌀했다.


“공기 좋다.”


나른한 잠을 쫓기 위해 아침체조를 하는 사람처럼 몸을 풀었다.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건 무엇보다 빠른 발과 유연한 몸놀림 그리고 건강이다.

감염체를 죽일 총도 당장은 없었다.

생존수단은 몸뿐이다.

단련된 신체는 그 자체로 무기다.


‘푸쉬업과 런지만 하자.’


운동을 안 하던 몸이라 너무 심한 근육통은 감당이 어려웠다.

신체를 단련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점진적 과부하를 활용하면 체력은 계속 상승한다.


후우! 후우!


신체 단련은 미래를 위한 준비다.

반복된 삶의 초반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요소였다.


‘이런 세상에서도 운동을 해요?’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하고 생사가 오가는 판에 왜 쓸데없이 헛힘을 씁니까?’


생존자 무리에서 흔히 듣던 말이다.


‘다들 살기에 급급했으니, 내가 이상해 보였을 거야.’


달라진 세상은 고도의 지략과 강한 체력을 요구했다.

허약한 몸으로 어찌어찌 살아남아도 결국에는 한계에 봉착할 때가 분명 온다.

쫓기거나 싸우다 지쳐서일 때도 있고, 달라붙은 감염체를 뿌리치거나 밀쳐내지 못해서 죽는 일은 꼭 있어왔다.


후읍! 후읍!


그렇다고 체력이 소진되도록 운동할 여유는 없었다.

짧은 시간 최소한의 신체단련만 가능한 환경이다.


‘쇠파이프 한 번 휘두르고 등에 담이 결리거나 허리 디스크가 터지면 답이 없지.’


유리처럼 약한 몸을 가진 현대인들은 감염체들을 뿌리치거나 도망칠 체력도 없었다.

맞서 싸우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고 남을 돕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이들은 도태됐다.

짧은 운동을 마무리할 때쯤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아악!


비명의 주인은 준기도 아는 인물이다.

아무리 살려주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저 자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는지 모른다.


‘6회 차부터 12회 차 때까지 구해줬었나?’


그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 나를 방패나 미끼로 쓰려고 데리고 다니는 거 맞죠!’


사태가 벌어지고 첫 인연이라는 생각에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인물이다.

먹이고 가르치고 보호하며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얼마나 설득했던가.

하지만 세상이 멸망한 충격에 지능과 사고력이 퇴행된 케이스다.


‘안 되는 사람은 절대 안 되지.’


사람 살리라는 목소리가 한 차례 더 들리더니 악! 소리와 함께 비명도 끝났다.

물어뜯기고 감염되거나 한낱 영양공급원으로 전락할 저 청년은 불신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


“후우!”


신체의 근육과 관절을 충분히 푼 준기는 옥상 구석으로 걸어갔다.

쌓여있는 각목과 파이프 더미가 보였고 거기에 손에 꼭 맞는 무기가 있었다.

1m 길이의 스텐레이스 수도 파이프는 엘보가 끼워져 끝이 묵직했다.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던 걸레를 걷어 손으로 잡아 뜯었다.


부욱!


손잡이를 천으로 감은 후에 옥상에 방치된 낡은 케이블 선을 걷어 묶기 시작했다.

미끄러짐과 충격이 손바닥에 전달되는 걸 막으려면 이 방법뿐이다.


파이프를 감고 남은 선은 옥상 화단에 놓인 모종 가위를 이용해 끊어냈다.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건 편리했다.

선을 절단할 공구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었다.

양손으로 잡고 휘둘러봤다.


붕! 붕!


장도리와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이다.

파이프를 휘두르며 신경계와 근육의 통합을 이끌어냈다.

준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폭음이 들릴 때였다.


쿠르릉! 쿠쿵!


멀리서 생성된 폭음은 국군의 마지막 항쟁을 대변했다.

국군은 내부로부터 무너졌다.

이제부터는 간신히 수습된 소수의 부대만 남게 된다.

지금 각 부대에선 선임이 후임을 물어뜯고 장교가 사병을 물어뜯고 있다.

감염체로 변한 군인들은 멀쩡한 부대원을 죽였고 대다수의 부대가 궤멸됐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인적 집합체다.

초기 사태의 취약점이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군대가 멀쩡한 나라는 전무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감염체의 진화는 몇 개월 후에 시작된다.

일반 감염체보다 월등히 강한 변종들의 등장은 재앙 위의 재앙이었다.

물론 그 전에 대비를 해야 한다.

긴 시간 인류가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한 이유는 그 망할 놈의 진화적 변이 때문이다.


붕! 붕!


아직은 이 쇠파이프로 충분히 때려죽일 수 있다.

경험은 차고 넘쳤다.


*


손목시계를 확인한 준기는 밖으로 나갈 채비에 나섰다.

일단 주인집으로 들어갔다.

구조는 잘 알고 있다.

20번도 넘게 드나들며 집안을 뒤졌으니 당연한 일.


등산 가방을 찾아 열었고 우선 냉장고에서 2L 생수 한 병을 꺼냈다.

냉장고의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회귀 초반 시절에나 탐을 내던 음식들은 금세 부패했고 먹고 탈이 난 적도 있었다.


와르르!


거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가정용 구급함을 쏟았다. 해열제와 진통제를 찾았고 항생제도 골라냈다. 압박붕대 한 롤과 상처에 바르는 연고, 작은 소독약도 챙겼다.

준기는 집안을 돌아다니며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씩 확보했다. 품목과 위치는 전부 머릿속에 있다.


‘다 됐고 이제 칼만 남았나?’


준기는 베란다 구석에 있던 숫돌을 가져와 싱크대에 올려놓고 식칼과 과도를 갈기 시작했다. 고작 한 번만 쓸 칼이지만 날이 무디면 일이 복잡해진다.


슥삭, 슥삭!


각각의 상황에 맞는 물건은 적시에 충당하고 필요가 없을 때는 버려야 한다. 욕심껏 챙기다가 짐 무게가 늘면 체력만 빠진다.


*


등산 가방을 매고 계단을 내려오자 공동현관 유리문 앞에 작은 체구의 감염체가 보였다.

주인집 아주머니였던 감염체다.

준기는 김치와 밑반찬으로 정을 나눠준 아주머니를 추억했다.


“오랜만입니다. 아주머니.”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인사를 건네자 크어억! 하는 괴성으로 답이 돌아왔다.

문에 매달려 이를 드러내는 감염체는 새벽 운동을 다녀온 복장 그대로였다.


덜컹, 덜컹!


문을 잡고 흔들어대는 감염체의 모습에서 과거의 사람은 간곳이 없었다.


띠리리!

벌컥! 턱!


유리문을 열고 머리채를 잡아 누른 상태로 지하 계단에 던져버렸다.


투더덕!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심하게 찧은 감염체는 다시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준기는 계단 아래를 향해 인사했다.


“베풀어주셨던 온정에 감사드립니다.”


세입자들에게 잘해줬던 이유가 월세 때문이었는지, 원래 정이 많아서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받았던 정은 잊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인사까지 마치고 밖으로 나오기 전 주변과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초반, 특히 첫 날은 타이밍이 중요했다.


문을 열고 나와 건물 뒤편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주차장 구석에 있는 배달용 오토바이에 볼일이 있어서다.

먼저 챙겨온 국자를 잠겨 있는 배달통의 낡은 경첩 틈에 끼운 채 힘을 줬다.


뻐걱, 드드득!


혹시 뒤에서 감염체가 달려올까 걱정할 일은 없다.

큰 소리만 주의하면 되고 지금은 감염체가 지나갈 타이밍이 아니다.

배달통에서 꺼낸 것은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다.

이 건물에 살던 배달원은 항상 보호대와 안전모를 통에 넣고 집으로 올라오곤 했었다.


턱, 턱!


무릎과 팔꿈치 보호대는 지금 시점에선 꼭 필요했다.

스카프로 입을 가리고 스포츠 고글로 눈을 보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준비를 끝낸 준기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주차장 출구 모퉁이에 설 시간이다.


“후우!”


심호흡을 끝낸 준기는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상태로 시계를 확인하고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열둘을 세었을 때 비척대며 걷는 소리가 왼편에서 들려왔다.

개체는 둘이었고 고등학생과 회사원이었던 감염체임은 준기가 이미 알고 있다.

아는 사람이 있듯 아는 감염체도 있는 법.


척!


수도 파이프를 들어 내리칠 준비를 마치자 양복차림에 가방을 매고 있는 감염체의 측면이 보였다. 신선한 살 냄새를 맡고 감염체가 고개를 돌리던 순간 파이프가 날아들었다.


휘잉, 쩌억, 철퍼덕!


뇌수가 터진 채 쓰러진 감염체 뒤로 교복 입은 감염체가 고개를 꺾은 채 괴성을 지르려했다. 준기가 수도 파이프로 목을 찌른 것도 그때였다.


큭!


괴성은 나오다 말았다.

하지만 고통을 개의치 않는 감염체는 잠깐 주춤하더니 달려들었고 준기는 보호대를 장착한 팔꿈치로 이빨을 공격했다.


퍽! 후두득!


강냉이가 털린 감염체가 휘청한 순간 이번에는 플라잉 니킥을 턱에 꽂았다.


떠걱!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은 감염체가 다시 일어설 때가 기회였다.


휘잉, 뻑!


머리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온몸을 무기로 사용하던 감각은 이렇게 일깨워졌다.


‘계속 부드러워지겠지.’


총 없이 감염체를 죽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날렵한 개체일수록 먼저 부상을 입히는 것도 요령이다.

사람처럼 머리가 약점이지만 일격에 제거하는 건 온힘을 다해야 가능하다.

무수한 경험이 없었다면 격투 아닌 격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회사원 감염체의 손목에서 명품 시계를 끌러내 바꿔 찼다.

어떤 충격에도 끄떡없던 시계는 이렇게 구했다.


‘이제 내 신발을 신고 오는 놈 차례군.’


준기는 다시 모퉁이에 숨었고 속으로 다시 숫자를 헤아렸다.


‘셋, 넷, 다섯······.’


열다섯쯤 헤아렸을 때 등장한 건 예비군복을 입은 감염체였다.

감염체가 주차장 입구를 지나던 순간 준기는 기둥에서 몸을 날렸다.


휘잉, 빡! 휘잉, 뻐억!


첫 타격에 휘청거린 감염체를 또 내리쳐야만 했다. 몸은 쓰면 쓸수록 숙련도가 돌아왔지만 메 번 일격으로 끝나진 않았다.


‘특별히 대가리가 단단한 개체들이 있단 말이지.’


준기는 예비군복을 입은 감염체의 사체를 주차장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우르르!


감염체 무리가 떼로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로 추정컨대 20여 개체였다.

잠시 감염체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난폭한 살의로 가득한 감염체 무리는 평범한 이들에겐 걸어 다니는 재앙이었다.


감염체들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예비군 감염체가 신고 있던 전투화를 벗겼다. 신발은 재빨리 갈아 신었다. 사이즈도 맞았고 끈도 꽉 졸라맸다. 시계를 확인하자 08시 정각이다.


‘2분 남았네.’


떼로 몰려다니는 감염체를 피하려면 타이밍이 생명이다. 감염체 무리는 점점 숫자를 키워나가는 특성이 있다.

단위가 수백 개체 이상으로 증가하면 총으로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만약 수천에서 수만 단위까지 숫자가 불어나면 무장한 생존자 집단도 무참하게 쓸려나간다.


2분이 지난 후 준기는 주차장에서 나와 길에 섰다.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무수한 시신이 먼저 보였다.

직접 변이의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 경우였다.

다음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저건 또 먹다 말았네.’


열린 차량 문으로 피와 살점과 내장 조각이 쏟아져있었다.

감염체들에게 먹거리가 풍부한 시기다.

멀리서 배회하는 감염체들도 보였다.

아직 응고되지 않은 많은 피가 도로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여기저기 널린 인체의 잔해도 많았는데, 감염체들의 식사 흔적이었다.


‘200년을 봐왔어도 역겹다.’


살점이 뜯겨진 사람의 머리와 손과 발이 따로 떨어져 굴러다녔다.

갈비뼈와 대퇴골과 골반 뼈도 핏물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찢겨진 옷가지와 신발, 벗겨진 머리가죽과 머리카락도 많았다.

하이에나 무리가 잡아먹은 흔적과 흡사했다.


처음 거리로 나왔을 때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발을 떼기도 어려웠다.

몸은 얼어붙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 바를 알지 못했다.

용기를 낸다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뀐 세상의 기본 정서는 공포다.

멸망한 세상의 재앙은 두 발로 걸어 다녔다.


‘너희가 인간의 재앙이면 나는 너희의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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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이 작품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2 24.09.01 54 0 -
14 장거리 사격술의 귀재 24.09.01 54 2 13쪽
13 부유하는 유령처럼 24.09.01 58 1 16쪽
12 멀쩡한 정신 24.08.31 68 2 13쪽
11 죽은 세상을 비추는 빛 24.08.30 71 3 15쪽
10 신선한 식재료 24.08.29 78 2 14쪽
9 용기와 동지애 24.08.28 80 4 16쪽
8 선을 넘는 순간 +1 24.08.27 100 4 16쪽
7 공포와 용기 24.08.26 109 4 16쪽
6 웃음 그리고 죽음 24.08.25 126 5 16쪽
5 망한 세상의 몸과 마음 24.08.24 131 5 14쪽
4 낯선 사람 +1 24.08.23 148 5 13쪽
3 200년의 지식 24.08.22 171 5 14쪽
» 걸어 다니는 재앙 24.08.22 196 4 13쪽
1 27회 차 아포칼립스 프롤로그, 1화 +1 24.08.22 263 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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