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차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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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릉다라
작품등록일 :
2024.08.21 15:42
최근연재일 :
2024.09.0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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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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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정신

DUMMY

두 사람의 의지를 확인한 준기는 속으로 웃었다.

변치 않는 모습을 수십 년 만에 다시 확인하니 반가워서다.


“밤에 움직여야 하니 우선 뭐라도 먹고 돌아가면서 잠도 잡시다. 지친 몸으로는 어려워요.”


준기의 제안이었다.

체력을 회복하는 방법은 영양과 휴식이다.

그러면 다시 싸울 수 있다.


*


자정이 가깝도록 먹고 쉬는 일만 했다.

최악의 컨디션에도 생명유지는 가능하지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하면 싸움은 못한다.

준기는 골목을 내려다 본 후 청각에 집중했다.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도심의 밤은 작은 소리까지 잘 들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네요. 두 사람이 먼저 내려가요. 줄은 이렇게 매면 됩니다.”


두 사람을 먼저 내려 보낼 생각이다.

가슴 높이에 둥글게 줄을 말아주자 희찬이 물었다.


“이렇게 헐렁하게 매라고요?”

“네. 그래야 급할 때는 빨리 빼낼 수 있으니까요. 특히 2층 높이쯤에서는 주변을 다시 확인해야 해요. 위에서 안 보이던 놈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해볼게요.”


희찬은 가슴에 줄을 매고 난간 벽을 넘었다.

3층 주택 옥탑은 높이로는 4층에 해당하니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희찬은 제법 잘 해냈다.

줄을 잡고 있는 준기와 경일의 손에도 계속 힘이 들어갔다.

준기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는 희찬을 보며 옛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


몇 회 차 때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두 사람이 도시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가다 한꺼번에 추락한 적이 있었다. 부상이 사망인 세상이라 초반에는 늘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준기의 기억 속 두 사람은 다람쥐처럼 건물을 오르내렸지만, 아직은 아니다. 둘 다 용기를 쥐어짜야 했다.

지금은 미숙할 시기라 긴장이 감돌았다.


경일까지 밑으로 내려간 후 준기 차례다.

골목 좌우를 확인한 후 바로 배관을 탔다.

너무 익숙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아직 체력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 그럴 수도 없었지만.


턱!


결국 줄에 의지하지도 않고 준기가 내려오자 두 사람은 한 마디씩 속삭였다.


“마지막이 제일 위험했군요.”

“내려오시는 모습을 보고서야 이해되네요. 왜 먼저 내려가라고 했는지를 말입니다.”


준기만 줄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도 못할 만큼 긴장해서 이제야 의식하게 된 거다.


“이제 갑시다.”


준기는 조용히 속삭이며 가방에 수도 파이프를 꽂고 칼을 뽑았다.

둔기보다 칼이 더 조용한 무기다.


*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아까 버려뒀던 가방을 하나씩 챙겼다.

자정에 가까워 돌아다니는 감염체는 확실히 숫자가 줄었다.


우뚝!


그러다 마주친 한 마리는 준기가 처리했다.


추아악!


강하게 휘두른 칼날에 피를 대량으로 쏟아낸 감염체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이동하던 세 사람은 드디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학원에 가까워졌다.


척!


모퉁이에서 학원 앞 이면도로를 확인한 준기는 주먹을 귀 옆으로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 4개를 펴며 방향을 가리켰다.

누구나 알법한 수신호였고 두 사람은 무기를 단단히 쥐고 호흡을 끌어 모았다. 준기는 손가락을 올리고 숫자를 줄여나갔다.


-셋, 둘, 하나!


수신호를 준 준기는 칼을 들고 이면도로로 뛰쳐나갔다.


다다다닥!


신발소리가 조금 났지만 지금 중요한 건 속도였다.

가장 앞선 감염체가 준기가 들이닥치는 걸 발견한 건 코앞에서였다.


푹, 드드득!


준기의 칼은 감염체의 목을 관통하며 상처를 크게 벌렸다.

쇼크가 전신을 덮친 첫 번째 놈이 굳은 채 엎어지자 뒤로 처져있던 세 마리가 반응했다.


크와아아악!


신중하게 달려들며 거리를 좁힌 준기는 두 번째 놈의 목에 칼을 꽂았다.


파앗!


두 번째 칼질도 일격필살이었다.

목의 절반 가까이가 잘려나간 두 번째 감염체 역시 무릎이 꺾인 채 꼬꾸라졌다.

경일과 희찬도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깡, 푹!


쇠파이프로 머리를 터뜨리고 단창으로 목을 찌른 공격도 성공했다.

순식간에 네 마리를 제거했고 전보다 여유로웠다.


“갑시다.”


주변을 확인하고 재빨리 이동해 학원 뒤편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가방과 무기를 담 너머에 던지고 재빨리 넘어갔다.

담을 넘은 다음 가방과 무기를 챙겼고 청각에 유의해 동정도 살폈다.


“성공입니다. 들어갑시다.”


세 사람은 다급하게 뒷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즉각 열렸어야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리문 안은 캄캄했다.


“어디 간 거죠?”

“아마 지쳐 쓰러져 있겠죠.”


새벽녘에 나간 남자들을 자정까지 기다리면서 얼마나 지쳤을까.

음식도 제때 먹지 못하고 진만 빼고 있었으리라.

그때 문 안쪽에서 다급하게 어른거리는 윤곽이 보이더니 신애가 문을 열었다.


“크흑!”


억눌린 울음소리가 들렸다.

혼자 고립된 채 죽는 상상을 하며 초조와 불안으로 애를 끓였던 거다.

신애는 안도감에 젖어 눈물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별일 없었어요?”

“많이 배고프죠.”

“우리 멀쩡히 돌아왔습니다.”


세 사람은 저마다 위로를 건넸다.

눈이 퀭해진 신애는 원망과 불안, 안도와 기쁨을 뒤섞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혼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에서 기한 없는 기다림이다. 신애는 홀로 이겨냈어야 할 불안과 초조를 이렇게 표현한다.


“일단 올라가요. 우리가 맛있는 거 많이 가져왔어요.”


준기는 이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지 잘 안다.

굶주린 사람은 온 몸과 마음으로 음식만 기다리기 때문이다.


*


또 다시 폭풍 흡입의 시간이 돌아왔다.

밖에서 음식을 섭취한 세 사람과 달리 신애는 과자와 음료수를 조금 먹은 것 말고는 계속 굶었다고 했다.


“맛있죠.”


신애는 레토르트 팩에 담긴 함박스테이크를 밥과 더불어 입에 가득 넣은 채였다.

다 씹고 나서야 신애가 답했다.


“밥이 꿀 같아요. 이렇게 세 분하고 같이 먹어서 더 맛있고요.”


의지할 데라곤 세 남자뿐이니 오죽하겠는가.


“천천히 들어요. 후식으로 오렌지 주스하고 과자도 먹고요. 우린 밖에서 조금 먹었으니 체면 차리지 말고요.”

“고마워요. 선생님.”


많이 먹는 게 몸에 안 좋은 건 상식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비자발적 간헐적 단식과 고도의 체력소모가 일상인 상황에선 음식이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


‘되는대로 마구 먹어도 아무도 살이 찌지 않는 세상이지.’


인류의 섭생은 과거로 회귀했고 몸매도 그러했다.


*


식사가 끝난 후 대화를 나눴다.

신애는 혼자 기다리면서 느꼈던 감정을 토로했다.


“오전 내내 기다렸는데도 안 오시고, 점심때가 넘었는데도 안 오셔서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세 분이 잘못됐을까봐 너무 불안해서 속으로 기도가 절로 나왔어요. 그러다가 오후가 됐을 때는 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는지 눈물만 나왔고요. 난 이제 어찌되는 건지, 여기서 말라 죽는 건 아닌지, 너무 많은 상상을 하게 됐어요.”


홀로 굶어죽는 상상이 절로 들었다는 신애는 느꼈던 감정과 정신적 고통을 우리와 나누려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얼핏 쓸데없어 보였지만, 실질적 의미는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라는 고립감을 이기지 못하지.’


세상과 동떨어져 지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외로움은 정도가 지나치면 고통이 된다.

하물며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느낌을 주는 세상을 만났으니 더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는다.

신애는 이런 감정적 호소를 통해 혼자가 아님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이런 정서적 교류를 무시한 수많은 생존집단에서 다양한 정신질환이 발생했었다.

자살도 문제가 컸지만 생존자끼리의 폭력과 따돌림, 다툼, 분열은 집단을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요소였다.


‘식량과 거처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아는 이들이 너무 많았었지.’


인간은 육체적 안전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정서적인 부분까지 서로를 돕지 못하면 그 집단은 균열과 파괴로 나아가고 결국 모두 죽는다.


“세 분 모두 돌아와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마지막엔 또 운다.

차라리 다행스럽다.

이번에는 신애가 정신병으로 고통 받진 않을 것 같았다.


*


대화를 끝낸 후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일단 식량은 이쪽으로 두고 다른 생필품은 여기에 둬보죠.”


망한 세상의 전리품은 생존과 직결돼있다.

예전에는 사소했던 물품도 지금은 천금처럼 가치가 컸다.


“식량은 열흘에서 아껴먹으면 열사나흘은 버티겠습니다.”


식량을 훑어본 경일의 의견이었다.

쌀과 잡곡, 캔에 들어 있는 반찬, 각종 통조림과 레토르트 식품, 면류와 과자와 간식, 단백질 가루 등을 헤아려본 준기는 생필품으로 시선을 옮겼다.


“건전지를 많이 구해서 다행입니다. 물티슈도 많아져서 좋고요.”


준기의 말에 경일은 생필품 사이에 끼어있는 양주병을 들어보였다.


“귀한 양주가 있어서 좋습니다. 오늘 한 잔 하실래요?”

“흐흐. 그럴까요? 희찬 씨랑 신애 씨는 어때요?”

“전 너무 좋은데요?”

“저도 조금만 마셔볼게요.”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는 술이 제격이다.

물론 과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알콜 중독자들의 세상이 시작된 건 아직은 아무도 모를 거다.’


대한민국은 원래부터 수많은 이들이 술을 즐겼다.

세상이 망한 이후에 그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허기를 면할 목적이나 괴로워서 마시는 사람도 많았고 지나친 긴장이 원인일 수도 있었다.


네 사람은 술을 마시며 각자의 소회(所懷)를 나눴다.

당면한 생존에 대한 논의도 했다.

주제는 자유로웠고 한층 더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됐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신애는 졸린 것처럼 보였다.


“그만 자요. 눈이 벌개요.”


준기는 어떤 대답이 나올 줄 알고 권한 것이다.

역시나 신애는 도리질을 쳤다.


“싫어요. 쓰러질 때까지 앉아 있을 거란 말이에요.”

“허허, 그래요.”


혼자가 아님을 확인받고 싶은 신애는 늘 이렇게 답해왔다.

지금은 혼자서는 생존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세상이다.

끈끈하고 긴밀한 관계 설정은 이 시점에 꼭 필요했다.


“한 병 더 딸까요?”


경일이 이번에는 PET병에 들어 있는 소주를 들어올렸다.

준기는 이때를 기회로 권고했다.


“딱 그것만 마시고 오늘은 그만해요. 술에 취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일부러 세게 말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술로 인해 죽었는지는 준기가 증인이다.

음주로 인한 문제는 많았는데 특히 음주운전과 음주사격, 음주격투는 그 결과가 심각했다.

총기오발로 동료를 죽이고 감염체를 불러들이거나, 술 취한 채 운전하다 사고가 나고 감염체에 뜯어 먹히거나, 몸의 중심도 잡지 못하면서 감염체와 싸우다 죽는 일들은 너무 많이 봐왔다.


“그래요. 그리해요.”

“그럼 아껴 마셔야겠네요.”

“저는 안 마실 테니 남자 분들끼리 드세요.”


준기는 세 사람의 다짐을 듣고 나머지 술을 가방에 담았다.


“모두 약속했으니 이건 다른 날 마십시다. 절대 안 줄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주가 떨어지자 경일과 희찬은 더 마시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술에 브레이크가 없다면 진짜로 죽는다.


“절대 안 줄 겁니다. 절대.”


준기의 강경함에 경일과 희찬은 아쉬움을 표했다.


“아! 마시다 만 것 같아서 아쉽네요.”

“딱 한 병만 더 마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냥 여기까지 하죠.”


이렇게 몇 번만 하면 적절한 음주습관도 정착시킬 수 있다.


‘제발 술은 적당히 마시자고.’


예전 여러 회 차에선 술을 못 마시게도 해봤고 때론 자유롭게도 해줘봤다.

그러다 찾은 결론이 바로 적당량만 마시게 하는 것이다.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 술까지 못 마시게 하면 중첩된 긴장이 사고를 유발한다.

그때였다.


타당! 타앙! 투다다당!


지금 파출소를 점령하고 총을 쏘는 인물도 쌓인 긴장감을 감당 못해 위험을 자초한 사례에 해당한다.


“헉! 이게 무슨 소리죠?”

“이거 총성 같은데?”

“총성이요?”


세 사람은 놀랐지만 준기만 놀라지 않았다.

저 인물이 정신적 한계를 견딜 수 있는 시간은 매번 똑같았다.


‘내일은 총 가지러 가야겠네.’


총성은 그때부터 계속해서 들렸고 30분쯤 이어지다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고작 며칠도 못 견디는 거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광증의 발현은 망한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광증이 대상을 구분하지 못할 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

준기는 아직 두 발의 총알과 멀쩡한 정신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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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장거리 사격술의 귀재 24.09.01 54 2 13쪽
13 부유하는 유령처럼 24.09.01 57 1 16쪽
» 멀쩡한 정신 24.08.31 67 2 13쪽
11 죽은 세상을 비추는 빛 24.08.30 70 3 15쪽
10 신선한 식재료 24.08.29 77 2 14쪽
9 용기와 동지애 24.08.28 79 4 16쪽
8 선을 넘는 순간 +1 24.08.27 98 4 16쪽
7 공포와 용기 24.08.26 108 4 16쪽
6 웃음 그리고 죽음 24.08.25 126 5 16쪽
5 망한 세상의 몸과 마음 24.08.24 130 5 14쪽
4 낯선 사람 +1 24.08.23 148 5 13쪽
3 200년의 지식 24.08.22 171 5 14쪽
2 걸어 다니는 재앙 24.08.22 195 4 13쪽
1 27회 차 아포칼립스 프롤로그, 1화 +1 24.08.22 259 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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