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로환동이 아니라 치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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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
작품등록일 :
2024.08.2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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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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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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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택 - 2

DUMMY

1.



자랑은 아니지만, 이산은 남들에 비해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다 자부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 부모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몇 이나 있을까.


이어 기적적으로 찾아온 낯선 땅에서의 두 번째 기회.


처음으로 부모라는 걸 가져봤으나, 함께 딸려온 가족이란 존재는 유쾌하지 않았지.


분명 사전적 정의로 숙부는 아버지의 형제를 가리키는 단어였을 텐데, 이 세상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 건지 형제는 물론 조카의 심장에 친히 비수를 쑤셔 넣어 주시더라고.


선생에게 고아 새끼라고 비웃음도 들어보고, 가족에게 뒤통수도 당해봤지만, 그럼에도 이산은 아직 살아있다. 나름 정신 멀쩡하게.


그러니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후우...”


맑은 강물을 타고 막막함을 품은 이산의 한숨이 흘러내린다.


스승님께서 보셨다면 ‘사내대장부가 계집애 마냥 굴지마라-’부터 시작해 요즘 젊은이들의 나약함에 대한 훈계를 시작하셨겠으나, 이번만큼은 그녀도 인정해야 했다.


“...”


그도 그럴게, 미세하게 얼룩진 스승의 속옷을 손수 세탁하는 제자의 마음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공감 못 할 테니까.


이제 막 그녀와 함께 생활하는 게 익숙해지던 시절, 그러니까 그녀를 이성으로서 의식하던 시절이었다면 얼굴을 붉혔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벌써 10년 전의 이야기다.


스승과 함께 한 식사가 몇 번이고, 스승과 단 둘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부모나 다름없는 스승의 속옷을 내 손으로 한 올 한 올 만지작거리는 기분이란.


사실, 언덕 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진짜 ‘문제’에 비하면 이것조차 장난일지도.


그도 그럴게-


“날씨가 차가운데.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황녀님.”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자신을 황족의 호위라 자처하는 남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이산의 기억 속과 같은 얼굴, 같은 몸을 한 여인이 이산을 바라본다.


아니, 그의 눈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어제보다 더 밝고, 생기가 넘치는 얼굴일거다.


하지만 다르다.


지금까지 그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봐주던 여인이 ‘현자’ 아린이라면.


지금, 자신을 향해 부끄러움과 의심, 경계심이 뒤섞인 차가운 눈빛을 보내는 건 ‘마지막 황녀’ 아린이기에.


이산은 고민했다.


‘나는, 당신을 누구로 인식해야 할까.’



2.


3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 또는 선택에 대한 후회에 파묻혀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


2류는 도망칠 수 없는 실패에 대한 원인을, 책임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돌리며 화를 낸다.


하지만 1류는-


실패에 대한 후회보다, 책임에 대한 원인 전가보다 더 먼저 실패의 이유와 원인을 확인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낸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파묻히는 게 아닌, 결과를 새롭게 쓸 수 있도록.


그런 의미에서 이산은 1류가 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황녀님, 원래 눈동자의 색상이 붉으셨습니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그림자에 숨어 황족을 수호하는 월영대의 일원이 담당 황족의 눈 색깔도 모른 다라...”


간신히 빨래를 끝마치고 난 뒤, 확인해야 할 게 있다는 이산의 건방진 부탁 아래 마련된 자리.


수 십 년을 사용해왔던 자신의 방이 어색하기만 한지, 불편한 심기를 다 감추지 못한 아린이 경계심 어린 눈빛을 이산에게 보내온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은 이유와 원인이 있듯이, 어젯밤 피를 토한 직후 아린이 낯선 이산의 얼굴에 어머니를 찾으며 오줌을 지렸으니 저렇게 수치심 섞인 경계심을 보이는 역시 당연한 이치.


하나 지금 이산이 주목하는 건 겨우 그런 사소한 인과관계 따위가 아니었다.


“황녀님. 어린 시절의 꿈을 꾸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패왕이 보낸 추격자들로부터 호위들과 함께 도망치고 있었는데, 어느새 호위는 전부 사라지고 남은 건-”


이산은 그녀의 말에 어젯밤의 상황을 떠올렸다.


낯선 표정을 한 아린은 처음엔 걷기도 힘들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억과 이지가 돌아오는 듯했다.


단순한 반로환동이 아니라, 기억의 복원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아니, 더 정확히는 초기화된 기억이 빠르게 동기화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점차 몇 가지 이론으로 정리되는 결과. 하지만 이 과정을 오염시킨 원인이 무엇일까?


이산의 머릿속에는 논리적인 의문들이 빠르게 얽혀 들어간다.


반로환동을 준비하는데 기반이 된 전생 기억들의 신뢰성? 반년 전부터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그것들 모두 진실이라는 걸 확인 한 지 오래였다.


코드로 표현하자면 ‘모든 인간을 반로환동 시키는 코드’. 그게 바로 어젯밤 그가 스승에게 먹인 약의 정체.


준비물에 대한 예상과 실체를 확인했으니 둘 사이의 괴리를 분석한다면, 결국 이유는 두 가지 뿐.



아린에게 심어진 저주가, 그녀의 몸을 헤집고 지나간 패왕의 보구, 흑검 ‘백야’가 전생의 우리 팀이.


창조자보다 더 높은 격을 지닌 무구여서 반로환동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거나-


‘아니면 스승님이 전생의 내가 정했던 플레이어, 그러니까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다거나.’



어느 쪽이든 새롭게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들.


아니지. 지금 이산을 괴롭히는 진짜 불편한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대, 아니 이산이라고 했나요? 혹시 다른 황족에 대한 정보는...”

“죄송합니다. 황녀님. 제게 내려진 명령은 오직 아린 황녀님의 수호뿐이라.”

“괜찮아요. 설령 나 혼자라 해도, 주어진 사명은 반드시 이루어내고 말 테니까.


그 사명이 무엇인지, 이산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북벌. 더 정확히는 그녀의 고향과 가족을 몰살한 패왕에 대한 복수.


‘부끄러운 나날이지. 철 없고, 치기 어린 망상...’


아주 가끔 스승님께서 달밤에 취하시면 내뱉으셨던 과거에 대한 후회.


그 후회를 어려진 아린이 반복하려 한다.


수 십 년, 아니 어쩌면 수 년 뒤 후회 할 선택을.


솔직히 말하면 그 가능성조차 의심스러웠다.


강한 척, 어른스러운 척 허리를 곧게 펴봤자, 이길 엄두가 나지 않던 스승님과 달리 지금의 아린은 빈틈 투성이어서.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지.


현자 아린의 하나 뿐인 제자이자, 마음만큼은 그 누구보다 아린을 지키고 싶은 한 사람의 무인으로써.


힘으로라도 그녀를 잡아 이 산에 가둬놓는 게 옳은 일 아닐까?


귓가로 들려오는 속삭임에 대해 이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침묵도, 부정도 모두.



3.


갑작스러운 기침에 잠시 나가보라는 말을 듣고 방 밖으로 나선 이산을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았다.


단풍이 진 산의 풍경을.


“기억나는군.”


이곳에도, 저곳에도 스승님과 함께 한 추억이 묻어있다.


이 땅에서 이산은, 낯선 세계에 던져진 이방인은 많은 걸 배웠다.


단순하게는 몸을, 검을 다루는 법부터 시작해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이 세상에 어울려 살아가는 법까지.


드넓은 산 속, 추억이 묻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르리라.


하지만 지금의 아린에게 이 땅, 외로운 산맥은 잠깐의 도피처이자 곧 떠나야 할 장소에 불과하겠지.


그걸, 그 사실을 이산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인정하자. 스승을 위해서라는 역겨운 위선은 집어치우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 강제로 저 방 안에 가둬둔다? 어차피 지금 같은 속도라면 머지않은 미래, 그녀는 본래의 기억을 완전히 되찾을 테니 그때까지만? 지랄 같은 소리다.


그냥 싫으니까.


자신이 아니라 복수니, 대의니 따위에 눈이 먼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짜증났으니까.


“...콜록...콜-”


그닥 이상한 감정도 아니었다.


애초에 스승을 되살리겠다는 계획부터가 스승의 의견 따윈 담기지 않은, 오로지 스승과 더 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이산의 이기적인 욕망에서부터 시작됐으니까.


그러니까-


“큽-! 하아, 흐으읏-!!”


문틈으로 전해진 그녀의 신음에 충돌하던 양심과 욕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소리친다.


당장 움직이라고.


그리고 그 감정이 명령하기도 전,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인 이산이 문을 열고 본 건-


“흐으...흐으윽...!”


무너진 아린의 입에선 피도, 무엇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저 흐트러진 아린의 쇄골 아래, 가슴 위로 드러나는 검은 실선. 그 비현실적인 현상만이 이산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그는 안다.


저 이질적인 상처를. 저런 상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그건-


/무섭다 무서워. 백야의 저주를 받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고통을 완화 시킨 저 현자도 독한데, 끝끝내 저주를 되살려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스럽게 만들다니. 축하하마. 내 주인이여. 저 현자 아린에게 상처를 입힌 인간은, 그것도 그 백야로 결코 회복 시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건 네 놈이 두 번째구나./


귓가를 간지럽히는 비웃음이 답답함에 뜨거워졌던 이산의 머리와 가슴을 차갑게 식힌다.


“...천격. 너-”


천격. 또 다른 이름은 ‘오만’


백야와 함께 이산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주인에게 홀로 군대와 맞설 수 있는 힘을 얻게 한다는 패왕 미르노크의 살아있는 일곱 무구 중 하나인 동시에-


/말했잖느냐. 네 녀석은 그 자와 다를 게 없는 인간이라고. 그 누구보다 패왕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손자인 너는 말이다./


이산의 심장에 박힌 채, 매 순간 이산의 핏속에 흐르는 죄를 일깨워주는.


그가 패왕의 손자이자, 결코 아린과 같은 미래를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각인 시켜주는 죄의 증명.


그 살아있는 범죄 기록이 이산을 비웃었다.


증오스러운 남자의 막내 손자를.




작가의말

독자분들은 물론, 주위 분들 역시 모두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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