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로환동이 아니라 치매셨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기하학
작품등록일 :
2024.08.25 00:46
최근연재일 :
2024.08.27 02:30
연재수 :
5 회
조회수 :
58
추천수 :
0
글자수 :
21,800

작성
24.08.26 01:18
조회
6
추천
0
글자
12쪽

마지막 선택 - 3

DUMMY

1.


‘그 누구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십니다.’




젖먹이 시절부터 아린을 돌봐준, 어머니보다 더 의지했던 유모의 말에 어렸던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래야 하냐고. 왜 나는 사람을 믿으면 안 되냐고.




그러자 유모는 대답했다.




황녀님께 깃든 축복은, 그 힘은 사람의 욕망을 충동질시켜 위험하다고. 당신에게도, 상대에게도.




당시의 그녀는 이해를 잘 할 수 없었다.




밤마다 아린을 괴롭게 만드는 그걸 왜 욕심내는지도 그렇고 그 말대로라면 자신은 누구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도 그렇고.




그래도 어린 아린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기에 납득하지 못했다 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어린 소녀의 의문은 금방 해결됐다.




누구보다 믿던 유모가 자신에게 독을 먹이려다 발각됨으로써 증명했으니까.




‘하, 한 번만 살려-’




주륵 주륵 비가 내리던 그 날, 어머니 같던 그녀가 추한 얼굴로 아린에게 구원을 바랬을 때. 그녀는 분명-




“-핫...”


“기침하셨습니까.”




과거의 망령에게서 벗어난 아린이 쏟아지는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자 그 남자가 보인다.




뻔뻔한 얼굴로 자신을 월영대라고 소개한 남자, 이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게 수도의 성문이 패왕의 검 앞에 무너졌을 때, 월영대는 황족을 수도 밖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전원 희생을 자처했거든.




사실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상대도, 아린도.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으니.




“미안하네요. 부끄럽게 타인 앞에서 몇 번이고 정신을 잃다니.”


“황족을 지키는 게 저희의 의무. 사람이 아닌 도구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도구라. 말이야 납치 및 세뇌를 통해 완성되는 그 치들이 할 법한 이야기지만, 저 남자의 존재감. 무인들이 흔히 기세라고 부르는 그것은 결코 도구가 가질 법한 그런 게 아니라.




행동도, 시선도, 말투도 모두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태생적인 그것은 숨기는 게 한계가 있는 법. 호랑이가 토끼의 흉내를 낸들, 그 냄새마저 가릴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자 찾아온 거죠?”


“일단, 죄송하단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황녀님. 대화란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저는 처음부터 거짓과 기만으로 관계를 시작했으니. 대화가 될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월영대도 아니고, 동부인조차 아닙니다.”




그렇겠지. 애초에 얼굴부터 전형적인 북부인이신데. 아린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진심입니다. 황녀님을 제 몸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제 진심만큼은.”


“그런 열렬한 고백은 인생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운데. 왜죠?”


“당신의 존재자체가 패왕의 역린이기 때문입니다.”




패왕이 왜 패왕이라 불리는가.




동대륙과 서대륙 그리고 북대륙.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루어진 이들 사이의 균형을 사실상 홀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한때 동대륙의 반절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패왕이 점찍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와 함께 황실이 몰살당한 북연 왕조.




한때 대륙에서 가장 번성했다는 북연의 수도가 폐허로 변하고, 그 위에 북부인들의 전진기지가 들어선 순간, 세상의 질서는 패왕과 그의 후계자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됐다.




그런 상황에서 북연의 후예가, 몰살당했다 알려진 후손이 모습을 드러낸다?




패왕 본인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겠으나, 패왕의 추종자들은 그렇지 못 할 수밖에.




“전설이 된 패왕이 갑작스럽게 칩거에 들어선 지도 어느덧 수십 년. 공포에 자유를 팔아넘겼던 동대륙의 주민들도 하나 둘 반역의 씨앗을 품기 시작했고 서부인들 역시 북부를 견제하기 위해 움직이는 상황에서 북연의 후예는 산불을 일으킬 불씨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불씨도 산불도, 결국 산을 무너뜨릴 순 없는데. 당신은 왜-”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공손한 모습이 가면이었다는 듯 오만한 대답이 돌아왔으나 아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만함 아래 가려진 질척한 감정은 최소한 패왕, 더 나아가 북부에 대한 이산이란 남자의 진심을 증명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패왕의 치세가 이어지는 동안 북부인을 가장 많이 죽인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패왕 본인과 그 후계자들이라고 했으니.




“그 원한도, 당신이 내게 보이는 태도의 이유도 알겠어요. 하지만 북부를 적으로 돌린 다는 건 장난으로, 흐읏-!?”




갑작스럽게 아린의 가슴께를 찌르는 강렬한 고통.




뒤이어 문 밖에서 불어오는 불길한 바람.




또다. 모든 게 불타던 순간 새겨진 수많은 저주 중 하나가, 그녀와 함께 후방으로 도망치던 호위들을 하나 둘 씩 잡아먹었던 그 지긋지긋한 저주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노리고 찾아온다.




동시에 그 저주를 새긴 남자의 목소리 역시 기억 속에서 떠올라 아린의 귓가를 어지럽히니.




‘흥미롭구나. 검에 찔리고도 살아있다니. 재밌어.’




뒤이어 남자는 말했다. 그녀가 죽거나, 그 새카만 검이 부러지거나, 또는 그녀가 스스로 저주를 이겨내기 전까지 아린은 영원히 쫓기는 신세일 거라고.




이는 저주인 동시에, 이겨낸다면 너를 성장시켜 줄 원동력이 될 거라며-




“개소리...”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문 밖으로 나온 그녀를 반기는 짙은 안개와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들려오는 늑대들의 울음소리.




“저주군요.”


“잘 아시네요. 그럼 빨리 가세요. 당신도 휘말리기 전에.”


“이상한 소리십니다. 도구가 어찌 주인의 곁을 떠난단 말입니까? 잡것들은 제 선에서 정리 할 테니. 고귀한 분께선 편히 쉬시지요.”


“지금 그런 장난을 칠 때가-!?”




더 이상 자신을 지키다 누군가가 죽는 꼴을 보는 건 지긋지긋하단 아린의 외침을 비웃듯 퍼진 안개는 초가집을 집어 삼킨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저 평온한 표정이란.




답답했다. 북부를 적으로 돌린다는 걸 보면 실력에 나름 자신이 있는 자인 것 같으나, 저 저주는 달랐다.




“이 멍청이가, 제 뒤로 오세요!”




그 끔직한 검은 칼날이 남기고 간 저 저주는, 아린이 물려받은 축복을 제외한 그 어떤 공격에도 통하지 않았기에.




원치 않았다 해도 그녀는 축복의 주인. 그에 대한 책임 역시 그녀에게-




“잠깐, 내 말 안 들리는 거예요? 공격이 안 통하니까 어서 내 뒤로, 이런!”




얌전히 여자 치마폭에나 숨어있지, 자존심 부리며 제 발로 기어 나온 멍청이를 응징하겠다는 듯 안개 속에서 나타난 새카만 늑대가 이산의 등 뒤에서 목덜미를 향해 송곳니를 들이밀고.




당장이라도 붉은 피가 아린의 두 눈을 어지럽히려는 찰나.




다급히 예열 중이던 축복을 일으키려던 소녀는 곧 이어 벌어진 현실에 사고가 정지했다.




“,,,아?”




사라졌다. 아니, 증발했다.




그녀를 지키던 왕실 호위들조차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못해보고 유린당한 그 괴물이.




검조차 뽑지 않은 이산에게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하지 못한 채 증발했다.




어떻게?




그에 대한 정답은 곧 알 수 있었다.




/크르륵-!!/




방금 건 장난이었다는 듯 다시 한 번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네 마리의 늑대들.




여유 따윈 주지 않겠다는 듯 사방에서, 그것도 비열하게 코앞에서 튀어나와 순식간에 접근해오는 그 비열한 기습.




하나 일말의 조급함도 없이, 그저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이산이 검을 뽑은 순간-




-!!



푸른 뇌광이 이빨을 드러낸 칼날을 타고 뿜어져 나와 모든 걸 무로 되돌린다.




그림자에서 태어난 괴물이 아무리 빠르고, 민첩하다 한들 반짝이는 불빛 앞에 무력했으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께서는 편히 쉬고 계시면 된다고. 이 주제를 모르는 잡것들은 소신이 마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안개 속으로 사라진 이산의 뒷모습에 아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그녀의 이해 범주 밖이었으니까.




하나 그런 소녀의 혼란을 비웃듯, 다시 한 번 안개 너머에서 푸른 번개가 요동친다.




방금 전은 장난이었다는 듯 천둥과 함께 내리쳐지는 푸른 벼락은 소녀를 조금씩 좀먹어가던 어둠과 안개를 불태운다.




저주 역시 무력하게 사라지지 않겠다는 건지 안개 속이 꿈틀거리며 수백은 거뜬히 넘을 법한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저 안개 너머로 몰려들었으나-




쿵-!!




하늘에서 내리치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 모든 게 무너진다.




제 아무리 파도가 몰려와 본들, 하늘을 넘볼 수 없다는 듯.




그녀를 괴롭혀오던 악몽도, 안개도. 늑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가 걷히고 본래의 아름다움을 찾은 산자락 너머.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평온한 모습의 이산은 깨진 거울 파편을 손에 담은 채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검은 칼을 든 그 평온한 북부인의 모습은, 마치 그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백야. 그 검. 백야 맞죠.”


“운 좋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황녀님.”




운 좋게? 다른 것도 아니고, 패왕이 사용했던 일곱 보구 중 으뜸이라 불리며 질투를 담당하는 그 마검을 운 좋게 얻었다고?




조금씩, 하나 둘 이해가 간다. 방금 전 그 번개. 그건 필시 일곱 보구 중 ‘오만’의 별명을 가진 그 단검의 권능일터.




단 하나조차 다루기도, 얻기도 힘들다는 보구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운이 좋으시다니까. 아린은 납득하려고 노력했다.




“이상하군요. 그게 중요합니까?”


“...무슨 말이죠?”


“갑작스럽게 낯선 장소, 시대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이. 당신을 지키겠다는 남자가 대륙 전역에 흩어진 패왕의 일곱 보구 중 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냔 말입니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린이 알아야 할 건 딱 세 가지니까.




하나. 남자, 이산은 패왕과 북부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다.




둘. 이산은 패왕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홀로 소국과 맞설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




마지막 황녀 아린은 그 어떤 위험을, 이산이라는 위험분자의 손을 잡아서라도 패왕을 무너뜨리고, 고향을 되찾고 싶다.




“나는, 나는-”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 위험을 감수하고 다신 오지 않을 기회를 잡느냐, 잡지 않느냐.”




아직 현자가 되지 못한 소녀에게, 이산은 거부 할 수 없는 제안을 내던졌다.




내가, 패왕이 가졌던 힘의 일부를 재현 할 수 있는 내가 당신의 검이 되어주겠다고.




당신의 꿈을, 무너졌던 북연의 깃발을 당신의 이름 아래 되찾겠다고.




무턱대고 수락하기엔 수상한 부분도, 상식적으로 위험한 부분도 너무 많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나 달콤하고, 매력적인 대가였기에.




“...내 선택은-”




2.




수 십, 수 백 번의 고민과 번뇌에 지친 아린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이산의 귓가에 작은 천둥이 울린다.




/대단해. 대단하단다. 애송아. 스승이 어려졌다고 곧바로 거짓과 협박으로 선택을 강요하다니./


“나는 진실 된 조언만 했을 뿐입니다. 천격.”


/그래. 틀린 말은 없지. 그러시겠지. 하여간 이래서 친구 하나 없는 놈은./


귓가를 울리는 시끄러운 천둥소리에 이산은 자연스레 귀를 닫았다.




그야 자신은 사실만 말했을 뿐이니까.




패왕이, 북부가 증오스럽다는 것도 사실이고, 아린의 꿈을 도와주겠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자신의 진짜 목표를 말해주지 않았을 뿐.




영혼.




이산에겐 저주의 시작이자 유일한 해결책인 ‘백야’에게 먹일 영혼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어느 정도냐면-




“전쟁. 그것도 세 개의 대륙이 각자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총력전을 벌인다면.”




스승의 저주를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


작가의말

독자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며, 다 읽으셨다면 스트레칭 한 번 씩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반로환동이 아니라 치매셨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어머니 건강 호전에 따른 리메이크 24.08.29 5 0 -
공지 119 안에서 시작해 응급실에서. 그리고 병실에서 끝마친 글. 24.08.25 13 0 -
5 마지막 선택 - 4 24.08.27 4 0 10쪽
» 마지막 선택 - 3 24.08.26 7 0 12쪽
3 마지막 선택 - 2 24.08.25 13 0 10쪽
2 마지막 선택 - 1 24.08.25 16 0 16쪽
1 0. 선택의 이유 24.08.25 19 0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