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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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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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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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DUMMY

문이 부서진다.

원체 낡은 문이었기에 몇 번의 두드림에도 힘없이 부서진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부서진 잔해들 너머를 쳐다본다.

그곳에는 낡고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는 무뢰배들이 몇십 명인가 서 있다.


「여어, 꼰대. 반가워~?」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그러나 남자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태연한 얼굴로 청년들을 맞이한다.

혹시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불청객들이 올 것이라고 예언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렇네.」


남자의 말에 청년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 내부를 둘러본다.

이미 엎질러진 물, 혹시 모를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어차피 볼 것 없는 집인데 어째서 그렇게 쳐다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앉아 있다.

좁고 비루한, 한 사람이 살기에도 부족할 것만 같은 곳.


「그래.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거든.」


「꼰대치고는 잘 생각했는데! 안 그러냐, 얘들아!」


청년의 말에 온 무리가 헤픈 웃음과 함께 그를 조롱한다.

이 수와 이 무기들이라면 그를 해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것이 자신들의 패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낡은 칼과 조잡한 단창, 그리고 낫과 같은 농기구들이다.

남자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무기들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느낀 듯했다.


「흥미롭군.」


그렇기에 남자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답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고작 그런 것으로는 자신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듯이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그의 손에 들려있는 도끼를 목격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미친... 왜 저딴 게 여기 있는 거야?!」


그 어떤 무기라도 부러뜨릴 것만 같은 거대한 도끼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그가 들고 있는 도끼는 적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든든한 방패이자 잘 벼려진 명검이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정체라. 나는 그저 광부일 뿐일세.」


청년들의 말에 남자가 자조하는 투로 중얼거리며 그들을 쳐다본다.

그 눈빛에 담겨 있는 감정은 대체 무얼까.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는 아마 없겠지.

감정이 있는 한낱 인간 따위가 알아서도 안 된다.


「야, 됐으니까 저 새끼 족쳐! 우리 쪽수로 저런 늙다리한테 지진 않겠지!」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와 함께 청년들의 무리가 집이 무너질 기세로 비집고 들어온다.

그 모습이 조그마한 웅덩이 속 구정물 같다.

그러나 그것으로 거대한 바위를 깎아낼 수는 없는 법.


「애석하군.」


남자의 도끼는 신벌처럼 허공에서 번쩍이다가 그들을 향하여 춤춘다.

무리의 청년들이 내지른 무기들은 부러지거나 휘어졌고, 그와 함께 몇 명의 손끝이나 발끝이 잘리기도 했다.

손과 발이 아닌 손끝과 발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들은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들을 제대로 상대하지 않고 있다.


「이, 이 자식...!」


「우리를 우습게 보고 말이야...!」


남자의 말에 두 청년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감히 그에게 접근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베어낼 수 있었다.

다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자신의 죄를 참회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정말로 우습게 보았다면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았을 걸세.」


「이 새끼가...!」


「뭐라고 말해도 좋네. 어서 결론이나 내어 주게. 자네들도 다치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쩌면 하늘이 주었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기회.

그러나 청년들에게는 물러난다는 선택지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다.

알량한 한 줌의 자존심이 그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남자를 이길 만한 힘과 기술이 없고, 믿었던 친구들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은 얼마 없을 터.

하지만 독 안에 든 쥐는 고양이가 무섭지 않다는 속담이 괜히 있지는 않았다.


「이 새끼, 감히 우리들을 무시해? 좋아, 진짜로 무서운 걸 보여주지!」


독 안에 든 쥐가 선택한 것은 불.

불이 붙었다간 금세 녹아내릴 것만 같은 허름한 오두막을 인질로 삼고, 청년들은 사악한 웃음과 함께 횃불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누가 보기에도 추하고 인간답지 못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미 쥐가 되어버린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으악!」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남자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와 함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고, 청년 중 조금 더 껄렁한 쪽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도끼로 해치웠다기에는 너무나도 깔끔한 절상.

하지만 묻어있는 피를 보아서는 그것으로 일격을 가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 무슨...」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거라네, 젊은이. 하지만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다면 나도 별수가 없어.」


「이 자식이 미쳤나...!」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그 소리에 횃불을 든 청년의 손이 떨린다.

하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가, 가까이 오지 마! 확 싸질러 버린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무서워도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언제인지 판단하는 것은 본인의 몫.

그리고 애석하게도 청년은 지금이 그때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에잇, 이판사판이다! 너 죽고 나 죽자!」


「애석하군.」


남자의 말은 짧고 굵었다.

그리고 횃불이 오두막에 닿아 불이 번지기 직전에 그는 청년의 팔을 깔끔하게 잘라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실.

청년에게 그 상실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으, 으아아아아아!!」


「소리가 크군.」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리고 청년의 비명은 끝없이 높아지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도끼의 날에 검붉게 달라붙은 혈흔을 닦아내었다.


「흠, 이제 어떻게 한다.」


조금 전까지 생명체였던 것들이 가고, 남은 것은 선혈과 살덩어리들이 넘실대는 바닥뿐.

주사위는 던져졌고, 그는 선혈의 웅덩이를 건너야 한다.

하지만 이 웅덩이를 건너고 나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그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아, 그렇지.」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결정했다는 듯이 봉인해 놓은 지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복도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실.

하지만 남자는 모든 길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음.」


그리고 도착한 방.

크리스틴은 낡은 침대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 그리고 그 어떤 일도 알지 못한다는 듯이 고요히 자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이 그녀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화의 공간인지도 몰랐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군.」


그러나 남자는 이곳을 버려야 한다.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을 또 한 번 느끼며 버려야만 한다.

아니,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 맞는 걸까.

그의 뒷모습에는 한 줌의 쓸쓸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고,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분명히 이쪽이었을 텐데...」


남자는 한쪽 어깨에 잠든 크리스틴을 둘러업는다.

그리고 지하실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 자루에 넣는다.

이제 할 일은 빠른 속도로 오두막을 빠져나오는 일.

달도 가려져 사람이 없는 골목에서는 그런 그의 모습이 아무런 수상함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 여기 있군. 조금 헤맸지만 찾아서 다행이야.」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한 골목길의 앞에서 남자는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듯이 한 폐가 앞에 멈춰 섰다.

미리 보아두었던 곳일까, 잠시 안을 살피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머무는 곳인지 세차게 바람이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남자는 애초에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어디 보자, 화구가... 아, 여기 있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화덕자리에 모닥불을 피울 것들을 찾아 쌓기 시작하는 남자.

적당히 불을 지필 것들을 쌓자, 그는 능숙한 솜씨로 불쏘시개에 불을 피우고 화구에 집어넣었다.

천천히 피어오르는 따스한 온기.

그 시간 동안 남자는 크리스틴이 누울 공간을 다듬고 담요를 깔기 시작했다.


「으음...」


남자의 품이 불편한지 작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이는 크리스틴.

그 작은 움직임에 남자는 하던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는 담요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따스한 불의 온도.

잠자리가 그다지 편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추위에 떨지는 않을 것이었다.


「미안하게 됐구나, 크리스틴.」


하지만 잠든 크리스틴에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혹시 그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그는 오늘에야 크리스틴을 만났을 것이었고, 방금의 사단은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 눈가에 눈물을 살짝 보이는 걸까.


「미안하다.」


그리고 왜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걸까.

어째서 그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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