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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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휘(消諱)
작품등록일 :
2024.08.31 23:25
최근연재일 :
2024.09.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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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해 놓았던 나뭇짐을 들고 오두막으로 가는 길.

주변의 숲은 생령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남은 것이 없다.

이렇게까지 힘을 과시할 필요는 없었을 터다.

남자를 위협하려고 했다면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터다.

그러나 생령은 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아무렇게나 화풀이했다.

그것이 전능한 자의 대리인이 할 짓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남자는 키르케의 마술에 가려져 완벽히 모습이 감춰진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린다.

다행히도 키르케의 오두막은 그 난리통에도 별 타격은 입지 않은 듯했다.

다만 크리스틴은 오두막 구석에서 귀를 막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불안에 떨며 남자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다, 다행이다...!」


남자의 모습이 보이자 크리스틴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다.

밤을 홀로 지새운 끝에 어두운 세상을 뚫고 밝아오는 태양처럼 환해진다.

그 모습에 남자는 죄책감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숲이 완전히 폐허가 될 정도의 일이었으니 괴성이 들리는 것이 당연할 터.

까딱 잘못했으면 소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이 크리스틴을 겁에 질리게 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자신을 조금 굽히면 되는 일이었다.

생령이 뭐라고 하든 웃어넘기면 되는 일이었다.


「다녀왔네.」


그러나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말해야만 하는 것을 말하고, 외쳐야만 하는 것을 외치는 자.

그는 용사의 자격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될 자격은 없다.

소중한 사람마저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자는 그럴 자격이 없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에 제 몸을 밀어 넣는 자는 아버지가 되어선 안 된다.

그것이 용사와 아버지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다.

양립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수고했어.」


그리고 또 한 사람.

남자가 사과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없을 때 크리스틴을 보살핀 사람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마녀라고 불러도 그만큼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그에겐 소녀 다음으로 소중한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럴만한 일을 하지 않았소.」


「내가 보기엔 그럴만한 일을 한 거 같던데.」


키르케.

마술로 수많은 사람을 현혹한 여자.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점의 육지를 터전으로 삼아 수많은 해적을 역으로 노략질한 여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이름 모를 바다 어딘가에 떠 있는 배에서 생을 마쳤을 여자.

남자는 키르케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의 자신은 그녀를 사로잡았던 한 남자와 다르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렇게 의기소침하지 않아도 돼.」


「키르케.」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러나 마녀는 알고 있다.

마녀이기에 알고 있다.

남자의 상처난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알고 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다.

남자가 잘못한 것을 굳이 찾자면 폭압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일 터다.

무력을 써서라도 전능한 자의 대리인을 멈추게 하지 않은 것일 터다.


「나는 더 바라지 않아.」


하지만 그 생령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도끼를 들고 생령을 막아 세웠다면 숲을 지킬 수 있었을까.

크리스틴의 고향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막아 세우는 데 성공했더라도 대리자의 화만 부추기지 않았을까.

이 오두막까지 푸른 빛에 휩싸여 불타게 하지 않았을까.

남자는 수많은 가정에 둘러싸여 복잡해진 머리의 창으로 키르케를 쳐다본다.

참과 거짓, 정리와 정의, 명제와 가설을 분간할 수 없는 얼굴로 여주인을 바라본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갈 사람을 응시한다.

그 시선에 키르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응답한다.


「당신을 잃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를 잃어 본 적 있소?」


「나도 인간이야. 부모님도 계셨고, 그리고...」


그러나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나 보다.

남자의 질문에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나 보다.

남자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는 듯이 천천히 한숨을 내쉰다.

시시콜콜한 것을 물은 자의 잘못이라는 듯이 입을 연다.


「미안하오. 내가 괜한 것을 물었구려.」


「아니, 괜찮아. 언젠가는 말했어야 하는 거고, 당신한테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거짓말이라.」


키르케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이라는 단어.

그 단어 앞에 남자는 천천히 크리스틴을 쳐다본다.

어느새 자신에게 물들어버린 순수를 보며 한숨을 짓는다.

그녀 앞에서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옛이야기의 용사처럼 당당하고 늠름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여름 밤의 꿈.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하얀 연기만이 남는 형체가 없는 유령.


「거짓말을 해도 괜찮소. 나 또한 거짓말쟁이니까.」


「무슨 거짓말을 했어?」


「크리스틴 양과 내가 부모 자식 간이라고 했소.」


「흐음.」


「두 번이나 그랬소.」


고해성사를 할 사람이 없다면 만들면 그뿐.

남자는 마녀에게 자기 죄를 고하고 눈을 감는다.

그 어떤 벌이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눈꺼풀을 닫았다.


「크리스틴을 위해서였잖아.」


하지만 키르케는 남자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남자는 이곳에 두 발을 붙이고 있지 못했을 거다.

한낱 마녀의 앞에서 고해성사 따위를 하고 있지도 않았을 터다.


「거짓말은 가끔 진실보다 나을 때도 있다고.」


「나는 용사답지 못한 짓을 한 거요.」


「용사라고 해서 진실만을 이야기할 순 없잖아.」


그렇기에 키르케는 다시 한 번 남자를 위로한다.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치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남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마술로는 닿지 않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깨끗이 닦아낸다.

헌신적인 간병인처럼 주무르고 약을 바른다.

다시 한 번 용사가 되어 날갯짓할 남자의 모습을 위해 위무한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알겠지?」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군.」


「그야 당연하지.」


그 모습이 남자에게 나쁘게 보일 리가 만무하다.

마녀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한 사람의 인격체로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내면에 담긴 조금은 순수하지 못한 의도도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다.

남자는 여자를 만난 지 오래되었고, 여자는 남자를 만난 지 오래되었다.

의지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아득한 세월만 흘려보냈다.


「나는 당신을 믿고 있는걸.」


「고맙소. 크리스틴 양을 더 많이 가르쳐주시오.」


「내가 배워야 할 입장인걸.」


그 시간이 있었기에 서로를 믿을 수 있다.

배신당하고 핍박받은 시간을 지나 서로를 만난 이 순간이 더없이 값지다.

북쪽숲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더욱 가벼워질 터다.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한다고 해도 서로가 있다면 감내할 수 있을 터다.

아니, 북쪽숲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없다.

남자에게는 꼭 이루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

죽더라도 해내야만 하는 용사의 운명이 있다.

이루기 전까지는 죽지 못할 과업이 있다.

그렇기에 키르케가 필요하다.

그녀가 마녀이기에 필요하다.

남자가 앞서 나가면 그 뒤에서 크리스틴을 지켜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에겐 마술을 가르치지 않을 거구.」


「그런가.」


소녀에게 마술을 가르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녀와 같이 있어주면 된다.

남자 자신이 있어주지 못하는 만큼 있어주면 된다.

물론 그가 옆에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그러니 차선을 선택하는 거다.

그를 배신하지 않으면서 크리스틴도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선택한 거다.

키르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그 몸으로 이미 증명했다.

더 증명하지 않을 정도로 증명했다.


「저기, 당신의 이름...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이름이라.」


「응. 나는 당신의 이름을 당신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


그리고 이제는 남자가 증명해야 할 차례다.

그가 키르케를 믿고 있음을 밝혀야 할 차례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입증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일 터다.

그 누구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을 밝히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터다.


「미안하네. 그럴 수 없네.」


하지만 남자는 그 간단한 수단을 취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너무나도 당연한 근거가 있기에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름이 없네.」


이름 없는 자.

수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할 자.

흙으로 덮어버릴 이름자 하나 없는 자.

그것이 용사라고 불리는 자의 실체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용사의 비밀이라면 비밀이다.


「대체...」


키르케는 그 사실을 목도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쳐다본다.

남자는 그 눈을 직시하고 씁쓸하고 공허한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자기가 가장 잘 웃을 수 있는 표정으로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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