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의사는 영원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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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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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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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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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 유노가 되다 (1)

DUMMY

병원은 부활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나도 어릴 때는 이 말을 보고 웃었었지. 설마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근데 있었다. 너무 많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병원 말단 인턴 나부랭이일 때도 나를 붙잡고 가족을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살리고 싶어 내과 레지던트가 되었을 때 가망이 없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말을 1주일에 몇 번씩 들었다. 그게 마음에 밟혀 죽도록 노력했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웠고 몇 번을 쓰러졌다. 다른 레지던트들은 나를 바보라고 했다. 나를 가르치던 교수들도 나를 바보라고 했다. 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외쳤다. 나를 믿어보라고.


그러나 그들이 옳았다. 나는 바보였다. 지식만 그득 찬 바보. 내가 살리겠다고 말한 사람 중 정말로 살린 사람은 열에 하나는 됐을까?


시간이 지나 시험에 통과하여 내과 전문의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너무나도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죽을 사람은 죽는다. 이 사실이 나를 더욱 냉소적으로 만들었다. 군대에 다녀와서 대전의 종합병원에 취직했을 때, 나는 병원의 어떤 의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빠르게 환자의 죽음을 준비했다. 환자의 가족들은 나에게 환자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내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들을 살릴 수 없다는걸. 그리고 그걸 가족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칼같이 그들의 말을 쳐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불가능이란 존재하니까.


그 모든 게 지금에 와서는 약간 후회가 된다. 왜냐고? 내가 배에 칼을 맞았으니까. 그것도 죽은 환자의 가족에게. 약간이나마 더 따뜻하게 말했으면칼에 맞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차라리 내 열정이 부족했더라면 내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쿨럭”


배에 난 구멍으로 피가 점점 새어 나온다. 이 정도 양이면 동맥이 찔린거같은데.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무조건 죽는다. 흐려지는 눈앞으로 지금까지 치료해왔던 환자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 저 때는 저랬으면 좋았을걸. 저렇게 처치하면 안 됐는데. 후회만 가득한 인생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의사는 하지 말아야지.


나는 눈을 감았다.


-----


- 김은호 씨. 일어나세요


어? 나 살았나?


- 아니요. 당신은 죽었습니다.


그래. 역시 죽었구나···아니, 그럼 지금 나는 누구랑 말하고 있는 거지?


나는 몸을 일으켰다. 살 수 있는 출혈이 아니었으니 죽는 건 당연한데... 여긴 사후세계인가?


- 엄밀히 말하면 사후세계는 아닙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나는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니 밝은 빛무리가 뭉쳐있는 게 보였다. 정체가 뭘까.


- 저는 신입니다.


신이라 그런지 내 머릿속을 읽고 있다. 하긴, 이 정도는 가능해야 신이겠지? 근데 생각만으로 대화가 이어진다는 건 의외로 기분이 나쁜데···


“신님...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어떤 제안을 한다는 걸까. 살려줄 테니 신의 가르침을 널리 퍼트려라.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이미 교회나 성당은 넘쳐날 정도로 많으니까.


-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당신의 의술로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세요.


고통받는 세계라는 건···아프리카 같은 제 3세계를 말하는건가? 그런 곳에 사람을 보내려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 아프리카에는 제가 굳이 안가도 되지 않을까요?"

- 지금까지 김은호씨가 살던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가게 될겁니다. 김은호씨가 살던 대한민국에서 '판타지' 라고 부르던 세계를 상상하시면 됩니다. 아, 걱정마세요. 김은호씨의 지식을 사용하는데는 문제가 없을테니.

“그럼 혹시 제가 이 제안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할 만한 제안이다. 이게 현실이던, 아니면 죽기 직전의 환영이던 자신을 살려준다는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다시 한번 의사 노릇을 하는 거라면? 나는 이미 지쳤다.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도,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꺾어버리는 것도. 그 과정을 수십, 수백번 반복하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


- 제안을 거부한다면 순리대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거의 죽었는데도 죽는게 무섭다니. 스스로가 우습다. 신은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다른 제안을 해왔다.


- 그럼 이건 어떤가요? 한 달만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겁니다. 의술을 펼칠 필요도 없습니다. 정확히 한 달 후, 그대가 결정하는 겁니다. 영면에 들지, 의술을 펼칠지.


나에게 너무나 유리한 제안.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나에게 해가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동안 일한다고 여행도 제대로 못 가봤는데 이 기회에 한 달 천천히 즐기면 되는 거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알겠습니다. 신님의 말씀이니 믿어야겠죠. 딱 한 달만 살아보겠습니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 달 후에 다시 뵙죠.


서서히 어둠이 내려온다.


-----


나는 낯선 공간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여기가 신이 말한 새로운 세계? 주변을 둘러보니 흔히 보던 벽지가 발린 벽이 아닌, 돌로 만들어진 벽이 보였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도 짚단에 천만 덮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큭!”


주변을 정확히 파악할 새도 없이 갑자기 두통이 밀려온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다. 정보가 폭포수같이 쏟아져 들어온다. 머릿속이 터져나갈 듯한 감각과 함께 마치 영화를 보듯 누군가의 인생이 눈앞에 떠오른다.


유그노아 페르귈라 페스카라. 7살. 페스카라 공국의 왕자. 왕자지만 귀족인 공왕과 평민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왕위 계승 서열은 높지 않다. 남자 형제가 없다면 모를까 위로만 6명이 있어 견제도 받지 않고 생각 없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인다.


15세의 유그노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슬픔이 가득차 흘러나온다. 마음이 순수한 유그노아는 온몸의 물을 모두 쏟아낼 것처럼 펑펑 운다.


17세의 유그노아. 공왕에게 사제가 되라는 명을 받는다. 사실상의 축객령. 뒷받침되는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그노아는 순순히 명을 받든다. 정든 성을 한번 돌아보고 공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마한 수도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탄다.


27세의 유그노아. 제국의 북쪽 변방에 위치한 자그마한 수도원에서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 펑퍼짐한 흰색 수도복을 입고 밭을 가꾼다. 농사를 짓기에는 척박하지만, 수도원에 있는 인원이 먹을 정도의 양식은 얻을 수 있다. 어느 날은 밭을 가꾸고 어느 날은 가축들을 돌본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태양 빛에 그을려 피부색은 구릿빛으로 변했지만 따뜻한 표정은 그대로다.


마지막 장면인듯하다. 여전히 27세. 이전 장면들에 비해 선명하다. 감각이 바로 어제의 기억이라고 말한다. 나, 김은호의 시간이 아닌 유그노아의 시간으로 어제. 유그노아는 강가에서 빨래하고 있다. 빨래 같은 잡일은 막내 부제인 유그노아의 담당이다. 한창 빨래하던 도중 누군가가 다가와서 길을 묻는다. 길을 가르쳐주려 고개를 돌린 순간, 갑자기 물속으로 처박힌다. 숨이 막힌다. 반항해보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유그노아는 질식하여 숨이 끊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죽은 유그노아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광채들은 얇은 비단처럼 넘실거리더니 이내 한데 뭉쳐 유그노아의 머리와 심장 부위로 스며든다. 잠시 후, 수도복을 입은 누군가, 아니, 이제는 알겠다. 윌리엄 상급부제다. 그가 유그노아를 발견하여 수도원으로 둘러업고 간다.


고통이 가시며 시야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윌리엄 상급부제가 보인다.


“유노 부제. 괜찮나?”

“...네. 잠시 머리가 아파서 그랬습니다.”


유노라면 유그노아의 줄인 이름이다. 유그노아가 죽고, 김은호가 이 몸에 깃든 것이다. 방금의 두통은 나에게 유그노아의 인생에 대한 정보가 입력되며 생긴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이 몸에 들어온 것이니 반대려나.


“정말 다행이야. 깨지 않길래 자네가 죽을 줄 알았네. 어쩌다가 물에 빠진 건가?”


사실대로 말하고 범인을 찾으면 좋겠지만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생명. 괜히 큰일에 말려들 생각은 없다.


“죄송합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래. 충격이 클 테니 억지로 떠올리거나 하지는 말게. 혹시 일어날 수 있겠나? 가능하다면 원장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어떤가 해서.”


기억에서 보였던 황금빛의 광채가 뭔가 도움을 줬는지 신체를 움직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윌리엄을 따라갔다.


나, 이제는 유노가 된 김은호가 있는 이곳은 제국 북부의 외진 곳에 있는 조그마한 수도원이다. 사제를 길러낸다기보다는 주변 마을 사람들이 주일에 와서 기도하는 마을 교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규모가 작으니 수도원의 원장실까지도 금방이었다.


“제롬 원장님.”


윌리엄이 공손하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자 윌리엄은 들어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70세 정도 되어보이는 비대한 몸을 가진 노인이 의자에 앉아있는게 보였다.


제롬 수도원장은 탐욕스러운 권력자처럼 생겼지만 성격은 정반대로 느긋하고 인자하다. 다만 빵과 맥주를 너무나 좋아하는데 움직이는걸 싫어해서 살이 쪘을 뿐. 마을의 아이들이 돼지같다고 놀려도 허허 웃고 마는걸 보면 인격자임에는 틀림 없다.


“아, 유노. 정말 다행이구나.”


제롬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나를 안았다.


“신의 은총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수도원장님의 기도 덕분입니다.”


평소의 김은호라면 하지 않을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온다. 아마 유노의 몸에 내가 깃들면서 생긴 현상일 것이다. 수도원장과 대화를 하며 이런 분석을 하는 걸 보면 다행히 유노의 인격에 내가 잡아먹히거나 한건 아닌 모양.

잠시간의 대화가 이어졌다. 제롬 원장은 소화불량이 있는지 중간중간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게 빵을 좀 적당히 먹던가 하지.


“당장 몸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혹시 모르니 오늘 하루는 쉬거라. 내일 새벽미사부터 참석하는걸로 하자꾸나.”

“네. 제롬 원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제롬도 나를 배웅해주려고 몸을 일으킨다. 그 순간, 제롬이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크으윽!”

“제롬 원장님!”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제롬은 쓰러지진 않았지만 탁자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 동시에 너무나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더욱 강하게 두드린다.


“원장님. 가슴이 많이 답답하십니까?”

“그...래. 막...짓누르는...기분이군...”


지구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혈액 검사나 심전도 검사를 한다면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제롬 수도원장의 비대한 몸과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증상 호소를 봤을 때 심근경색이 강력히 의심된다. 하지만 의심한다고 해서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김은호의 차가운 이성이 말한다. 포기하라고. 기계처럼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미리 사망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감정은 반대로 제롬을 살리고 싶다고 말한다. 착하디 착한 유노의 영향일 수도 있다. 한 달 뒤에 오는 죽음 앞에서 젊은 날의 열정이 살아난 걸 수도 있다. 사실··· 이유는 상관없다. 살리고 싶다. 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살리고 싶다.


나는 손을 뻗어 제롬의 심장 위에 얹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걸 알지만,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그 순간, 기억에서 본 황금빛 광채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작가의말

처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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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노, 발을 담그다 (3) 24.09.12 17 0 11쪽
9 유노, 발을 담그다 (2) 24.09.11 19 0 12쪽
8 유노, 발을 담그다 (1) 24.09.10 28 0 11쪽
7 유노, 전염병을 마주하다 (5) 24.09.09 24 0 12쪽
6 유노, 전염병을 마주하다 (4) 24.09.07 24 0 12쪽
5 유노, 전염병을 마주하다 (3) 24.09.06 24 0 12쪽
4 유노, 전염병을 마주하다 (2) 24.09.05 29 0 12쪽
3 유노, 전염병을 마주하다 (1) 24.09.05 27 0 13쪽
2 은호, 유노가 되다 (2) 24.09.04 28 0 12쪽
» 은호, 유노가 되다 (1) 24.09.03 5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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