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연기하는 천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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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9.04 16:06
최근연재일 :
2024.09.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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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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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5.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

DUMMY


* * * *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 그치?”


혜성의 얼굴에 계란을 살살 문지르던 진성한이 동의를 구해왔다. 혜성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까 씻고 나왔을 때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혜성이 눈동자만 굴리자 진성한이 웃어 보였다.

남자가 웃자,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 ‘혜성아. 미간 찌푸려봐. 이번에는 스마일. 입꼬리를 올려봐. 허. 허어! 이, 이번에는 슬픈 얼굴. 뿌잉뿌잉. 나 슬퍼요? 어···입꼬리를 늘어트리고 미간 세모꼴로 그래! 그래! 와···그치. 이런 게, 응? 이런 게 천의 얼굴이라는 거야. 그치! 얘들아, 동의하지?’


진성한은 혜성을 두고 천의 얼굴이라 했지만, 혜성이 보기에 진정한 천의 얼굴은 진성한이었다.


- ‘누구누구랑 다르게 잘생김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겼지. 응.’

- ‘···잘생김을 연기해? 누가?’

- ‘누구긴 누구겠어. 이번에 햄릿으로 공연 올린다고 신난 햄릿이지.’


물론 잘생김도 연기라는 우슬희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어쨌든 표정에 따라 얼굴이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뀌어대는 건 혜성 자신이 아니라 진성한 같았다.


배우를 위해 태어난 얼굴.

배우상.

항간에 떠도는 말대로 분위기, 아우라, 인상 등의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배우 하기에 참 좋을 것 같게 생긴 낯.


그런 모든 말들이 뭉쳐진 게 진성한 같았다.


“어떻게 얼굴에 잘생김과 예쁨이 공존하는 거냐. 이게 부기가 안 빠진 얼굴이라니···진짜 부기까지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성한은 어서 부기가 빠지면 좋겠다며 계란으로 혜성의 얼굴로 진득하니 문지를 뿐이었다.

진짜 사람 성격 참 좋네. 어떻게 이러지? 혜성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자상한 진성한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이불 다 폈다.”


거대한 장신을 가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원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이미지가 묵직해 보이는 남자.


‘백건호랬나?’


백나리의 쌍둥이 오빠.

우슬희를 제외하고 칠성 극단에서 유일한 여성이자 배우 중에선 홍일점인 백나리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다.


- ‘나리. 백합이란 뜻이야. 잘 부탁해?’


백나리 누나가 백합을 형상화한 것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같은 느낌이라면 백건호 형은 호랑이처럼 생겼다. 그것도 설산을 거닐 것 같은 백호.


혜성이 칠성 극단에서 최장신으로 추정되는 백건호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꺾었다. 저만큼 자라고 싶다. 혜성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순간, 백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험. 혜성이 몸을 뒤로 물리려는 찰나, 백건호가 손을 뻗어 혜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긴장으로 굳은 혜성을 어깨 위에 얹었다.


두 다리를 백건호의 양 어깨에 걸치고 머리를 핸들마냥 잡게 된 혜성이 눈을 깜빡였다. 응?


“비행기는 시간이 늦었으니 안 돼. 목말로 참아라.”

“아하···아하하하! 건호야. 그래 보여도 혜성이 중학교 1학년이라고.”

“음? 알고 있다만.”

“아하하! 아이고 배야! 하하하하! 사진. 카메라를 어디다 뒀더라하하하하!”


진성한이 바닥을 치며 시끄럽게 웃어댔다.


“뭐야?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연출을 위해 머리를 짜매고 있던 우슬희가 눈을 부라리며 찾아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공연 올릴 때까지 밤에는 조용히 하랬지!”


문 너머로 다들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들. 몇몇은 고개를 내저으며 문과 멀어진다.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바람개비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옛날에 하숙집으로 이용되던 2층짜리 단독주택에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포근하다.


혜성은,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며 화장실로 걸어가는 백건호의 어깨에 앉아 그 모든 풍경을 눈에 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고 있자니 코가 너무 간지러워서였다.


.

.

.


“잘 자라.”

“···잠이 안 오는데요.”

“그래도 자. 키는 잠을 잘 자야 크는 법이다.”

“그럼그럼.”

“···············.”


백건호와 진성한을 바라보던 혜성이 마지못해 눈을 감았다. 여름용 인견 차렵이불이 사락거렸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성한은 그 숨소리를 눈을 감은 채로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잠에 들었다는 소리였다.


둘은 문을 닫고 1층으로 내려왔다.

거실을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가자, 칠성 극단원들과 우슬희, 고산. 그리고 고산의 오랜 지인이자 칠성의 변호사, 동시에 백남매의 부친인 백준범이 그들을 반겼다.


진성한과 백건호는 백준범에게 눈인사를 하며 자리로 가 앉았다.


“일찍 왔네?”

“일찍 잠에 들더라고.”

“자는 척하는 건 아니고?”

“제대로 잠들었어. 사나흘 동안 길거리를 헤맨 모양인데 제대로 잠이나 잤겠어? 긴장이 한 번에 풀어졌겠지.”


진성한이 씁쓸한 낯을 했다. 그리고 빈 자리를 한번 슬쩍 바라보았다.


“···안 왔네.”

“그 아저씨가 우리 아지트로 걸음 안 한 지가 언젠데. 자, 자, 됐어. 됐어. 하나둘석삼너구리, 오징어육개장칠면조팔뜨기, 구급차, 십자가. 다 왔네. 다 모였어. 좋아. 좋아···. 시작해 보자고.”


우슬희가 오이를 씹으며 이어 말했다.


“일단 다들 칠성에 입단시키는 건 찬성인 거지?”


안건은 하나였다.

천혜성의 처우 결정.


우슬희의 말에 외부 관계자라고 할 수 있는 백준범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장일치.


하긴. 이 부분은 이미 오후 연습이 시작되기 전, 입단 오디션 때부터 그러기로 정한 거니까. 우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볼펜으로 해당 문제에 동그라미 표지를 쳤다.


“좋아. 의견 합치가 빨라서 좋네. 그럼, 이제 이 꼬마의 거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인데···”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 * * *



“그러니까! 그렇게 안일한 태도로!”

“잠깐! 잠깐잠깐! 다들 진정해. 이러다 깨겠어.”


우슬희가 두 손바닥을 펼쳐 말리는 시늉을 했다.


“아무리 2층 방과 1층 부엌 사이에 거리가 있더라도 이렇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 다 들리지 않겠어?”


가뜩이나 눈치 보는 솜씨가 장난이 아닌 것 같던데. 우슬희가 중얼거리자, 단원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주어가 빠져있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하아.”

“후우.”

“···············.”


우슬희는 거친 숨소리만 남은 부엌 식탁 위로 한숨을 길게 한 번 내쉬었다. 소강상태. 우슬희가 펜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이어 머리를 쓸어 넘기자, 긴 옆머리가 머릿결을 타고 흔들렸다.


“좋아. 다들 진정하고. 자, 상황을 정리해 보자고요. 그러니까···일단 꼬마. 혜성이는. 백준범 아저씨가 알아 와준 바에 의하면, 얼마 전에 모친상을 당했고, 몇 년 전에는 부친상도 당해서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거야.”


거기까지 말을 내뱉은 우슬희가 착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가 친인척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고, 모친 장례식 중에 실종이 된 다음에 경찰서나 관계기관에 아동 실종신고도 들어온 적 없는. 한마디로 아무도 관심이 없는 아이라는 거지. 법정대리인도 없어서 상속 정리도 안 되어있는 건 덤이고.”

“음.”


고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슬희는 처음 시작과 달리 새까만 깜지처럼 변한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톡톡 볼펜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건호 오빠는.”


우슬희가 고개를 들어 백건호를 바라보았다.


“건호 오빠는, 이런 상황이니만큼 아이 주변에 아이를 돌보아 줄 사람도 없겠다, 아버지가 위탁부모 자격도 있겠다, 혜성이를 조금 더 완벽하게 배우로서 키울 수 있게 우리가 돌보는 게 맞다고 보는 거고.”


우슬희의 말에 백건호가 끄덕이자, 백건호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따라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백건호를 바라보던 우슬희가 이번에는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백나리가 앉아 있는 방향을 향해서였다.


“나리 언니는, 아이가 학대를 받은 정황이 있어 보이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고, 예전 같은 여건과 환경도 되지 않으니 제대로 돌보지 못할 바에는 기존에 맡았던 아이들처럼 그룹홈이나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보는 거고. 극단에서는 연기 지도만 하도록 말이야.”

“맞아.”


백나리가 정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쉰 우슬희가 관자놀이를 엄지로 문질렀다. 양측 모두 의견이 합당했고, 주장 또한 팽팽했다. 몇 시지. 우슬희가 슬쩍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새벽 2시 54분. 벌써 이 안건만 가지고 3시간 30분이 넘도록 떠들었네. 우슬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계속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 내일 아침에 추가로 주문한 소품이 도착하기로 해서 일찍 극장에 나가봐야 한단 말이야.”

“음.”


고산이 팔짱을 낀 채로 침음을 흘렸다.

그 순간, 진성한이 턱을 괸 채로 입을 열었다.


“투표해. 이럴 땐 무조건 다수결이지.”

“투표?”

“투표하고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는 거야. 반문 없음. 그런데 없음. 다시 투표하기 없음. 무르기 없음. 취소 없음. 기권 없음.”

“백준범 아저씨도 투표하는 거야?”

“빼고. 그래야 딱 아홉이잖아.”


진성한이 이 문제로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결정하자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산과 함께 칠성 극단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진성한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단원들이 하나둘 그렇게 하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3시간 30분이 넘도록 결론이 나지 않던 천혜성의 거취 문제에 대한 논의가 끝을 맺었다.


8월 21일 새벽 2시 57분 10초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



“············.”


8월 21일 아침이 밝자마자 세대주 고산과 함께 행정복지센터를 찾았던 천혜성이 묘한 얼굴로 종이를 들었다. 주민등록등본에 제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위로 줄줄이 이어진 극단원들의 이름 또한 보였다.


‘많아.’


천혜성이 자신을 포함해서 10명이나 되는 인원이 올라가 있는 주민등록등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더위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쳐다보고 있었을까. 뜨거워진 머리 위로 차가운 손이 닿았다.


머리가 쓸리며 기다란 앞머리가 시야를 가렸다.

천혜성이 고개를 들었다.


웃고 있는 고산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는 게 능숙했다. 아침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버리던 백건호와 비교되는 손놀림. 천혜성이 눈을 깜빡였다.


- ‘법정대리인 문제랑 상속 정리 문제가 남아있긴 하다만.’


오늘 아침.

열무김치를 들고 말을 이어가다, 어린애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듯 고개를 흔들던 우슬희가 떠올랐다. 그다음 뭐라고 했었지. 아. 이렇게 말했다.


- ‘어쨌든 이제 우리가 가족이라는 거지. 가족.’

- ‘잘 부탁한다!’


우슬희 앞에 놓여있던 열무김치 하나를 뺏어 먹으며 진성한이 웃었다. 그리고 그를 따라서 나갈 준비를 하던 극단원들이 잘 부탁한다고 웃으며 지나갔지.


- ‘악! 꺼내먹으라고! 아, 진짜. 모자라겠네···음? 뭐. 왜. 너도 줄까?’


우슬희가 열무김치 그릇을 든 채로 물어왔다.


혜성이 멍한 얼굴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데 차가운 손이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혜성이 눈을 깜빡였다.


눈동자에 이채가 돌아온 것을 느낀 고산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꾸나.”

“·········어디로요?”

“배우가 갈 데가 따로 있나.”


연기하러지. 고산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혜성은 천천히 고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연기하러.


.

.

.


“연기. 해본 적은 있어?”


칠성 1관, 일성관.

입단 오디션이 있었던 칠성관과는 비교가 될 정도로 작은 무대. 고산 옆에 앉은 우슬희가 물어왔다.

우슬희의 물음에 무대 위에 선 혜성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응. 그렇겠지.’


우슬희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하루 차이로 혜성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 우슬희가 혜성을 안쓰러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럼 재밌게 본 드라마나 영화는.”

“············.”

“응.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원래 다 그래. 오히려 좋아.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니까. 아! 그냥 의례적인 질문 한 거니까 마음에 담아두진 말고?”


우슬희가 자리에 앉은 채로 낡은 책을 떠들어봤다.

때가 타서 너덜너덜한 책은 칠성 극단원들이 사용하던 희곡 대본집이었다.


“음···일단 혹시 표정이나 자세에 버릇이 든 게 있는지 봐야 하니까 아무 연기나 하나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전혀 부담갖지 말고···음···적당한 게···어디 보자···잠깐만···”


우슬희가 종이를 팔락거렸다.

대사를 찾는 거다. 빠른 손놀림으로 책을 넘기는 우슬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적당한 대사가 없나. 혜성은 우슬희가 세 권째 책을 뒤적거리는 걸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운 대사는, 하나 있어요.”

“응?”


외운 대사가 있다고?

드라마랑 영화도 안 보고, 연기도 해본 적이 없는 녀석이? 우슬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어디서 이 꼬마를 주워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였다.


아. 성한 아저씨 연기를 훔쳐보고 있었다고 그랬지.

우슬희가 알만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상을 한번 보고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는 아이니까 성한 아저씨의 연기도 그대로 외운 거겠지.


근데 그 인간 연기는 좀···우슬희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성한.

그는 고산이 주운 천재이자 반평생을 받쳐서 완성해 낸 작품이었다. 연기를 위해 태어나고, 엘리트 교육을 거쳐서 자라난 준비된 스타.

연기파 배우라면 무조건 거친다는 햄릿을 데뷔작으로 가져가는 이유도,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번개 같은 분노와 폭풍 같은 슬픔에 사로잡힌, 광인의 연기를 하는 것인지 광인이 되어가는 것인지 모를, 그러면서도 날이 선 통찰력과 지성을 담고 있는, 누구보다 강하여 다정하고,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유약하여 우유부단함을 가진. 극중극 인물이 아닌 오롯한 인간. 입체적인 햄릿을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히 불혹을 넘긴 40대 배우들이 햄릿을 맡겠는가. 그 정도로 난도가 있는 연기를 어린아이가 도전한다?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아이기에, 스스로 단번에 깨달을 거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기가 많이 죽을 텐데.


“으음. 혜성아······”


뭐라고 말리지. 우슬희가 고민하는 그때, 고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번 보여줄 테냐?”


혜성이 무표정한 낯으로 귀 끝을 쫑긋였다. 즐거움이 담긴 목소리. 허락이다. 혜성이 고개를 끄덕인 뒤 대사를 되짚었다. 뭐라고 말했더라. 자세는 어땠지. 혜성이 멍하니 기억을 더듬다 저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았다.


검은 화면 속.

무릎을 꿇은 진성한이 보였다.

하나. 둘. 수십. 수백. 새까만 눈으로 보았던 진성한이 초 단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혜성은, 남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남들보다 조금 많이 보는 편이었고, 남들보다 조금 관심 있게 보는 편이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그것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기억은 혜성을 어제 그 순간으로 데려갔다.


에어컨 바람에 흔들리는 진성한의 머리카락.

진성한이 숨을 쉴 때마다 움직이던 눈썹의 움직임.

들숨 날숨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던 가슴.

꽉 다문 어금니를 타고 들어가는 볼의 근육.

턱을 따라 침을 삼키는 목울대와 당겨지는 핏줄. 꿈틀거리는 혈관까지.


화면은 끝도 없이 확대되어 간다.

눈을 감은 채로도 무언가 보인다는 듯 혜성의 눈동자가 눈꺼풀 밑을 헤엄치듯 돌아다녔다. 빨리. 더 많이. 더 빠르게. 수백 장의 사진이 상념 속에서 초 단위로 깜빡거렸다. 움찔. 움찔. 혜성의 몸이 제자리에서 흔들렸다. 지하철에 탄 사람처럼. 혜성이 뒤꿈치를 들었다 내려놓았다.


검은 화면을 바라보던 혜성이 손끝을 움찔거렸다.

진성한이 숨을 들이쉴 때 혜성 또한 들이쉬고, 진성한이 숨을 뱉을 때 혜성 또한 숨을 내쉰다. 진성한이 어금니를 깨무는 것을 혜성 또한 따라 한다. 직후 혜성의 뭄이 풀썩 무너졌다. 무대에 무릎을 꿇은 채로 혜성이 호흡한다. 호흡은 천천히 천천히 작아진다.


그리고 끝내.

혜성이 사라지고 남자가 새까만 눈을 떴다.


“허······이 미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귓가를 파고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들렸나. 남자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으로는 자신의 목을 가린 남자가 천천히 목에 힘을 주었다.


“죽느냐.”


물기 묻은 목소리가 연이어 말했다.


“사느냐.”


지금 나는 어딜 보는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문제로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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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Lv.69 바라하
    작성일
    24.09.14 16:22
    No. 1

    한방에해결!시원하군!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99 풍뢰전사
    작성일
    24.09.17 18:01
    No. 2
  • 작성자
    Lv.10 시금치나물
    작성일
    24.09.17 18:38
    No. 3

    너무 잘 보고 있어요. 재밌고 다 좋지만, 진짜 애매하네요. 주인공이 생각이 깊고 똑똑한 편인데 왜 자기입으로 사정 설명을 안하는걸까요. 미취학 아동도 아니거늘 전혀 사정 얘기를 안하니까 극단 단원들이 저러는게 약간 월권 같고 뒷조사하게되고 순서 안맞는거 같고 여튼 이상함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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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혜성이 문틈 너머로 뻗었던 손을 가져왔다 +4 24.09.04 1,197 46 15쪽
1 1. 그림자에 잠긴 집안 +5 24.09.04 1,606 54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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