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연기하는 천재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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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9.0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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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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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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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 그림자에 잠긴 집안

DUMMY


그림자에 잠긴 집안.

달그락. 창백한 달빛이 창가 근처를 느긋하게 훑어내렸다. 달그락. 식탁 위에서 분주히 손을 놀리던 아이가 몸을 굳혔다.


째깍.

째깍.

째깍.


잠시간 멈춰있던 아이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쌀 한 톨까지 박박 긁어먹은 밥그릇이 보였다.


그릇 안은 붉은 줄로 엉망이었다.

아이는 밥에 케첩을 비벼 먹은 흔적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닦았다.


아직 배가 주렸지만, 시간이 없었다.

밥그릇과 숟가락을 재빨리 집어 드는 순간, 아이의 눈동자가 현관문 쪽을 향했다.


구두소리.

예민한 청각이 집 밖에서 들려오는 구두소리를 잡아챘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구두소리. 익숙한 박자의 걸음걸이.


근처다.

미간을 좁힌 아이가 숟가락과 밥그릇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물을 틀어 그릇만 적시고 빠르게 잠갔다. 이미 늦었다. 아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린 아이는 그림자에 빨려 들어가듯 거실 구석으로 미끄러져, 케케묵은 이불로 몸을 덮었다. 이윽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이불 너머로 새어 나왔다.


창백한 평화가 집안에 내려앉은 그 순간.

쇠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주홍빛이 쳐들어왔다. 현관 등이 켜졌구나. 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확신했다.


여자다.


기이익, 쾅.

문이 닫히고 쿵, 쿵,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뒤따라왔다.


구두를 현관에 던지고, 다시 벽에 부딪히며 비틀비틀 걸어오는 소리.

딸깍. 손바닥을 내려쳐 불을 켜고, 발이 망치라도 된 것처럼 온 집안을 찍으며 걸어오는 걸음걸이.


평온을 가장한 긴장이 아이의 심장을 점점 죄어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맥박과 함께 전해져왔다.


아이는 천천히 숨을 뱉었다.


그 순간, 이불 위로 그림자가 졌다. 빛 위로 진 짙은 그림자. 코를 마비시키는 알코올 냄새와 진한 향수 냄새. 여자가 앞에 서 있는 게 분명했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후우우우.

긴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냄새. 이불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다.


얌전히 눈을 감고 있던 아이의 눈꺼풀 안으로 새빨간 뭔가가 솟구쳤다. 저 깊은 곳에서 튀어 올라왔다. 나는 왜. 무감했던 얼굴이 출렁였다. 어떤 것이 피부밑에서 차오르려는 찰나.


“야.”


알코올에 절여진 부름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아이는 대답 없이 침묵했다.


“야. 안 일어나?”


연이은 부름에 아이가 이불 안에서 가만히 눈을 떴다.

아이의 눈동자는 이불 밑으로 진 여자의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야, 이 개새끼야.”


부름이 한 번 더 이불 위로 떨어졌을 때, 아이는 확신했다.


일어날 때까지 계속할 작정이구나.

아이는 부러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생각했다. 베란다에서 잘걸.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빛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하여 마주친 것은 또 다른 눈이었다.


눈.

흰자가 있어야 할 곳이 누렇다. 썩은 동태 눈깔처럼 경계가 흐릿한, 술과 담배에 찌든 눈이었다.


아이가 재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하···, 이 씨발새끼가···.”


입술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노란 치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입술의 움직임에서 익숙한 감정을 읽었다. 분노.


“내가 말했지. 니 눈깔은 천무영이랑 닮아서 보기 싫다고.”


아이는 날아오는 손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삶이란 뭘까. 고통?


.

.

.


ㅡ 아하하하. 아하하!

ㅡ 그거 정말 웃긴데요?

“커어어어.”


즐거운 듯 떠드는 TV 소리. 그 뒤를 따라붙는 코골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는 곰팡이가 창궐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ㅡ 아하하! 정말요?


그리고 또 생각했다. 뭐가 저리 즐거운 걸까. 모르겠어.


그렇게 상념을 이어가는 도중, TV에서 흘러나온 빛이 집안을 훑었다. 빛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아이의 온몸을 드러냈다. 얼굴 팔다리 할 것 없이 멍이 한가득한 몸을.


오래된 멍과 새로운 멍. 피부가 드러난 곳은 전부 곰팡이처럼 얼룩이 져 있었다. 그 사실을 까발리겠다는 듯 빛은 아이의 몸을 조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무감한 얼굴로 천장만을 바라봤다.


어둠에 잡아먹힌 천장과 집안은 온통 새까맸다.


마치 제 삶처럼.

새까맣다. 암울하다. 재미없는 삶.


째깍. 째깍. 아이는 자비 없이 흐르는 초침의 소리를 들으며 천장을 응시했다. 여자가 일어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는 자포자기하듯 눈을 감았다.

오갈 데 없는 시골의 방학이 지옥인 걸까, 아니면 이 삶이 지옥인 걸까.


모르겠다.


.

.

.


ㅡ 오늘 가볼 곳은···


아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한낮이었다.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 아이는 누운 채로 눈만 굴렸다. 조용하다. 아이의 시선이 열린 방문 쪽으로 움직였다. 이상해. 여자의 움직임이 들리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ㅡ 너무 멋있는 곳이죠. 지어진 지는 올해로···


TV.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는 소리.

바깥에서 들려오는 백색소음들은 전부 그대로인데 여자의 것만 없었다.


몸을 일으킨 아이가 느린 걸음으로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안방을 공유하던 누군가의 흔적이 야만스럽게 사라진 안방. 여자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이는 죽은 듯 누워있는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TV에서는 즐거운 듯 떠드는 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이는 어제 여자가 했던 대로 그 앞에 섰다.

그러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여자가, 죽었다.



* * * *



급성 간부전으로 인한 급성 뇌부종.

여자의 사인이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웃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상하다. 아이가 몸을 돌렸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지렁이처럼 온몸을 꿈틀거리는 느낌. 화장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벅.

아이가 한 걸음을 내딛자, 시골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겉으로는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지만 아이는 속지 않기로 했다.


엄마라는 여자에게, 그 이전에는 아빠라는 남자에게. 내내 맞아온 저를 모른 척해 온 것 또한 저들이었으니까.


아이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화장실이라고 써진 화살표를 따라 코너를 돌았다.


그렇게 아이가 사라지자, 장례식장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보험 직원이 뭐래요?”

“뭐긴 뭐야. 애 엄마는 애 아빠 때랑 다르게 급성 바이러스간염인가 뭔가로 인한 급사니까 보험이 인정된다, 이거지.”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래요? 저번처럼 한 5억 나온대?”

“5억은 무슨. 저번이 특별한 경우였고, 이번엔 한 8천만 원 정도만 나올 것 같다더만.”

“···허이구야. 8천? 그것도 많네.”

“보험으로만 5억 8천만 원이네.”

“에헤이. 그걸 그렇게 계산하면 어떻게 해. 천무영 그 양반 죽은 지가 벌써 3년도 넘었어. 3년 내내 애 엄마가 술만 마시고 탱자탱자 놀기만 했는데 그만큼이나 남아있겠냐고.”

“으응? 모르는 소리. 천씨 바람난 거 알기 전에 저놈 엄마가 얼마나 똑 부러졌었는데. 젊은 부부가 대출도 없이 집 샀다고 시골 바닥이 난리였었잖아. 내 장담하는데 아마 상속세 내고도 저놈 통장에 6억은 넘게 남아있을 거다.”


말을 뱉은 남자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저놈이 올해 만 나이로 몇이지?”

“음? 아마···올해 중학교 들어갔다 했으니까 만 나이로 열둘이나 열셋 하겠지. 열넷인가?”

“그래? 어리네. 그럼 그, 뭐야. 법정 대리인이 필요한 나이. 아닌가?”


법정 대리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시골 사람들이 일제히 아이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기심. 탐욕. 질시. 욕망. 날것의 감정이 한데 뒤엉켜 만들어진, 어긋난 관심이었다.


.

.

.



“···그러니까 애를 죽이자고?”


아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손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고민도 없이 우선 벽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허벅지에 물기를 닦으며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이럴 때 얼굴 들이밀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배운 지 오래였다.


“보험사에서 눈치채면?”

“누가 눈치채는데. 여기 시골바닥이에요. 우리만 조용히 하면 절대 모른다니까? 지청화 장례식 여는 데만 닷새가 넘게 걸렸어요. 후우. 우리 마을이 이래. 여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쉬쉬하면 완전범죄도 가능할 거라고.”

“아, 이 사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네.”

“술은 무슨! 잘들 생각해. 자그마치 6억이야. 6억.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놈 저대로 어른 될 때까지 몸 성히 클 거라 생각한 사람 있어? 애초에 지 엄마 손에 죽든, 지가 자살을 하든, 뭐가 되었든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었잖아.”


남자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낄낄 웃었다.

그래서 저놈이 십 년 넘게 처맞고 살아도 다들 가만있었던 거 아니야? 중얼거린 남자가 소주를 입에 부었다. 시뻘게진 남자의 낯이 아이 눈에 박혔다.


아이는 저 얼굴에 맺힌 게 무슨 감정인지 잘 알았다. 탐욕. 탐욕이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 중에 저 음침한 새끼한테 정 붙인 사람 있었냐고. 다들 뒤에서 그 천무영 도박꾼 새끼랑 똑같이 큰다고, 소름 끼친다고, 씨발, 어! 게다가 나는 받을 돈이 있다 이거야. 난 천씨한테 3천만원을 빌려줬었다고!”

“이봐. 이봐! 그만 들어가. 장례식장에서···”

“왜! 씨이이발, 다들 솔직해져 봐! 니미, 지청화가 지 새끼 앞으로 사망보험금 거액 들어놓은 거 모르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나와보···”

“그만 해. 그만. 자네 술에 너무 취했어.”

“왜에에! 나와보라고오!”


새까만 눈동자에 시골 어른들의 면면이 맺혔다. 죄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억이 있던 때부터 보아왔던 얼굴들.


“나는, 나는! 틈만 나면 사람을 관찰해 대는 저놈 눈깔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어. 화장실에서 나오기만 해보라고. 저놈 새끼 눈부터 내가···”


듣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변해간다.


동조. 눈깔을 판다 어쩐다고 하는 남자의 얼굴을 닮아가는 어른들. 아이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직감과 함께 수십 명의 손과 발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잠시간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소리 없이 몸을 돌렸다.


ㅡ ‘오늘 가볼 곳은···’


어째서인지 먼젓번에 들었던 TV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가 귀에서 물을 빼내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른들의 말소리가 뒤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이는 걸으면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숨을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피할 곳. 될 수 있는 대로 장례식장과 멀리 떨어진 곳.


아이가 문을 빠져나갔다.


.

.

.


아이는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퍼붓는 비에 멀리 내다보는 게 불가능했다.

인제 어쩌지. 꽤나 걸어왔는데도 적당히 숨을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이가 몸을 돌렸다.

뒤쪽이 소란스러웠다.


최소 셋. 자신을 쫓아온 게 분명했다. 아이가 급한 대로 풀숲에 몸을 숨기고 눈동자를 굴렸다. 짧은 순간, 빠르게 움직이던 시야가 한 곳에서 멈췄다.


트럭이다.

짐이 텅 빈 것으로 보아 오늘 서울로 올라간다던 만물상 트럭이 분명했다. 아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트럭의 짐칸을 바라보았다. 몸을 숨길 수 있으려나?


“···네는···기를···펴···!”

“멀·········갔을···야···놓······안···!”


고민은 짧았다.

아이는 지척까지 다가온 목소리들을 피해 몸을 움직였다. 뒤쫓아오는 발걸음 소리와 빗물에 삼켜지는 목소리들. 아이는 무감한 낯으로 짐칸 위를 덮은 방수막 틈을 벌렸다.


틈새로 몸을 비집자 멍든 몸이 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익숙한 감각. 아이는 몸이 쓸려 피가 나든 말든 계속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과 등이 퍽! 소리를 내며 맞닿았다.


“없···까! 여······라···”

“오······렀고···일······시···고, 어···피···리는···갔······까.”


아파. 아이가 방수막 위에서 나는 소리를 피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장례식 내내 누적된 피로와 고통이 상당했다. 아이는 멀어지는 목소리들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



트럭에 타지 말 걸 그랬나.

아이는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트럭에 잠깐 몸을 숨기려다가 그대로 잠이 들 줄이야.

보통 출발 전에 짐칸 확인 정도는 하지 않나? 아이가 눈을 굴렸다. 혜화역. 낯선 간판을 바라보며 아이는 고통을 호소하는 발을 움직였다.


어디로 가지. 어지러울 정도로 느껴지는 더위. 주린 배. 숨 막히는 먼지. 시끄러운 도시 소음. 빠아앙, 도로를 내달리는 차. 붉게 빛나는 간판 아래에서 아이는 걸음을 무작정 옮겼다.


트럭에서 몰래 내린 게 언제였지. 서울이라는 표지판을 보자마자 내렸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아이가 마지막으로 먹었던 육개장을 떠올리며 숨을 삼켰다.


배고파. 힘들어. 괜히 도망쳤나. 그대로 죽을 걸 그랬나. 머리가 어지럽다. 먼지에 기침하며 상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왜 살아남았지. 뭐 때문에 도망쳤지.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이유가 뭐지. 왜 살아남아야 하지?


아이의 눈동자가 끝내 텅 비어버리려는 찰나, 단내가 코끝을 스쳤다.


보름 넘게 사막을 헤매고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 이럴까.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예민한 감각은 단내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핫초코.


.

.

.


아이는 오랜 기다림 끝에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사내를 뒤쫓았다.


걷고, 건널목을 건너고, 골목길을 걷고, 계단을 오르고, 문을 넘고, 걷고,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계속해서 쫓은 끝에 이제 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젊은 사내가 돌연 붉은 문을 넘어갔다. 붉은 문. 그제야 아이는 정신을 차렸다.


뭐야?

여기가 어디지?

아이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누군가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는 찰나, [칠성]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칠성]. 아이가 메마른 눈으로 글자를 담았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나가자.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왔냐? 뭐야. 또 핫초코야?”

“봐줘요. 이거 없으면 안 된다고요.”

“자자, 알았어요! 지방 방송 끄고, 다들 위치로 가주시고! 다들! 뭐처럼 옷도 제대로 갖춰 입었겠다. 연습도 제대로 해보자고! 우선···, 햄릿!”

“햄리잇?”

“뭐? 왜 햄릿부터야?”

“우우우!”


TV에서나 들을법한 밝은 목소리. 아이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메인 디쉬부터 하는 게 어딨어?”

“메인 디쉬니까 가장 먼저 점검해야지. 어이, 잘생긴 아저씨. 어서 올라오라고!”

“아저씨 아니라니까.”

“아저씨, 3막 1장부터 갈게요!”

“야!”


아이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붉은 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낯선 것을 향한 이끌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아이와 문틈이 가까워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가 자석처럼 문에 달라붙었다.


아이는 문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동시에 아이의 세상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TV에서나 보던 커다란 무대. 붉은 좌석들. 무대를 커튼처럼 반쯤 가린 붉은색 천막과 황금색 휘장. 문틈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원목의 향, 별빛처럼 조명 아래를 떠다니는 먼지들.


‘···와.’


아이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러고는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마냥 문에 몸을 붙였다.


넋을 놓고 안을 쳐다보는 사이.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입은 낯선 복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이는 옷보다는 그들의 얼굴에 주목했다.


웃는 얼굴.

다들, 아이가 만나왔던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어깨너머로 보던 TV가 내내 말하던 행복, 희망, 꿈. 그런 에너지들이 느껴졌다.


아이는 사람들이 내뿜는 분위기에 빠르게 매료되었다. 다른 세상 같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별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 이럴까. 아이는 두 눈으로 그들을 담아냈다.


근데 왜지.

아이는 어째선지 눈과 코끝이 가려웠다. 안돼. 아이가 눈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무대가 한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뭐야. 아이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때였다. 무대 위로 한줄기 벼락처럼 달빛이 내려앉았다.


아니. 달빛이 아니야.

아이가 무대 위에 달린 조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조명을 쫓아 시선을 내렸다. 달빛이 아니라 조명이었다.


빛은 무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정면을 바라보는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아저씨라 불리던 남자였다.


조명의 빛이 확산하는가 싶더니 수축했다. 그 짧은 찰나, 아이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듯, 남자는 눈을 내렸다.


아이는 남자의 눈을 쫓았다. 남자는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무대보다 더 깊은 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를 보는 거지. 어디를 보는 거야. 아이는 모든 행복과 희망을 내던져버린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안 돼.

본능적으로 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러나 아이의 생각보다 남자의 입이 한발 빨랐다.


“죽느냐.”


말하는 남자의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져 있었다. 남자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렸다. 마치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아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이는 붉은 문을 더듬어 손잡이를 쥐었다.


“사느냐.”


이어지는 말에 아이는 중력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빨려 들어간다. 아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손잡이를 쥔 손이 미끄러웠다. 땀. 나에게 남은 수분이 있었던가. 아이의 몸이 움찔였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문제로다.”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물기가 있었다. 힘이 있었다. 마성이었다.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 웃고 떠들며 장난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순간, 목 위에 올라가 있는 남자의 손이 목줄처럼 보였다.


아이는 눈을 비볐다.


짧은 침묵.

완전한 몰입.

어느새 배고픔도, 고통도, 절망도 제 안에서 사라졌다는 걸 아이는 인식하지 못했다.


나라는 존재를 잊고, 남자에게 완전히 몰입했다는 것도 잊고, 아이는 그저 빨려 들어갔다.


인생에서 가장 다채롭고 강렬한 경험이 몰아치는 느낌.


남자는 말했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빛을 바라보는 눈, 떨리는 목소리, 목소리에 들어찬 고뇌.

모든 게 느껴졌다.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어가는 남자의 말은 작고 볼품없었다. 덜덜 떨렸다. 그러나 또렷하게 모든 단어가 들렸다.


손실이나 오해 없이 전해져오는 감정.

목이 조인다는 듯 남자의 손이 턱 끝까지 올라간다. 아이는 남자가 된 것처럼 숨이 막혔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남자를 시선으로 쫓았다. 남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이는 저게 무어라 불리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았다.


저건, 저게, 저것이, 연기다.


나도.

아이, 천혜성이 문틈 너머로 손을 뻗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들끓듯 강렬한 욕망.


‘나도 저 사람처럼 다른 삶을.’


다른 삶을 살리라.

천혜성은 전율했다.

이건 스스로에게 내리는 예언이자 결심이었다.


배우가, 되리라.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돌아왔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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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쟤는 누구래? +4 24.09.04 942 40 17쪽
2 2. 혜성이 문틈 너머로 뻗었던 손을 가져왔다 +4 24.09.04 1,079 41 15쪽
» 1. 그림자에 잠긴 집안 +4 24.09.04 1,462 4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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